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의 전쟁터가 되어버린 서울 강남 아파트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은 배움도 소유로 인식하게 되었다. 이들이 출세하게 되면 자신의 의견을 한결같이 고수한다. 삶은 전적으로 소유의 문제라는 의견도 바꾸지 않게 된다. 그 의견을 잃는 것은 가난해짐을 뜻하기 때문이다.
김용석 ㅣ 철학자
1970년 4월8일 새벽 서울시 마포구 창전동 산 1번지에 위치한 와우지구 시민아파트 한동이 붕괴했다. 5층짜리 건물이 폭삭 무너져 내린 것이다. 수십명의 사망자가 나왔다. 아파트 잔해가 그 아래 판잣집을 덮쳐 그곳에서 잠자고 있던 사람 또한 사망했다. 착공 6개월 만에 준공했고, 입주한 지 4개월이 채 되지 않은 건물이었다. 이것이 저 유명한 ‘와우아파트 붕괴 사건’이다. 사람들에게 아파트란 말이 그리 친근하지 않은 때였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 아파트란 말은 우리 일상에 널리 퍼져 있을 뿐만 아니라, 삶 속 깊숙이 들어와 있다. 지난 50년 동안 아파트 건설은 마치 먹물이 번져가듯이 서울에서 시작하여 전국으로 퍼져갔다. 허허벌판 같던 곳에 택지를 조성해서 이른바 신도시라는 이름의 아파트 단지들을 건설했다. 기존의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마을을 조성한 곳들도 재개발의 이름으로 점령당해 아파트 단지가 되었다. 이제 대한민국은 ‘아파트 공화국’이 되었다는 허탈한 비판은 새롭지도 않다.
한때는 비행기를 타고 서울·수도권 상공에 접근하다 보면, 수많은 아파트 단지들이 마치 성냥갑을 수직으로 세워놓은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고 했다. 성냥갑의 이미지에 익숙하지 않은 젊은 세대에게는 층수가 더 높아진 아파트들이 스마트폰을 수직으로 세워놓은 것 같은 인상을 줄지 모르겠다. 어쨌든 한국의 아파트에서 미적 가치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미하엘 엔데의 소설 <모모>에는 시간을 도둑맞은 사람들이 시간에 쫓겨서 구성한 도시의 획일적인 건축물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끔찍스럽게 추하다. 우리나라 아파트의 건설 속도와 그 추함도 이에 못지않다.
아파트란 말은 물론 영어 어파트먼트(apartment)에서 나왔다. 그러나 영어권에서는 ‘어파트’라는 약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또한 어파트먼트로 주거용 집합건물 전체를 가리키지 않는다. 그 건물 안에서 자신이 주거하는 집 한곳을 가리킬 뿐이다.
반면 우리가 일상용어로서 아파트라고 할 때는 집합건물 전체를 가리키거나 아예 아파트 단지 자체를 가리킨다. 은마아파트, 현대아파트, 삼성○○○아파트 같은 명칭이 그것이다. 우리는 몇동 몇호로 자신이 주거하는 공간을 표시한다. 집의 명칭이 숫자화되어 있는 것이다. 지금 아파트란 말은 ‘집’이 원래 지녔던 의미에서 한참 멀리 와 있다. 한편 지난 세월 동안 아파트라는 변형된 줄임말은 그곳 주민들에게 지역, 단지, 건설회사의 이미지가 스며들어 있는 ‘아파트 정체성’ 같은 것을 형성해주었다.
그럼에도 사람 사는 곳에 인정이 없을 수 없고, 우정과 사랑이 없을 수 없으며, 아름다움이 없을 수 없다. 스웨덴의 안무가 마츠 에크는 파리 오페라를 위해 연출한 발레 ‘아파르트망’(Appartement)에서 아파트에 살고 있는 각양각색 인간 군상의 행태를 춤으로 표현했는데, 암울하고 소외된 현상으로만 묘사하지 않았다. 아파트라는 구별된 공간 안에서의 독립적 삶이 있고, 우정과 사랑을 나누는 순간들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분리되어 있으므로 소외의 그늘이 있지만 동시에 소통의 열망과 그 가능성이 있음을, 그리고 신경질적인 갈등이 있지만 또한 유머 가득한 화합이 있다는 것을 묘사했다.
