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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일회용 언어에 지배당하는 미디어

등록 2020-10-06 18:05수정 2020-10-07 02:38

[한선의 미디어전망대]

무심코 지나쳤던 제목을 다시 보기 시작한 것은 팔순을 넘긴 아버지 때문이었다. 가족 모임 중 조용히 내 손을 끌고 방으로 들어간 아버지는 노트에 큼지막하게 쓰인 단어 몇 개를 가리켰다. 뉴스에 자주 나오는 용어인데 아무리 애써도 이해하기 어렵다며 겸연쩍어했다.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으로 은퇴한 뒤 지금도 꼬박꼬박 신문과 방송을 챙겨보는 분인데 근래 미디어에 나오는 용어는 너무 어렵다고 털어놓았다.

이날 이후 미디어에 외래어, 신조어, 또래집단의 은어, 심지어 비속어가 넘쳐난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했다. 평소 방송 출연자들이 표준어 발음을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것에 문제의식을 갖고 있던 나도 미처 세심하게 감지하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예능과 오락만이 아니었다. 신문과 방송의 뉴스, 보도, 시사교양 부문에서도 생각보다 신조어와 외래어가 많았다.

언제부터였을까? 우리말이 서툰 외국 출신 연예인들이 엉뚱하고 발랄한 방식으로 우리말을 가지고 놀았던 것이 본격적인 신호탄이었을까? 신기하고 우스꽝스러운 방식으로 게임을 진행하는 예능을 본 적이 있다. 우리말 맞히기 게임 중에 단어를 한 글자씩 해체해서 설명하는 형식이었다. ‘한글날’을 예로 들자면 한, 글, 날 세 글자를 따로 떼어내 한 음절씩 설명하는 것이었다. 소리 나는 음가 단위로 한글을 분해해 웃음을 유발하는 상황을 지켜보면서 한글이 표음문자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는지, 표의문자인 중국어도 같은 방식이 통할 것인지 사소한 질문이 끊임없이 떠올랐다. ‘추캉스’처럼 한글과 외래어가 혼합된 말도 어이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연구에 따르면 미디어 언어는 오래전부터 탈규범화, 비속화, 차별화 경향을 보여 왔다. 일상의 언어가 거칠어지고 미디어 간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나타나는 자극적인 현상인데, 탈규범화는 표준어를 사용하지 않는 경향을 뜻한다. 비속화는 비속어, 유행어, 은어를 쓰는 현상을, 차별화는 알아듣지 못하는 말이나 어려운 말, 또는 외국어를 쓰는 경향을 의미한다. 차별화는 얼핏 개성을 강조하는 긍정적 의미로 오해될 수 있지만 실상은 젠체하는 권위적인 언어 사용을 가리키는 것이다.

물론 언어란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탄생과 소멸의 과정을 거치는 사회적 구성물이다. 외국어가 섞이고 신조어가 탄생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언어의 변화 과정일 뿐 굴러가는 언어를 막을 수도, 막아서도 안 된다는 주장을 들은 적이 있다. ‘웃프다’처럼 복잡 미묘한 감정을 딱 떨어지게 표현해주는 신조어도 없지 않다. 살아 움직이는 말글의 생명력을 규제와 순화로 막아설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디어의 언어와 일상의 언어는 다르다. 미디어의 언어, 특히 보도용어는 쉽고 간결하고 명확해야 한다. 최근 한 신문사가 문화체육관광부와 국립국어원이 함께 운영하는 ‘쉬운 우리말을 쓰자’ 누리집에서 발췌한 내용을 토대로 설문 조사한 결과 응답자들은 미디어에서 사용하는 제시어 10개 가운데 7개를 애매하거나 어렵다고 말했다. 미디어가 얼마나 외국어나 신조어를 고민 없이 쓰는지, 그로 인해 중요한 이슈에 대한 국민의 이해도를 떨어뜨리는지 보여주는 좋은 조사 결과였다.

그래서 우리의 말글살이가 유기체처럼 변화무쌍하다 할지라도 미디어의 언어는 바르고 품격 있는 말을 지키는 균형추 구실을 담당해야 한다. 지금의 미디어 언어는 일회용 언어에 너무 많이 지배당하고 있다.

한선 ㅣ 호남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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