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락
산업팀장
지난해 이맘때 재계·산업 담당 팀장을 맡았다. 2013년 3월쯤 금융과 경제 정책 분야로 취재 영역을 옮긴 지 꼭 7년여 만이다. 경제는 기업과 금융, 경제 정책이 한데 어울려 돌아가는 것인 터라, 재계의 움직임에 고개를 돌리고 있지는 않았으나 곁눈질 수준에 머물렀다. 다시 맡게 된 후 그간 뜸했던 재계 인사들도 하나둘 만나보고 굵직한 사건들도 다시 대강 살펴보는 시간을 보냈다.
변화가 컸다. ‘따라갈 수 있을까’란 두려움 속에 밤잠도 설쳤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활로를 영영 못 찾을 것 같았던 국내 기업들이 어느새 새로운 먹거리를 들고 세계시장에 도전하고 있었다.
전기차 배터리나 바이오 영역에서 그런 움직임이 두드러졌다. 201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도저히 세계 중심을 파고들지 못할 것 같았던 비메모리 반도체 영역도 이제 가능성이 엿보인다. 반세기 뒤일 걸로 내다봤던 내연기관 자동차 종말 시점도 성큼 코앞으로 다가왔다. 네이버·카카오·배달의민족(우아한형제들)과 같은 신흥 기업의 성취와 영향력 확대도 인상적이었다. 변화에 적응 못해 힘이 빠질 것이라고 봤던 공룡들은 여전히 펄떡펄떡 뛰고 있었다.
지난달 팀원들과 ‘공정경제 3법’
기획 시리즈를 준비하면서 또 한번 기업 현장의 변화를 느꼈다. 재계 2위 현대차그룹의 주요 계열사 이사진에 외국인이 다수 포진해 있었다. 뿐만 아니라 경쟁사에서 잔뼈가 굵은 시(C)레벨 임원(최고 레벨 임원)도 여럿이었다. 총수의 카리스마적 리더십과 순혈주의 전통이 강했던 10년 전 현대차그룹에선 상상하지 못할 장면이다. 삼성과 엘지, 에스케이 등 여타 그룹에서도 이와 유사한 모습이 관찰됐다. 총수가 이에스지(ESG, 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을 강조하는 곳도 있었다. 이에스지 경영은 2000년대 초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를 비롯한 진보 진영과 자본시장 한 귀퉁이에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이래 20년 가까이 주류 무대에 오르지 못했던 주제였다.
이런 변화가 정부 로비와 관치 금융, 여론 장악에만 기대어 성장하는 ‘우물 안 개구리’에 머물러선 미래를 장담할 수 없다는 위기 의식 덕택인지, 그룹 리더십이 한 세대 아래로 내려오면서 나타난 경영 행태의 변화인지, 시장과 시민사회의 압력이 높아져서인지는 알기 힘드나 ‘긍정적 변화’라는 것만큼은 부인하기 어렵다. 7년 전 쓴 기사를 재탕했다간 ‘학습 부진 기자’ ‘화석이 돼버린 <한겨레>’라는 혹평이 쏟아질 듯싶었다.
물론 구태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그룹 지배력 승계를 위해 자본시장을 농락한 대규모 회계사기(삼성)나 총수 일가 부를 늘리기 위한 계열사에 빨대 꽂기(롯데·한화·에스피씨), 자사주 매입과 상장 폐지를 통한 소수 주주 쫓아내기(한국타이어), 성평등 인사가 기업 가치의 가늠자인 시대에 부계 혈연 중심의 그룹 경영권 이어받기(엘지·지에스)가 그 예이다. 외려 그 방식이 예전보다 교묘해지고 음습해져서 ‘구태의 진화’라고 할 수도 있겠다. 기업 현장은 희망의 싹과 봉건적 잔재가 뒤엉켜 있다.
공정경제 3법 처리 여부가 ‘12월 임시국회’로 넘어갈 공산이 높다. 정국을 휩쓴 ‘추-윤 갈등’ 탓도 있지만 법안의 복잡함과 재계의 반대, 여야 내부의 온도 차 있는 의견이 맞물리면서 관련 국회 상임위원회(정무위·법제사법위)는 진도를 충분히 빼지 못했다.
일부에선 재벌 개혁이 진보 성향 정권에서도 좌초하는 것 아닌가 우려하지만 내 생각은 좀 다르다. 내용이 다소 깎이더라도 변화의 발판은 될 수 있는 수준에서 입법이 될 것이라고 낙관한다. 지난 7년간 한 단계 성장을 위해 몸부림친 재벌 그룹도 입에는 쓰지만 몸에는 좋은 약이라고 여길 거라고 믿어서다. 공정경제 3법은 ‘모든 주주를 위한 이사회 중심 경영’을 뿌리내리기 위한 장치 아닌가. 이재용·정의선·최태원·구광모 회장도 가야 하는, 아니 가고 싶은 길이다. 시계는 거꾸로 돌지 않는다.
sp96@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