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정 앵커. 11월10일 뉴스9 방송화면 갈무리.
박민 한국방송(KBS) 사장이 지난 12일 임명되었다. 그리고 13일 한국방송의 부장급 이상 간부 대부분을 교체하는 전격적인 인사발령이 있었으며, 9시 뉴스 이소정 앵커와 주진우 등 주요 출연자들의 하차 소식이 전해졌다. 인기 시사프로그램 ‘더 라이브’의 갑작스러운 결방 소식과 함께 폐지 수순을 밟을 것이란 소식도 숨 가쁘게 이어졌다. 이 모든 게 대통령실에서 박민 사장의 임명을 재가한 지 채 24시간이 지나기도 전에 진행된 것들이다.
유시민 작가는 일찌감치 현 정부를 ‘도자기 박물관에 들어온 코끼리’에 비유한 적이 있다. 독일에서 유래한 표현이라고 하던데, 듣는 순간 그야말로 손뼉을 칠 만큼 잘 들어맞는 비유라고 감탄했다. 경제, 외교, 노동에서부터 교육과 의료까지 가는 곳마다 섬세함이란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이 온통 우격다짐이더니, 이제는 방송으로 넘어와서 스튜디오와 카메라를 때려 부수는 모양새이다. 한국방송의 이런 모습을 누군가는 5년마다 돌아오는 환국이라고도 하지만, 방송은 그럼에도 기본적으로 시청자와의 약속이다. 내부에서 무슨 싸움이 나서 서로 치고 박든, 적어도 방송으로서 시청자에 대한 존중과 두려움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과연 이런 식으로 예고도 없이 방송 편성을 변경하고 주요 진행자를 한꺼번에 날려버릴 수는 없는 일이다.
한식에 죽으나 청명에 죽으나 마찬가지라고 하지만, 시청자들에게 어떤 양해나 인사도 없이 그동안 즐겨 보던 프로그램을 없애버리거나 진행자들을 하루아침에 쫓아내는 건 기본적인 상식과 예의에 맞지 않는 일이다. 방송법으로 규정되어 있는 방송 편성 독립성의 위반에 대한 법 절차적 문제도 살펴봐야겠지만, 기본적으로 이런 결정을 내린 사람들이 과연 방송에 대해 어떤 수준의 철학과 상식을 갖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짐작하건대, 아무리 방송에 무지한 새로운 사장이라고 하더라도, 방송이 시청자와의 약속이라는 것을 몰라서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영어식으로 ‘방 안의 코끼리’라는 관용적 표현이 있다. 방 안에 있는 거대한 존재인 코끼리를 애써 모른 척하고 있는 상황을 말하는 것인데, 한국방송의 새로운 경영진이 시청자와의 약속을 ‘방 안의 코끼리’처럼 모른 척하고 ‘좋아 빠르게’(대선 당시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의 구호) 가고 있는 것은 그들이 시청자보다 더 중요한 어딘가를 쳐다보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지난 9월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서는 가짜뉴스 심의전담센터라는 부서를 서둘러 만든 적이 있다. 가짜뉴스를 원스톱으로 신속히 처리하겠다고 만든 조직인데 애초에 법률적 근거도 불명확하고 제대로 된 절차적 요건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서둘러 만들더니만, 며칠 전에는 그곳에 파견된 직원들이 고충처리위원회에 원래 부서로 복귀를 요청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방심위 같은 조직에서 쉽지 않았을 것인데도 이들이 왜 복귀를 요청했는지는 어렴풋이나마 짐작해볼 수 있을 것 같다. ‘가짜뉴스’라는 개념이 기본적인 정의조차 되어 있지 않은데, 직원들에게 가짜뉴스를 모니터링하고 신속하게 심의 결정하라는 지시는 ‘코끼리를 냉장고에 알아서 잘 집어넣으라’는 말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직원들 입장에선 무조건 코끼리를 냉장고에 집어넣으라고 지시를 하니 무슨 재간으로 그 자리에서 버틸 수 있겠는가.
가끔은 지금 우리 사회를 후세에서는 어떻게 기억할지 상상해보게 된다. 만약 후세에 지금 시대를 드라마로 만든다면 그건 진지한 대하사극이 아니라 소품의 코미디로 만들어지지 않을까 싶다. 하긴, ‘도자기 박물관에 들어온 코끼리’라는 표현의 유래가 된 원작 영화(‘도자기 상점 속 코끼리’ ·Der Elefant im Porzellanladen)에 대한 설명을 찾아보니 “부끄러울 정도로 멍청한 코미디”라고 한다.
홍원식 | 동덕여대 ARETE 교양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