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욱 ㅣ 닛부타의숲 정신분석클리닉 대표
코로나의 성동격서인가? 코비드19의 창궐은 짐작하지 못한 곳에서 비극을 만들어내고 있다. 코로나로 인해 격리 상태를 감수해야 했던 시기에 특히 여성의 자살률이 현저히 늘어나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지금 상태로 간다면 올해 안으로 여성 단독 성별 자살자 증가 숫자만으로도 코로나 사망자를 넘어설 수도 있겠다. 헛갈릴 수 있는 설명이니 수치를 말하자. 작년 3월과 4월의 여성 자살자는 각각 295명, 285명이었다. 그런데 올해 3월과 4월은 346명, 336명이니 두 달 모두 50여명씩 늘었다. 그러다 다시 6월에 40명 정도 증가하는데, 남성 자살자 수는 1월부터 계속 꾸준하게 감소하고 있다.
중앙자살예방센터가 아직 올해의 7월 이후 통계 수치를 발표하지 않아서 더 지켜봐야겠지만, 코로나의 확산 추이에 따라 여성의 자살 증감이 연동되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게 된다. 코로나를 제외한 다른 특별한 사회적 주제가 없는 상황에서 특정 집단의 자살 증가율이 전년 대비 17%를 넘는다는 것은 주목해야 할 일이다.
한국은 2000년대 초반부터 자살률 1위라는 오명을 계속 유지하고 있다.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같은 동유럽 나라들 덕분에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자살률 1위의 오명을 잠시 넘겨줄 수 있었으나, 그들은 계속 자살자 수를 줄여 나갔고 어느새 한국을 다시 자살률 1위 국가로 만들었다. 이 나라에서는 매년 적어도 1만4천명이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지난 9개월간 모두가 사력을 다해 코로나에 대항한 결과, 사망자를 400명대로 막았다. 그런데 자살로 열흘에 400명을 떠나보내는 셈이다.
모두들 짐작하다시피 자살자의 유가족들은 어디에서도 쉽게 망자의 죽음에 대해 말하지 못한다. 오히려 사인을 숨긴다. 그래서 이 문제는 은폐되기 십상이다. 국가 입장에서는 감사한 일인지도 모른다. 이 골치 아픈 문제를 거리에 들고나와 떠들지 않으니, 그냥 이대로 조용히 넘어갈 수 있으니 말이다.
다시 여성의 자살 문제에 집중해 보자. 세상의 모든 험한 곳, 그 밑자리에는 여성이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 밑에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가, 장애인 밑에 여성 장애인이, 성소수자 밑에 여성 성소수자가 있다. 존 레넌은 “여성은 세상의 깜둥이다”라고 했다. 그 ‘깜둥이’ 밑에도 여성이 있다. 일상은 비대면의 정상화로 모두 격리되고, 일자리와 미래, 인간관계는 모두 흔들리는 불편함으로 잠자리를 깨운다. 전염병이 창궐하는 이 세상, 그곳의 가장 밑자리에 있는 여성들이 자신의 취약함을 죽음으로 드러내고 있다.
키르케고르는 절망을 죽음에 이르는 질병이라 명했다. 절망은 필연적으로 외로움과 소외라는 요건을 포함한다. 우리가 분명 기억해야 할 것은, 외로움으로 인한 상처는 말 걸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내가 누구에게도 말 걸어지는 대상이 아니라는 데서 발생한다. 이 사실을 인식하고 인정하는 것이 절망으로부터 벗어나는 출발점이다.
하지만 개인의 노력만으로 해결될 수 없는 이 인류의 재난 앞에서, 국가와 어른들이 해야 할 임무가 하나 있다. 이 위기의 순간에 힘들고 두려운 이들을 모두 지키고 보살피는 보호의 임무다. 재난의 순간에도 보호자는 필요하다. 그리고 보호받아야 하는 이들은 선별되어서는 안 된다. 내가 보호받을 수 있는지 없는지를 전전긍긍하게 만들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국가는 사회보장제도를 더 조밀하고 세심하고 튼튼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자살로 삶을 마감하는 이들이 국가에 남기는 유언이다. 코로나바이러스만큼이나 코로나 블루, 코로나 자살에도 국가가 더 많은 관심과 예방 대책을 세워달라.
그리고, 이 고난을 헤쳐 나가는 데 필요한 말 한마디가 무엇인지 적지 않은 젊은이들에게 물어보았다. 그들의 바람을 모아 보니 이 세 마디였다. “괜찮아, 내가 도와줄게, 같이 해 보자!” 힘겨워하는 모두가, 모두에게 이 말을 전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