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와 진보는 추구하는 가치가 엄연히 다르다. 미래통합당의 실패는 진보적이지 못해서가 아니라, ‘보수의 가치’를 제대로 정립하고 실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금의 미래통합당에는 새로운 정책 정립보다 낙후된 행태를 바꾸는 게 더 시급한 이유가 여기 있다.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이 지난 2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 미래통합당 회의실에서 생각에 잠겨 있다. 연합뉴스
김종인 미래통합당 비상대책위원장이 쇄신의 기치로 내건 ‘약자와의 동행’은 2000년 미국 대선에서 조지 부시 공화당 후보가 내걸었던 슬로건 ‘따뜻한(인정 많은) 보수주의’(Compassionate Conservertism)를 떠올리게 한다. ‘부자들의 정당’이라 불리는 공화당이 약자와 소수자를 외면하지 않고 품겠다는 이 구호는 부시 후보의 인간적인 면모와 어우러져, 당선이 유력했던 앨 고어 민주당 후보를 간발의 차로 이기는 데 일조했다.
그러나 보수주의가 따뜻하지 않다는 게 드러나는 데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부유층을 위한 감세 정책에도 경제는 침체하며 온기가 밑으로 스며들지 못했고, 절대빈곤 인구 비율은 해마다 늘었다. 2008년 터진 금융위기는 극소수의 금융자본가들이 얼마나 탐욕스럽게 이익을 챙겼고 정부는 어떻게 방조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줬다. 그해 11월 대선에서 버락 오바마 민주당 후보가 압도적 승리를 거둔 데엔 ‘따뜻한 보수주의’의 실패가 자리잡고 있다. 오바마는 선거 유세에서 “트리클 다운 효과가 모든 국민에 퍼질 것이라는 이론을 4년 더 지켜볼 여유가 미국민들에겐 없다. 이제 페이지를 넘길 때가 됐다”고 공화당 정부를 비판했다.
이 얘기를 꺼내는 건 김종인 위원장의 ‘보수 혁신’ 시도에 어깃장을 놓기 위해서가 아니다. 김 위원장 발언은 과거 보수 정당의 어느 비상대책위원장보다 담대하고 매력적이다. 다만 “미래통합당을 진보보다 더 앞서가는 진취적인 정당으로 만들겠다”는 그의 약속이 과연 현실화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지우기는 어렵다. 보수와 진보는 추구하는 가치가 엄연히 다르다. 미래통합당의 실패는 진보적이지 못해서가 아니라, ‘보수의 가치’를 제대로 정립하고 실천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보수는 진보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의심하지만, 정말 정체성을 알 수 없는 건 한국의 보수다. 보수의 가치로 흔히 주장하는 ‘자유’와 ‘시장’을 한국 보수 정당이 일관되게 지키려 애쓴 적은 거의 없다. 국가 이익을 명분으로 개인의 자유를 손쉽게 침해했고, ‘관치’란 말이 귀에 익을 정도로 시장 개입은 일상적이었다. 선거 때마다 ‘작은 정부’를 공약으로 내걸지만, 집권한 뒤 청와대 비서실의 규모와 역할을 눈에 띨 정도로 줄인 보수 정권은 하나도 없다. ‘국가 안전 위해 행위를 예방, 금지, 처벌한다’는 내용의 홍콩 국가보안법을 ‘민주주의 말살’이라 맹비난하면서, 수십년 동안 ‘국가의 존립·안전을 위태롭게 하는 행위를 처벌’해온 한국의 국가보안법에 대해선 단 한마디 말이 없는 게 한국 보수의 모습이다. 이런 걸 보면서 보수의 일관성이란 오직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가리지 않고 뭐든지 한다’라는 ‘포퓰리즘적 본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는 건 너무 과한 것일까.
지금의 미래통합당에 새로운 정책 정립보다 낙후된 행태를 바꾸는 게 더 시급한 이유가 여기 있다. 대표적인 게 ‘종북’ 프레임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지난 반세기 넘게 미래통합당과 그 전신인 보수 정당들이 흔들리지 않고 일관성을 지킨 가치(이걸 ‘가치’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를 찾자면, 아마도 ‘반북, 친미’가 아닐까 싶다. 그래서인지 모든 사안을 북한과 연결시켜 해석하고 진보 세력을 비판하려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다. 문재인 정부를 ‘종북 주사파 정권’이라 부른 미래통합당의 공식 발언이나 보수 언론의 사설·칼럼을 모아보면 족히 한 트럭은 넘고도 남을 것이다.
전례 없는 총선 참패에도 불구하고 시대착오적 미몽에서 벗어날 기미는 잘 보이지 않는다. 이용수 할머니 기자회견으로 시작된 윤미향 의원 논란이 윤 의원의 사상 검증과 색깔론으로 흐르는 건 단적인 예다. 모든 사안을 ‘기-승-전-종북’으로 끌고가는 전술은 올바르지 않을 뿐더러 효과적이기도 않다. 이걸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는 건 미래통합당뿐이다. 현 정권의 대북 정책 방향을 야당이 비판하고 다툴 수는 있다. 하지만 대북 포용정책을 ‘현 정권 핵심이 종북 세력이기 때문’이란 식으로 몰아가선 설득력이 없다. 죽기살기로 풍차와 싸우는 돈키호테와 다를 게 없는 걸로 국민 눈엔 비친다.
민주당 압승으로 끝난 4월 총선이 ‘진보 다수파 시대’의 개막인지엔 의견이 갈리지만, 적어도 ‘보수 주류 시대’가 끝났음을 알리는 신호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변화한 시대에 걸맞게 행동을 바꾸는 게 ‘혁신’의 시작이다.
박찬수ㅣ선임논설위원
pcs@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