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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용석의 언어탐방] 아이러니: 모르지만 안다

등록 2020-08-11 17:30수정 2020-11-03 14:21

자신은 모르지만 관객은 안다. 노래 속 인물들은 자신이 기회주의자인지 모르고, 콩고물의 완장을 찼는지도 모를 수 있다. 그러나 노래의 이야기를 듣고 상상하는 청중은 안다. 그들이 진짜 모른다면 이것은 비극적 아이러니이다.
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김용석 ㅣ 철학자

“아이러니 왜 이러니” 가수 안치환이 최근 발표한 ‘아이러니’의 노랫말이다. 운율이 아주 잘 맞는다. 우리말과 외래어가 이렇게 잘 어울리다니, 아이러니라고나 할까. 안 어울릴 것 같은 말들이 실제로 더 잘 어울리는 것은 작사한 사람의 능력이기도 하리라.

노랫말 내용은 안 그럴 것 같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것에 대한 실망과 질책을 담고 있다. “아이러니 다 이러니/ 다를 게 없잖니.” 노랫말의 수사는 직설법에 가깝다. “진보의 힘 자신을 키웠다네”라며 상황을 진단하고 “꺼져라/ 기회주의자여”라고 직접 명령까지 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노랫말이 가리키는 인물들이 기대에 반하는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요즘에는 이렇게 삶의 ‘어긋남’에 대해 아이러니라는 표현을 많이 쓰는 것 같다.

내가 ‘쓰는 것 같다’라고 한 데는 이유가 있다. 1995년에 얼래니스 모리셋이 ‘아이로닉’(Ironic)을 발표했을 때는 노랫말이 아이러니를 오용했다는 논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논쟁은 학술적 논평 수준으로 흥미롭게 흘러가서 최근까지 이에 관한 글들이 발표되곤 했다. 아이러니는 서구 사람들에게 익숙한 개념인데도 왜 이런 논쟁이 있을까. 무엇보다도 그 말이 서구 역사에서 매우 다양하게 사용되어왔고 이제는 일상화되고 국제화되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의 기원은 고대 그리스의 문학과 철학으로까지 올라간다. 그리스어로 ‘에이로네이아’를 특별한 수사적 기법으로 사용한 사람은 소크라테스이다. ‘모르는 체하는’ 것이 그의 주특기였기 때문이다. 특히 당대에 지식인이랄 수 있는 소피스트를 만나서 모르는 체하며 묻고는 잘 아는 체하는 그들의 답변을 유도했다. 그래서 위장 또는 가장이라는 의미의 에이로네이아의 개념은 그 발전 초기에 ‘…하는 척하다’라기보다는 부정적으로 ‘…아닌 척하다’라는 의미로 더 많이 쓰였다.

이런 소크라테스를 이해하는 데는 티브이(TV) 시리즈 <형사 콜롬보>가 제격이다. 콜롬보는 도저히 강력 사건을 수사할 능력이 있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의 어눌한 말투와 꾀죄죄한 외모는 이런 인상을 가중시키는데, 그의 ‘모르는 체하기’와 ‘딴소리하기’의 위장술은 오히려 범인으로 하여금 우월감을 느끼게 해서 범행 증거를 상세히 설명하도록 만들기도 한다.

다른 한편 소크라테스는 에이로네이아의 단초를 그리스 희극의 전형적인 등장인물인 ‘에이론’으로부터 가져왔다. 에이론의 상대역은 ‘알라존’인데 그는 허풍쟁이로서 항상 호언장담하지만, 말솜씨도 서툴고 볼품없는 에이론에게 항상 당한다. 그래서 피상적으로는 호언장담과 허장성세의 알라존과 말을 아끼며 상대에게 일침을 가하는 에이론이 대비된다. 그 심층에서는 전자가 언어의 허영을 후자는 언어의 겸손을 은유한다.

이 점은 소크라테스의 태도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소크라테스가 소피스트를 찾아가 문답식 대화를 할 때는 짓궂기 짝이 없다. 소피스트가 묻지만 말고, 당신도 답을 내놓으라고 하면, “나는 열성적으로 답을 알려고 하지만 내 깜냥이 안 되니 어찌하겠소. 그러니 나를 질책만 하지 말고 오히려 동정심을 좀 가지시구려”라고 둘러대기까지 한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무지를 가장하고 자신을 비하함으로써 대화 상대를 당혹스럽게 만들기만 한 것이 아니다.

