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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장석준의 그래도 진보정치] 안 하느니만 못한 개혁은 안 하는 게 낫다

등록 2020-12-31 15:56수정 2021-01-01 02:38

장석준 l 전환사회연구소 기획위원

혁명의 시대는 오래전에 끝났다고 한다. 이제 방법은 개혁뿐이며, 이는 항상 타협을 전제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반박하기 힘든 진실이다. 그래서 한국의 진보좌파 역시 타협하고 또 타협해왔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개혁의 성과를 남길 수 있다며, 이를 숙명으로 여겼다. 그 결과가 지금의 현실이다. 이제 우리는 이 익숙한 관성을 근본적으로 재고해야 할 때에 이르렀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 그 시험대다. 산업재해 유족들의 목숨을 건 단식과 여론에 못 이겨 여당이 임시국회에서 이 안건을 심의하고는 있다. 그러나 정의당 강은미 의원이 낸 법안에서 대폭 후퇴한 더불어민주당 박주민 의원의 법안 등이 제출되며 논의 수준은 오히려 더 퇴행하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지난 28일에는 정부 단일안이 제출됐는데, 여당 의원들이 낸 법안보다도 더 형편없는 내용이다. 정부안에 비하면 여당안들은 아주 근사해 보일 정도인데, 아마 이것이 정부안이 제출된 핵심 이유일 것이다.

쟁점이 많지만, 여기에서는 하나만 짚겠다. 박주민 의원안은 50인 미만 사업장에 대해서는 법 집행을 4년간 유예한다는 부칙을 달고 있다. 얼핏 보면 그럴싸하지만, 이미 많은 이들이 지적한 대로 우리나라 산업재해의 대부분은 바로 이 50인 미만 사업장에서 일어나고 있다. 부칙 하나가 법률 자체의 실효성을 무너뜨리는 기상천외한 법안인 것이다. 그런데 정부안은 한술 더 떠 50~100인 사업장에 대해서도 2년 유예하자고 한다. 이쯤 되면 산업재해를 막으려는 것인지, 산업재해 논의를 입막음하려는 것인지, 법안의 의도 자체가 궁금해진다.

한데 이런 기이한 단계론은 산업재해 문제를 넘어 한국의 노동체제 전반과 직결된다. 한국 사회는 노동시장 이중구조가 유독 심하며 이게 불평등의 중대한 원인 중 하나라는 것은 이제 사회과학계만이 아니라 다수 대중이 동의하는 명제다. 한마디로 대기업, 정규직과 중소기업, 비정규직 사이의 격차가 너무 크다는 것이다.

그럼 이런 이중구조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실은 ‘개혁’들의 결과다. 정부·여당의 중대재해기업처벌법안 같은 제도들이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쌓이고 쌓인 결과다. 정부·여당안이 통과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산업재해 종식을 위해 아쉽지만 중대한 한 발자국을 내디뎠다는 낯익은 보도들 뒤에서, 대기업이 안전 감독 책임을 더욱 확실히 하청기업에 떠넘길 것이다. 이제는 소득과 고용안정뿐만 아니라 사람 목숨을 놓고도 이중구조가 법률의 인가까지 받으며 더욱 확고히 자리잡을 것이다. 4년만 기다리면 된다고? 4년은 새로운 구조가 뿌리내리기에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그동안 노동시장 이중구조와 관련해 대기업, 정규직 노동조합 책임이 크다는 비판이 분분했다. 맞다. 책임이 크다. 한데 노동 세력의 가장 큰 잘못은 정부·여당의 중대재해기업처벌법안 같은 시도를 그래도 ‘개혁’의 성과라며, 어쩔 수 없는 타협이라며 받아들인 데 있을 것이다. 정부·여당은 지금도 노동자들에게 이 숙명을 반복하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다며 다그치고 있다.

이제는 이 운명을 끊어내야 한다. 안 하느니만 못한 개혁은 안 하는 게 낫다. 진보정당은 이미 선거법 ‘개혁’을 통해 이를 처절하게 학습했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놓고도 똑같은 일을 반복할 수는 없다. 애초에 산업재해 유족들이 요구한 내용에서 결정적으로 후퇴한 입법안은 단호히 반대해야 한다. 벼랑 쪽으로 너무 멀찍이 밀려버린 ‘타협’의 기준선을 이제 원점에서 재검토해야 한다.

그럼 뭐가 남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개혁조차 이루지 못하는 진보정당을 조롱하는 목소리도 들릴 것이다. 그러나 정작 사망을 선고받아야 할 것은 이 정도 개혁조차 현실로 만들 수 없는 이 ‘민주공화국’ 질서다. 제대로 된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이 사실상 실패하는 그 순간에 시작되어야 할 것은 제6공화국을 하루라도 더 빨리 끝내는 운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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