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한나 ㅣ 페미니스트문화기획자그룹 보슈(BOSHU) 공동대표
종아리 뒤에 튀는 흙탕물의 까슬함과 다리 사이에서 쭉쭉 흐르는 정혈의 느낌. 정혈대에 스며든 피가 식은 뒤 살결에 느껴지는 애매한 차가움. 이 찝찝함을 한달 평균 일주일 감내하는 우리가 생리를 이유로 중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는 데서 나는 인류의 인내에 감탄한다.
부산역 화장실에서 마주쳤던 사람이 생각난다. 그는 내게 담배 하나 달라고 잔돈이라도 없냐고 물었다. 그는 세면대에 뜨거운 물을 받아 떡볶이를 데우던 참이었다. 10년 지난 이야기지만 그 뒤로 나는 역 주변에서 여자 노숙자와 남자 노숙자가 싸울 때, 밤에 역 화장실에서 드르렁 소리가 날 때면 여자 노숙자가 밤과 정혈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알고 싶었다. 계속 보다 보니 구체적인 결심이 따랐다. 모든 여자에게 생리용품을 무상 지급하고 화장실 칸마다 생리컵 세척대를 설치하게 하자. 아시아 18개국 여성들이 월수입의 6%를 생리용품 구매에 쓴다는데.
거리는 혼잡했다. 친구는 내게 메시지를 보내 빗길의 일을 설명했다. 리어카 끄는 할머니가 빗길에 미끄러지셔서 폐지 올려드리고 왔어. 호우 예비특보가 내려온 다음날이었다. 친구는 세상이 후지다고 했고 나는 정치인 다 뭐 하냐고 했다. 친구는 성추행하지 말고 비 오는 날 폐지 주워야 하는 사람 없게 만들라고 했다. 그가 정치를 하면 좋겠다고 생각하다가 돌아가는 꼴을 보아 하니 유력 정치인이 되려면 80년대에 대학생이었어야 하고, 학생운동을 했어야 하고, 무엇보다 남자여야 하지 않겠는가 생각했다. 내게 분배의 정의와 성평등을 실현할 묘책이 있다 해도 권한이 없었다. 칼인 줄 알았으나 휘두른 순간 칼집이라는 걸 알 때도 많았다.
비가 억수로 오는 아침에 길을 나섰던 이유는 정치인이 다 뭐 하는지 알기 위함이었다. 지난 수요일에는 성평등 활동가와 시·구의원 간의 만남이 예정되어 있었다. 성범죄자를 대거 배출한 집권당 소속의 정치인을 만나지 않고는 답답해서 못 살 것 같았다. 그들은 젊은 여성 의원을 같은 의원으로 생각하지 않고 딸이라고 지칭한다거나 함께 차를 마시는 시간에 “차를 타 와야지 가만히 앉아 차를 받아먹는” 모습을 보고 분개하는 다른 남성 의원의 행태를 전하며 내 마음에 불을 지폈으나, 그중 한 분이 ‘안희정의 오른팔’로 자신을 홍보했던 국회의원으로부터 성평등 스피커가 되어달라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했을 때 내 마음은 냉동실에 처박혀버려 소생이 불가했다. 정치판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유추할 수 있었다.
그래도 입을 연 것은 그가 느낀 당혹과 수치를 나도 알고, 그럼에도 나아갈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질문 시간이 왔고 내가 말했다. 저는 젊은 여성 정치인을 보면 복잡한 마음이 듭니다. 뜻하신 바를 실현하기에는 운신의 폭이 좁고 남성 의원에 비해 검열도 많으니까요. 하지만 저에게는 성범죄자를 내치지 않는 집권당이 국회 180석을 가졌다는 사실이 공포입니다. 당내 성평등 교육도 좋지만 그보다 성범죄 전수조사를 하는 게 효과적이지 않을까요. 목소리가 떨렸다.
반장을 혼내는 기분이 이럴까. 교실에 문제가 생기면 반장 말고 원인을 찾아야 하는데. 그러나 그에게는 또한 원인을 찾을 수 있는 권한이 있다. 그들이 가는 데까지 한계선이 그어지기도 하지만 그들의 존재는 때로 미래를 넘보게 한다. 박원순씨 조문을 가지 않겠다고 밝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의상 이슈로 국회에 공론장을 만든 정의당 류호정 의원처럼 어렵더라도 누군가는 계속해서 미래를 보여주어야 한다. 폭우는 세상의 민낯을 드러낸다. 거리에 쓰레기와 똥물이 떠다닌다. 비가 오면 세상은 가장 나중인 자를 지목하고 개운함을 빼앗는다. 다행인 것은 지금 여기에 수치를 아는 내가 있고 승리를 아는 네가 있다는 것이다. 난리통에 우리는 선을 지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