끈질긴 에이로네이아의 수법으로 상대가 알고 있는 바를 최대한 끌어내 가능한 한 그를 오류가 최소화된 사고의 길로 이끌려고 노력했다. 이는 그 자신도 진리를 알 수 없고, 깨달았다고 해서 그것을 언어로 표현해 소통하려면 항상 어떤 오류에 빠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의 말은 사실 자기 자신을 향한 것이었다. ‘나 자신을 알라’ 곧 ‘내가 무지의 존재임을 인식하라’는 것이었다. 이는 인간의 인식적 한계뿐만 아니라 존재적 한계를 뜻하는 것이었다.

바로 이 지점을 딛고 그 후의 아이러니 개념은 발전해나간다. 수사적 아이러니에서 존재론적 아이러니로의 발전이 그것이다. 인간이 하는 일들은 불완전하고 오류의 꼬투리를 여기저기 내밀고 있어서 맘먹은 대로 잘 되지 않는다. 그 꼬투리에 누군가가 딴지 걸 것이다. 인간은 뭔가에 운명 지어져 있음을 느끼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알 길이 없다. 신은 화투패를 섞고 우리는 그것으로 놀이를 한다. 가난한 부부가 성탄절을 맞아 선물로 남편은 시계를 팔아 아내의 머리 장식을 사고 아내는 머리를 잘라 팔아 남편의 금시계 줄을 산다는 이야기 등도 그렇다. 이런 상황들에서 우리는 수많은 어긋남을 경험한다. 신이든 운명이든 인간이 하는 일에 훼방을 놓고 ‘아닌 체’하고 있는 것 같다. 이는 사건 또는 상황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란 유한한 존재가 무한한 가능성의 세상을 이해하고 제어하려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어긋남들, 그것이 아이러니이다.

얼래니스의 노래 ‘아이로닉’을 수사적 아이러니의 입장에서만 비판하면 뭔가 모자라 보인다. 얼래니스도 의심스러운 듯, “이거 아이로닉 하지 않니”라는 후렴을 계속 붙이며 노래한다. 그러나 “방금 거절한 조언이 진짜 좋은 조언이고, 이미 표를 샀는데 무료 입장이 되고, 내일 타계할 98살 노인이 복권에 당첨되고, 나이프 한개가 필요한데 천개의 스푼만 있는 상황이라면” 이런 어긋남들은 상황적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안치환이 노래한 우리 삶의 어긋남도 사건과 상황의 아이러니인데, 얼래니스와는 다른 점이 있다. 얼래니스가 운명적이라면, 안치환은 의지적이다. 인간의 의지로 제대로 해야 할 일이 있음을 상기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얼래니스가 에피소드들을 나열하고 있다면, 안치환의 노래에는 하나의 서사가 관통하고 있다. 얼래니스가 팔랑거리는 운명의 장난을 방관자처럼 거리를 두고 노래하지만, 안치환은 그 서사가 또한 자신의 고통과 상처임을 노래한다.

이런 면에서 안치환의 노래에서는 또 다른 차원을 볼 수 있다. 노랫말의 내용이 상황적 아이러니에서 비극적 아이러니로 전환할 가능성이 그것이다. 극중 아이러니한 상황을 극의 주인공은 모르지만 관객은 안다.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운명을 피하기 위해 하는 모든 행동은 바로 그 운명을 실현하는 길로 들어서게 할 뿐이다. 그는 아버지를 살해할 것이다. 이를 오이디푸스 자신은 모르지만 관객은 안다. 영화 <트루먼쇼>에서 트루먼은 자신이 텔레비전 쇼 안의 인물이라는 것을 모르지만 관객은 안다. 마찬가지로 안치환의 노래 속 인물들은 자신이 기회주의자인지 모르고, 콩고물의 완장을 찼는지도 모를 수 있다. 그러나 노래의 이야기를 듣고 상상하는 청중은 안다. 그들이 진짜 모른다면 이것은 비극적 아이러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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