우리의 아파트 생활에서도 그럴 수 있었다. 영어 ‘어파트’(apart)의 의미가 그렇듯이, 아파트(각자의 집이라는 의미에서)는 분리, 별도, 독립의 의미를 가짐과 동시에 바로 그렇기 때문에, 연결, 소통, 관계, 그리고 서로 기댐의 의미 또한 가질 수 있었다. 이런 조건을 일상에서 잘 활용할 수 있었다.
어쩌면 아파트 생활에서 우리가 취약했던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개인주의를 진지하게 실천할 기회를 가질 수도 있었다. 개인주의는 이기주의가 아니다. 개인주의는 말 그대로 각 개인을 존중하는 입장이다. 다시 말해, 자기 자신을 포함해 공동체의 모든 개인을 생각하고 배려하면서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이기주의는 ‘나’를 중시하는 입장이다. ‘나’라는 자기는 하나뿐이므로, 결국 자기만을 생각하며 행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아파트 생활이 우리나라 근대화 과정의 일부라면 그 안에서 개인주의의 긍정적 덕목을 키워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돌아보건대, 오히려 이기주의가 더욱 팽배해졌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결국 아파트 생활은 그 초기부터 공동체 의식, 즉 ‘더불어 삶’과 ‘함께 나눔’이라는 가치를 실천할 수 있는 공간적 조건을 갖춘 주거 형태였지만, 현실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아파트의 확산이 오히려 공동체 의식의 약화를 가져왔다는 것이 지금의 판단이다.
이에는 이유가 있다. 추하고 험한 조건에서도 괜찮은 삶을 이루어갈 수 있었지만, 딱 한가지 이유 때문에 그러지 못했고, 그러지 못하고 있다. 아파트가 ‘사람 사는 집’이 아니라 ‘사고파는 부동산’, 곧 소유와 재산 증식의 수단이 되었기 때문이다. 아파트 건설이 많은 문제를 야기해왔다고 하더라도 만일 사람들이 한 아파트에서 지속적으로 살 수 있었다면, 우리 사회는 지금 전혀 다른 양상을 띠고 있을 것이다. 훨씬 더 인간적인 사회가 되어 있을 것이다.
에리히 프롬의 말을 빌리면, ‘소유냐 존재냐’의 문제에서 아파트에 관한 한 우리는 전적으로 소유를 선택해왔다. 그럼으로써 모든 것이 바뀌었다. 소유의 전쟁터가 되어버린 서울 강남 아파트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은 배움도 소유로 인식하게 되었다. 프롬의 말처럼 “삶을 소유 양식으로 사는 학생들은 단 한가지 목표만 갖고 있다. 즉 ‘학습한 것’을 단단히 기억해두거나 노트에 적어 잘 간직함으로써 그것에 전적으로 매달린다. 이들은 새로운 것을 생산하거나 창조하지 않아도 된다”. 이들이 출세하게 되면 자신의 의견을 한결같이 고수한다. “의견이야말로 자기 소유물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삶은 전적으로 소유의 문제라는 의견도 바꾸지 않게 된다. 그 의견을 잃는 것은 가난해짐을 뜻하기 때문이다.
아파트가 집이 아니라 부동산이 되면서, 실존의 문제는 소유의 문제로 치환되었다. 그것도 나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자들의 독과점 소유 사업이 되어버렸다. 아파트를 갖지 못한 사람들은 결코 평안할 수 없는 ‘궁지의 존재’들이 되었다. 일상용어로 ‘무주택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되었다. ‘존재할 장소가 없는 사람’이라는 뜻의 이 모욕적인 말은 궁지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의 잘못보다 오히려 부동산 시장을 지배하는 자들의 잘못을, 영악하지 못해 혜택받지 못한 사람들의 잘못보다 오히려 너무 똑똑해서 혜택을 탈취한 자들의 잘못을 증명하고 있다. ‘아파트’란 말에는 우연의 일치지만 ‘아픔’이 묻어 있다. 이 말이 품고 있는 비참에서 발견하는 진실은 고통 그 자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