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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숨&결] 의사고시 재응시가 허락된 이유 / 양창모

등록 2021-01-13 13:25수정 2021-01-14 13:50

양창모|강원도의 왕진의사

할머니는 새벽 버스를 타고 차를 두 번 갈아타며 시내에 있는 병원으로 나간다. 의사 얼굴 보는 데 두 시간이 넘게 걸리는 기나긴 여정이다. 그렇게 타 온 두 달 약값은 20만원이 넘어간다. 생활비의 대부분을 충당하는 연금에 거의 근접하는 금액이다. 근처 보건지소에 가시면 약값이 무료라서 좋을 텐데 왜 시내까지 다녀오는 걸까. 의사가 미덥지 않다고 한다. 밥그릇에 들러붙은 밥알 한 알도 아까워서 물로 헹궈 드시는 어르신들이기에 보건지소에서 당뇨·혈압약만이라도 처방해주면 약값이 많이 줄어들 수 있는 상황이라 너무 아쉽다.

“자다 일어났나 봐요. 머리가 산발이던데. 빗질이라도 해주고 싶더라고요.” 나와 함께 할머니 집 인근의 보건지소를 방문한 일행이 한 얘기다. 평일 오전 11시30분. 보건지소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현관에 안내문도 없었으니 휴진은 아니었다. 점심시간이 아직 30분이나 남았는데 이상해서 전화를 해봤다. 누군가 전화를 받았다. 공중보건 한의사였다. 내 전화를 받고서야 안에서 문을 열어주었다. 함께 일하는 양방 의사도 연락을 받고 내려왔다. 자다 일어난 얼굴이었다. 왜 진료시간에 병원 문을 잠가놨는지 묻지 못했다. 어쨌든 두 사람의 협진이 있어야 우리가 방문하는 어르신들의 진료가 개선될 것이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할머니가 왔더라면 문을 닫은 줄 알고 그냥 돌아갔을 거라는 거다. 그날은 영하 15도가 넘어갔다.

20년 전 충남의 시골 마을에서 공중보건의로 근무할 때 나도 저런 모습이었다. 퇴근 시간이 되면 마치 총신에서 튀어나가는 총알처럼 진료실에서 튀어나갔다. 무엇 때문에 달라진 것일까. 아마도 만남 때문일 것이다. 환자들의 집을 찾아간다는 것. 만약 지금 내가 이곳에서 어르신들의 편에서 뭔가 하고 있다면 그건 내가 특별한 윤리의식을 가지고 있어서가 아니다. 그때의 나에게 없었으나 지금의 나에게 있는 것은 ‘접촉’이었다. 처음 보는 사람인데도 손이 너무 차갑다며 손을 쓰다듬고 아랫목을 권하는 할머니에게 무심할 수 있는 의사는 없다. 그 만남은 결국 모든 것을 바꾸어놓았다.

최근 정부가 의사고시 재응시를 허락한 것 때문에 논란이 많다. 재응시가 거부됐던 상황에서도 끝까지 거부되리라고 생각한 의대생은 아마도 없었을 것이다. 대학병원에 인턴 수급이 되지 않았을 때 어떤 파국적 상황이 벌어지는지 누구보다도 의대생들이 잘 알고 있다. 의대생들이 승리를 자신했던 것은 그들 스스로, 의료가 공공재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그렇다. 의사들의 힘은 의료의 공공성에서 온다. 아무나 의사가 될 수 없어서 의사가 힘이 있는 게 아니다. 모두가 의사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의사들에게 힘이 생기는 것이다. 정부가 의사들에게 군 입대를 공중보건의로 대체할 수 있게 허용한 것도, 의대생들이 의사고시를 다시 볼 수 있는 것도 공공의료에서 일할 단 한 명의 의사가 아쉽기 때문이다. 지난 3년간 소위 3대 대형병원들은 총수익이 수십조원에 달하면서도 법인세를 한 푼도 내지 않았다고 한다. 의료가 공익적 성격을 갖지 않는 사적 이익 추구의 영역이었다면 정부가 그걸 용인할 이유는 없다. (그런데도 대형병원들은 코로나 음압 병상을 제공하는 데에는 자신들의 역할이 아니라며 미적거리고 있다.) 의료의 공공성이란 국립의료원이나 보건소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어디에 있는 의사든, 어떤 병원이든 그들이 하는 모든 행위에는 의료의 공공성이 스며들어 있다. 의사와 대형병원들이 보는 혜택은 모두 그 공공성이라는 책임 위에 허락된 것이다. 의사 파업 당시 의사들은, 국민들이 자신들의 진정성을 몰라준다는 말을 많이 했다. 의사들이 받고 있는 무관심은 의사들이 갖고 있는 무관심과 결코 다르지 않다. 권리는 행사하면서도 책임에는 무관심하다면 그 상황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의사들이 그 책임 위에서 잠들어 있던 그날, 할머니는 새벽 버스를 타고 약을 타기 위해 시내로 엉금엉금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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