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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세상읽기] 너를 지켜주지는 못했다, 미안하다 / 박진

등록 2020-05-18 17:16수정 2020-05-19 11:52

박진 ㅣ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

13년 전 한 아버지의 전화를 받았다. “우리 딸이 삼성에 다니다 죽었어요. 산업재해 같아요. 그런데 아무도 내 말을 들어주지 않아요. 거기는 삼성하고 끝까지 싸워준다고 하던데…. 나를 좀 만나줄 수 있어요?” 삼성 반도체 산업재해 피해자 중 첫번째 제보자였던 고 황유미씨 아버지 황상기씨와의 인연이 시작된 순간이었다. 그를 동서울 터미널에서 만난 날을 잊지 못한다. 그는 커피잔을 들고 가늘게 손을 떨었다. “삼성에 노조만 있었어도 우리 유미가 그렇게 죽지는 않았을 겁니다.” 말처럼 회사에 든든한 민주노조가 있었다면, 유미씨 죽음을 막을 수 있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적어도 11년 동안 이어졌던 긴 시간을 줄일 수 있었을지 모르겠다. 산업재해가 아닌 개인의 비극일 뿐이라 우기던 회사와 노조도 없이 싸우는 시간은 길고 힘들었다. 산재 피해자들은 산재를 당했다는 입증, ‘산재’라는 ‘자격’을 위해 우선 싸워야 한다.

‘한익스프레스’ 남이천물류센터 신축공사 현장에서 발생한 화재 사고 희생자 분향소를 찾았다. 세월호 참사 정부 합동 분향소에 들어설 때처럼, 38개 영정이 꽉 들어찬 공간의 공기는 무거웠다. 차마 눈 마주쳐 자세히 들여다볼 수 없는 얼굴들은 낯익었다. 살아서 본 적 없지만 어느 거리에서, 밥집에서 만났을 법한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너무 젊어서 서럽고, 초로에 접어들던 내 아버지 얼굴이어서 서러웠다. 카자흐스탄과 중국의 국경을 넘어온 이주노동자들조차 낯설지 않았다. 영정으로 쓰일 줄 몰랐을 사진 속 그들은 꽤 많이 웃고 있었다. 살았었던 존재들의 웃음은 현실적이지 않았다. 38개의 영정이라니, 38명의 죽음이라니…. 그들은 이제 막 시들기 시작한 꽃들 사이에서 뽀얗기만 했다.

거대한 상실 앞에 망각은 빨리도 찾아온다. 4월29일로부터 채 한 달이 지나지 않았는데 유가족들은 ‘잊히는 것’이 두렵다고 말한다. 분향소를 채우던 기자들 카메라가 사라지고, 찾아오는 시민들 발걸음이 잦아들자 이대로 아무것도 밝히지 못한 채 누구도 책임지지 않은 채 ‘끝나버릴 것’에 대한 공포가 찾아왔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던 권력자의 후손이고 그룹 한화의 계열사였던 원청회사 ‘한익스프레스’는 보이지 않는다. 시공사 대표는 “제가 할 수 있는 건 다 하겠다. 죄송하다” 말하며 무릎 꿇고 흐느꼈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게 얼마나 될 것인가. 발주사, 시공사, 하도급, 재하도급으로 이어지는 다단계 구조에서 공사 비용을 줄이기 위해 시간을 좇던 회사만 9개다. 책임의 우선순위는 휘청거릴 힘조차 없을 도급의 맨 끝 무허가 회사들이 짊어지기 딱 좋을 것이다. 그보다 밑바닥에서 노동자들은 생명을 빼앗겼다. 참사를 불러오기 좋았던 구조의 꼭대기에서 발주사, 원청회사는 이름조차 사라졌다. ‘이천 참사’가 아니라 ‘한익스프레스 남이천물류센터 신축현장 산재 사망사고’로 불러야 한다는 요구는 정당하다.

안전보건공단 자료에 따르면 2019년 한해 산재 사망자가 855명, 건설업 사망자는 428명이다. 산재사고로 희생되었다는 입증을 받은 사람만 센 숫자다. 여기에 아직도 입증하지 못한, 입증되지 못한 죽음까지 따지면 얼마나 많은 이들이 있을까. 코로나19 바이러스로 현재까지 263명(18일 정오)이 사망했다. 희생을 줄이기 위해 온 사회가 최선을 다하고 있다. 산업재해 역시 마찬가지다. 능력이 있는 원청회사가 책임을 지게 하고, 노동자를 죽게 하는 기업주를 엄벌에 처하면 된다. 산업재해 입증책임을 노동자가 아닌 사업주에게 지우면 된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 하나 만들지 않으면서, 산업기술보호법을 기업 입맛에만 맞춰 개정하면서,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죽음들을 멈출 도리는 없다.

딸아이가 온라인 쇼핑몰 포장 아르바이트를 가겠다고 한 날, 요란한 악몽을 꾸었다. 물류센터는 불길에 휩싸였고, 박스를 들던 아이 허리는 두 동강이 났다. 깨고 한참 어이없이 있었다. 이 무슨 해괴한 꿈인가…. 그 꿈의 정체가 러시안룰렛 게임처럼 불확실한 확률에 운명을 맡겨야 하는 위험 때문임을 깨닫자 소름이 끼쳤다. 평범한 생존은 기적일지도 모른다. 일상을 빼앗긴 이들의 상실은 얼마나 큰 것일까. 11년 만에 승리한 아버지는 울먹이는 숨을 참다, 말했다. “유미야, 너하고 약속은 지켰는데 너를 지켜주지는 못했다.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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