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워싱턴의 백악관에서 로페즈 오브라도르 멕시코 대통령과 화상 회의를 하는 모습을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이 지켜보고 있다. 워싱턴/AP 연합뉴스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수석연구위원 지난 3일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가 발표한 국가안보전략 잠정지침과, 같은 날 토니 블링컨 국무부 장관이 제시한 8대 외교과제는 복잡한 생각을 자아낸다. 민주주의 재건, 동맹의 복원, 외교로의 복귀, 국제협력 증진 등 온갖 미사여구로 치장되어 있지만 냉철한 현실 인식과 실행 가능한 전략 지도가 결여됐다는 인상을 준다. 무엇보다 미국이 하고 싶은 것과 할 수 있는 것을 혼동하고 있는 것 같다. 미국의 힘의 원천인 민주주의적 가치와 제도를 국내에서부터 재건하겠다는 구상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고 미국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다양한 초국가적 위협, 중국과 러시아가 제기하는 도전, 이란이나 북한 문제 등을 어떻게 해결하겠다는 것인지는 불확실하다. 아무리 자세히 들여다봐도 바이든 행정부가 제시한 솔루션은 단 하나뿐이다. 트럼프가 파괴한 ‘동맹이라는 자산’을 활용하여 대응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오스트레일리아, 일본, 한국 등 바이든 행정부가 거명한 핵심 동맹국들의 이해관계와 처지가 미국과 일치할 수는 없다. 당장, 바이든 행정부가 출범한 2021년 벽두부터 유럽연합(EU)은 중국과 7년이나 끌어온 투자협정을 타결해 미국의 신경을 건드린 바 있다. 결국, 동맹국들의 협조 없이는 바이든 행정부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셈이다. 민주주의와 인권 등 가치외교를 전면에 내건 점도 우려를 자아낸다. 미국의 힘이 압도적으로 강할 때는 국제사회에 공공재를 제공하면서 가치외교가 포용적 성격을 띠기도 한다. 하지만 지금처럼 미국의 리더십이 약화된 시기에는 과도한 자기 확신과 명확한 선악 구분이 오만한 태도로 귀결되기 십상이다. 지금은 미국이 공세적으로 가치외교를 내세우기보다 오히려 현실주의적 인식과 실용주의적 접근이 필요한 시기이다. 최근 한국의 대북전단금지법 채택에 대해 미국 조야 일각에서 보여준 오만한 태도가 한반도 비핵화나 다른 동아시아 현안에서 반복된다면 전략적 경쟁국들과는 물론 동맹 사이에도 파열음을 낼 가능성이 크다. 한편, 바이든 행정부의 국가안보전략 지침에서 인상적인 점 중의 하나는 대외정책과 국내정책의 전통적 구분을 버리고 국가안보전략을 국내정책과 연계한 점이다. 선거 기간 슬로건이었던 ‘중산층을 위한 외교정책’의 연장선상에서 대외정책의 목표가 일부 특권층이 아니라 중산층과 노동자 등 모든 미국인들의 삶의 증진이라는 점을 재확인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트럼피즘의 유산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안보전략을 공동체 구성원들의 삶과 연계시키려는 시도는 포퓰리즘으로 매도될 수 없으며 건강한 것이다. 우리도 외교를 일부 엘리트들만의 고차원적, 추상적 영역의 어젠다가 아니라 국민이 공감할 수 있는 일상적 어젠다로 설정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국내정치적 지지를 받지 못하는 대외정책은 미국이든 우리든 추진 동력을 얻기 힘들다. 예컨대, 한-미 동맹의 가치를 무조건 신성시할 것이 아니라 국민들이 실감하고 공감할 수 있게 해야 하는 것이다. 아직은 잠정적으로 골격만 제시된 셈이어서 바이든 행정부의 새로운 국가안보전략이 한반도와 동아시아에 어떻게 투영될지는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다만, 동맹이라는 자산이 핵심적 전략수단이라고 한다면 바이든 행정부는 동아시아의 린치핀(핵심축)인 한국의 목소리에 좀 더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일단 오랫동안 갈등을 빚어온 방위비 분담 협상은 마무리를 지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관건은 비핵화 협상과 남북관계의 발전이다. 한국은 북핵 위협의 최대 이해당사국이고 또 북한에 대한 정보가 가장 풍부한 나라이며, 북한의 행동 패턴과 의도를 가장 정확히 판단할 수 있는 국가다. 한반도 문제에 관한 한 바이든 행정부는 동맹국 한국에 ‘아웃소싱’해도 좋다. 17일 방한하는 블링컨과 로이드 오스틴 국방부 장관이 비무장지대(DMZ) 현장을 방문하여 한반도의 안보 현실을 체감하고 북핵 문제와 남북관계 등 적어도 한반도 현안에 관한 한 동맹국 한국의 목소리를 경청하길 권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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