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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동창의 재발견, 읽기의 재발견

등록 2021-02-09 16:36수정 2021-02-10 02:37

[최선영의 미디어전망대]

요즘 고교 동창들과 정례적인 온라인 화상 모임을 하고 있다. 무려 일주일에 세번씩이나. 연말에 처음으로 온라인 동창회란 걸 시도했으나 시끌벅적하게 수다를 떨던 우리에겐 너무 낯선 형식이었다. 여럿이 동시에 말하면 왕왕거려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한 친구의 말이 끝나야 비로소 다른 친구의 소리가 들렸다. 마침 한 친구가 온라인 낭독모임을 한다는 근황을 전했다. 우리도 당장 해보자며 즉흥적으로 의기투합했다. 직접 만남은 포기하는 대신, 자주 만날 명분을 만든 것이다. 흐지부지될까 걱정도 했다. 우리는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지목해야 가까스로 발표하던 수줍은 학생이 아니었던가. 혼자 읽기 버거웠거나 함께 읽고 싶은 책을 각자 추천했고, 몇가지 규칙을 정했다. 미리 읽을 필요는 없다, 읽는 중간에 토론은 없다, 화상회의 플랫폼 ‘줌’(zoom)에서 한시간 동안 공평하게 2쪽씩 순서대로 읽는다 등등.

낭독모임 두달째, 놀랍게도 우리는 빠지는 날 없이 열정적으로 모이고 있다. 처음엔 정색하고 읽는 게 어색했으나 점점 읽기에 몰입하며 새로운 경험을 하는 중이다. 왜 집중이 쉬웠을까. 잘 차려입고 나갈 필요가 없었다. 부스스한 머리로 대충 입고 앉아서, 안부는 짧게 묻고 단도직입적으로 책을 읽어나간다. 읽기 분량이 정해져 발언권도 평등하다. 동창회는 돈, 자식 자랑의 무대가 되기 십상인데, 이 실험적 모임에서 그런 담화는 일단 뒤로 밀린다. 새침한 줄만 알았던 친구가 얼마나 성실하고 진지한지, 내성적인 줄만 알았던 친구가 얼마나 사려 깊은 사람인지 알게 된다. 한 친구는 자기만의 목소리로 오롯이 자기만의 시간에 집중하는 게 뿌듯하다고까지 했다.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몰랐을, 친구를 재발견하는 시간이며 디지털 기술을 매개로 한 새로운 관계 맺기다.

인쇄물의 형태로 지식과 정보가 대량생산되기 전, 독서는 소수가 전유하는 행위였다. 종교적·정치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던 누군가의 목소리를 통해 일방적으로 전달되는 형식이었다. 구텐베르크가 15세기 금속활자를 발명한 이래 인류의 지식과 정보는 수없이 ‘복제’되면서 확산했고, 우리의 사고 체계와 생활에 큰 영향을 줬다. 순서대로 읽어야 하는 선형적인 문장 규칙이라든가 쉼표, 마침표, 느낌표 등과 같은 구두법의 적용으로 소리 내어 읽는 음독은 세련되게 발전했다. 그리고 버지니아 울프 주장대로 자기만의 방이 생겨나면서 마음속으로 읽는 묵독이 표준적인 책 읽기로 자리 잡게 됐다. 그리고 돌고 돌아 소리로 읽고 듣는 독서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과거와 다른 점은 그 형식이 매우 세분화·개인화하고 있는 점일 것이다.

전자책 중심의 독서 플랫폼 분야에서 최근 오디오북 수요가 많아지는 추세인데, 다양한 형식의 콘텐츠가 속속 나오고 있다. 유명인이나 전문 성우, 저자가 직접 읽어주는 오디오북은 예사이고 인공지능이 읽어주는 서비스도 흔하다. 최근에는 개인이 낭독한 책으로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서비스도 생겨났다. 저작권에 문제가 없는 책에 한해 개인이 낭독한 책 콘텐츠를 누군가 3분 이상 들었다면 100원을 적립해주는 ‘밀리의 서재’의 ‘내가 만든 오디오북’이 그것이다.

‘나’의 경험과 목소리가 개입된, 지식 정보 형식은 앞으로 어떻게 진화해갈까. 누구도 쉽게 만날 수 없는 현재, 사람과 세상과의 관계 맺기에 긍정적인 변화를 주는 쉬운 소통 방식이 많아지길 기대한다.

최선영 ㅣ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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