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남기 경제부총리(오른쪽)와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이 지난 6일 국회 더불어민주당 당대표실에서 이해찬 대표, 조정식 정책위의장 등을 만나고 나온 모습. 연합뉴스
서울 강북지역에서 전세살이 15년째인 ㄱ(48)씨는 지난 5월 전세를 옮기면서 두번 놀랐다. ㄱ씨는 지금까지 전세계약을 5차례 치렀지만 이번엔 전혀 다른 경험을 했다. 처음엔 공인중개사로부터 전세 들어가는 집(전용 85㎡)이 최근 매매가 된 곳이라는 말을 들어 그런 줄 알았는데, 전세계약 잔금일에 매매계약 잔금도 동시에 치러진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실제로 잔금일에 공인중개사 사무실에는 ㄱ씨와 집주인, 매수자 3주체가 모였다. ㄱ씨가 집주인에게 잔금을 주고 계약을 마치자, 곧이어 ㄱ씨의 전세금과 계약금을 뺀 나머지 잔금을 매수자가 집주인에게 주는 것으로 매매계약도 끝을 맺었다. 이 집은 전세금은 4억원, 매매가는 6억8천만원이었다. 매수자는 전세금과 매매가의 차액 2억8천만원을 주고 집을 산 셈이다. 최근 몇년간 광풍이 불었다는 이른바 ‘갭투자’였다. ㄱ씨는 집주인들의 매매에 자신이 돈을 대준 꼴이라는 걸 새삼 깨닫고 심한 박탈감을 느꼈다고 했다.
앞서 ㄱ씨는 전세금 마련을 위해 은행에 들렀을 때도 낮은 금리와 높은 신용대출 한도에 놀랐다. 그는 전세자금대출을 한국주택금융공사의 보증을 받아 최대한도(2억2천만원)까지 받았고, 그래도 부족한 5천만원은 신용대출로 해결했다. 금리는 전세대출과 신용대출 모두 2%대 초반으로 몇년 전만 해도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로 낮았다. 신용대출은 모바일로 신청하니 최대한도가 1억5천만원까지 가능하다는 안내문이 떴다.
ㄱ씨의 사례는 아파트값 폭등이라는 불길에 기름 역할을 하는 주택자금대출의 실태와 규제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준다. 우선, 전세금이 아파트 투기의 종잣돈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는 아파트값의 일정 비율까지만 주택담보대출(주담대)을 인정해주는 담보인정비율(LTV) 중심의 현행 규제를 사실상 무력화시키는 것이다. ㄱ씨 사례에서 새 집주인은 주담대를 받지 않았지만, ㄱ씨의 전세금이 사실상 주담대 구실을 했다. 정부가 6·17 대책에서 뒤늦게나마 전세대출 규제를 도입한 것은 다행이지만, 규제가 적은 지역이나 무주택자 등으로 풍선효과가 생길 가능성이 있다.
둘째로, 신용대출이 아파트 투기에 동원되고 있는 점이다. 신용대출은 주로 직장인들이 생계 자금 용도로 2천만~3천만원 정도로 사용하던 것이었는데, 어느새 한도가 1억원을 넘어서 이제는 주택대출의 주요 수단으로 변질되고 있다. 2억원까지 대출해주는 은행마저 있다. ㄱ씨는 전세금 마련에 5천만원의 신용대출을 사용했는데, 매수자도 현금이 부족하다면 신용대출을 활용했을 수 있다.
ㄱ씨 사례에는 적용되지 않지만 개인사업자대출도 주택대출 규제의 큰 구멍 중 하나다. 한마디로 정부가 주담대를 규제해도 전체 주택시장에는 규제를 피한 돈이 거의 무한대로 공급돼온 것이다. 특히 이런 대출은 한도대출로 만기까지 이자만 내는데다, 대출 용도 제한이 느슨해 전용이 가능하다는 특성으로 인해 소득에 견줘 무리한 투자를 부추긴다. 신용대출만 해도 1년 단위로 만기가 돌아오지만 10년까지 연장할 수 있다.
주택대출 규제의 이런 구조적인 구멍은 코로나19를 계기로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코로나19 장기화로 경기악화 우려가 커지면서 정부가 수백조원의 유동성 공급에 나서고 있는 탓이다. 주택대출 규제의 구멍이 더 커질 환경이 조성된 셈이다. 이는 주택대출 규제의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하는 임계점에 도달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런 구조가 지속될 경우 가계부채 급증과 아파트 투기는 앞으로도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킬 개연성이 높다.
<대한민국 가계부채 보고서>의 저자인 서영수 키움증권 애널리스트(금융 담당)는 “지금이라도 무리하게 집을 사는 것을 막는 게 최우선 과제”라며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산정에 누락된 전세보증금과 전세자금대출, 개인사업자대출을 모두 포함해 관리해나가야 하며 신용대출 등에도 원리금 분할상환을 적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대출 용도 전용이 쉽고 이자만 상환하는 비중이 높은 지금의 대출 구조 아래에서는 정부의 부동산 대책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정부가 10일 추가 대책을 내놨지만 주택시장에 공급되는 엄청난 유동성에 대한 엄격한 관리대책은 보이지 않는다. 가계부채 급증과 아파트 투기가 동전의 양면처럼 벌어져온 우리 현실에서 부동산 대책도 가계부채의 점진적 축소와 함께 진행하는 정책의 대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런 과제를 계속 외면할 경우 언젠가는 부동산 거품 붕괴에 따른 경제적 충격이 현실화할 수 있다.
박현 경제부 기자 hyun21@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