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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이우진의 햇빛] 숫자로 날씨를 전하다

등록 2020-11-29 13:10수정 2020-11-30 02:38

이우진 ㅣ 이화여대 초빙교수(과학교육)

편지를 보내려면 봉투에 우편번호를 적는다. 다섯 자로 된 숫자는 특정 동네를 가리키는 코드다. 코드표를 대조하면 주소지를 찾을 수 있다. 전 세계 통신망을 통해 수집한 기상 관측전문은 다섯 자씩 묶인 숫자로 끝없이 이어진 난수표 같다. 영화 <뷰티풀 마인드>에서도 존 내시는 한때 가상의 첩보원에게 쫓긴 듯 벽면에 문 숫자 더미를 가득 붙여놓고 암호 해독에 골몰하지만 미궁에 빠진다. 코드값을 모르면 어디서 관측한 것인지, 기온이나 강수량이 얼마인지 알 길이 없다.

관측전문 코드집을 받아 보면 처음에는 숨이 턱 막힌다. 웬만한 백과사전만 한 두께에 코드 문법과 용어 설명으로 빽빽이 차 있어 외울 엄두가 안 난다. 지금은 컴퓨터가 알아서 코드를 번역하지만, 1980년대 초만 하더라도 코드집을 머리에 꿰차고 있어야 일기예보 업무가 제대로 돌아갔다. 그 시절 기상청 건물 지하에는 텔레타이프 소음으로 진동하는 통신실이 있었다. 도쿄나 베이징을 거쳐 흘러온 관측전문은 둘둘 말린 누런 용지에 투박한 타자체로 찍혀 나왔다. 코드로 채워진 숫자 다발을 한 묶음 펼쳐 놓고, 숙련된 사람이라면 담배 두세 개비 물 시간에 동아시아 일기도를 후딱 그려냈다.

코드를 쓰면 통신량을 줄여 빠르게 소식을 전할 수 있어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다양한 코드 통신 방식을 이용했다. 전기 텔레타이프가 등장하기 전에는 빛을 이용하여 코드를 교신했다. 봉수대에서 연기를 피우거나 육중한 막대기를 기울여 모양을 만들면, 다른 탑에서 신호를 보고 다시 다른 탑으로 신호를 전했다. 미군은 다른 나라보다 이른 1860년에 정보통신대의 원조 격인 신호관(signal officer) 직책을 신설했다. 당시 전기 신호는 활용 범위가 제한적이라서, 수기 신호를 함께 썼다. 게티즈버그에서 남군과 북군이 치열하게 싸울 때, 통신 대원들은 높은 나무나 지형지물로 은폐된 곳에서 낮에는 깃발을 들고 밤에는 횃불 봉을 좌우로 흔들어 신호를 보냈다. 멀리서 망원경으로 보고 평문으로 독해하여 작전에 이용했다. 십리 떨어진 곳까지 1분에 단어 6개는 족히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안개가 끼거나 하면 통신이 어려웠고, 평범한 신호는 적군에 노출되어 역으로 이용당할 위험도 따랐다.

2차대전 때 유보트 잠수함은 대서양을 오가는 상선을 어뢰로 공격해 영국으로 향한 보급로에 치명타를 가했다. 독일군은 비밀리에 잠수함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에니그마라는 기계로 암호화한 코드로 교신했다. 에니그마는 문자열을 불규칙하게 배열하여 코드의 숨은 뜻을 알 수 없게 만든다. 문자가 기계를 통과하면 다른 문자가 되어 나왔다. 문자마다 다른 방식으로 변형되다 보니, 영국 정보국은 매번 막다른 골목에 부딪히는 미로 속을 헤맸다. 게다가 매일 암호 규칙이 바뀌는 통에 암호를 푸는 데 골머리를 앓았다. 그런데 기계와 달리 사람의 습성과 일하는 방식은 쉽게 바꾸지 못했던 모양이다. 유보트는 매일 같은 순서로 기압, 바람, 파고와 같은 기상 관측 자료를 7개의 알파벳으로 조합한 코드로 교신했는데, 이것이 암호 패턴을 찾는 데 실마리가 되었다.

일기도에서 찬 공기와 따뜻한 공기의 판세를 살피는 예보관도 에니그마 암호와 씨름하는 정보 요원과 처지가 다르지 않다. 어제 일기도에 드러난 자연의 코드를 알아냈다 싶으면, 오늘 일기도에서 자연은 암호 규칙을 바꿔 새로운 코드를 들이민다. 요즘 기술로 아무리 복잡하게 설정한 휴대폰 비밀번호라도 빠른 컴퓨터로 몇달간 계산하면 풀리고 만다. 하지만 지난 수백년간 기상 자료를 축적하고 매일 예보를 반복하며 학습해도 여전히 일기예보는 어렵다. 날씨야말로 슈퍼컴퓨터로도 모방하기 힘든 완전한 암호 체계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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