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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이우진의 햇빛] 한장의 일기도를 그리기까지

등록 2020-10-04 17:52수정 2020-10-05 12:30

이우진 ㅣ 이화여대 초빙교수(과학교육)

추분도 지나고 퇴근길에 어둠이 깔리면서 낮이 짧아져 가는 걸 실감한다. 우리 몸은 태양의 궤적에 따라 리듬을 탄다. 햇빛의 그림자로 잰 시간이 생체시계에 가깝다. 하루를 일률적으로 쪼갠 시간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봄이 되어 낮이 길어지면 고단해지고 가을이 되면 반대로 힘이 솟는지도 모르겠다.

일기도에는 ‘유티시’(UTC)라는 협정세계시를 쓴다. 현지시각은 나라마다 다르기 때문에 동시 관측을 하려면 기준 시각이 필요했다. 서울에서 아침에 관측한 자료와 런던에서 밤에 관측한 자료를 일기도에서 함께 본다는 것이 한동안 낯설게 느껴졌다. 하지만 18~19세기 해상무역의 시대에는 이 불편함이 안전 항해의 출발점이었다. 영국 그리니치 천문대의 지붕 위에는 멀리 항구에서도 볼 수 있게 크고 빨간 공이 첨탑기둥 위에 놓여 있었다. 매일 오후 1시가 되면 공이 내려왔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답게 항구는 늘 세계 각지를 오가는 배로 붐볐고, 출항하는 선박은 공을 보고 시곗바늘을 맞추었다. 공에 반사된 햇빛이 요즘으로 치면 “삐삐삐 뚜~” 하는 방송 시보음이나 위성에서 자동차 내비게이션에 송출하는 지피에스(GPS) 신호와 다름없었다. 망망대해에서도 태양의 고도를 측정하면 위도와 현지시각은 알 수 있었다. 다만 배의 경도는 측정하기 까다로운 난제였다. 하지만 그리니치 시각을 알고 있다면, 현지 시각과의 차이만큼 지구가 회전한 거리를 이용하여 경도를 계산할 수 있었다. 세계시가 배의 위치를 알려주는 생명줄이었던 것이다.

시계가 정확하지 않으면 경도 계산에 오차가 커지고 해난 사고로 이어졌다. 바다는 늘 출렁인다. 달과 해의 만유인력과 바람이 빚어낸 조화다. 추가 달린 괘종시계도 바닥이 흔들리고 수심에 따라 중력이 달라지는 곳에서는 제 역할을 하기 어려웠다. 시간을 균등하게 나누는 게 뭐 그리 대수로운가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배 위에서도 제대로 기능하는 휴대용 태엽시계는 18세기 말이 되어서야 상업적으로 유통되었다. 자연은 법칙에 따른다지만, 자연을 딛고 선 배 위에서 규칙적인 기계를 발명하기가 그토록 힘겨웠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한장의 일기도에는 지난 300년간의 협력과 신뢰의 역사가 녹아 있다. 해상시계가 등장한 후 세계시는 시간을 지키는 것이 중요한 철도 교통에서 먼저 채택되었다. 그러다가 유럽 국가에서부터 점차 확대되어 19세기 말이 되어서야 오늘날의 세계시가 본격적으로 쓰이게 된 것이다. 전세계가 한목소리로 기상관측을 하게 된 것은 20세기 중반 유엔 세계기상기구(WMO)가 출범하고부터다. 같은 시각에 같은 방법으로 관측하여 같은 양식으로 교환하자는 제안은 이미 19세기 중반에 대기과학자들의 자발적인 주도로 시작했지만, 이것이 제도권으로 흡수되기까지 100년이 걸린 것이다.

그사이에 세계대전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신뢰의 시간은 더 단축되었을 것이다. 전쟁은 진영의 이기심이 공동체의 이익에 앞선다는 것을 상기시켜준다. 2차대전이 시작되자 교전국은 기상관측자료를 군사기밀로 간주하여 보안에 부쳤다. 심지어는 상대방의 암호를 해독하여 기상 전문을 가로채거나, 비구름의 길목인 그린란드나 노르웨이의 관측자료를 선점하려고 군대를 파견하기도 했다. 이제 우리의 눈길은 날씨를 넘어 환경과 기후변화로 향한다. 대기질 문제나 기후변화에 대한 각국의 이해관계는 상충한다. 대기과학자들은 5차에 걸친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IPCC) 평가보고서를 통해 기후변화에 대한 과학적 증거를 제시하고 우려를 표명해온 지 오래다. 지구 환경과 기후변화의 위기에 모든 나라가 공조하려면 또 얼마나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만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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