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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이우진의 햇빛] 봄 날씨는 알레그로 템포로 온다

등록 2021-03-21 15:11수정 2021-03-22 02:38

이우진 ㅣ 차세대수치예보모델개발사업단장

하루 종일 입을 틀어막은 마스크를 벗고 나면 폐 속까지 시원하듯, 겨우내 닫혀 있던 창문을 열어젖히니 집 안 깊숙이 신선한 공기가 들어온다. 아직 찬 기운은 채 가시지 않았지만, 코끝을 찡하게 했던 매운 기는 사라진 지 오래다. 목을 컬컬하게 했던 마른공기에는 어느새 수분이 늘어나 숨쉬기도 한결 부드럽고 편안해졌다. 산수유는 만발한 지 오래고, 목련도 꽃봉오리가 부풀어 금방이라도 터질 것만 같다. 누런 잔디 사이로 초록빛 잡초가 여기저기 고개를 내밀었다. 지난겨울의 혹독한 추위와 매서운 바람을 견뎌내고 세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질긴 생명력이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사방이 단절되고 사람 사이의 거리가 떨어져도, 그 틈새로 봄은 오고 있는 것이다.

봄이 되면 두세달 사이에 평균 기온이 10도 이상 증가하는 엄청난 기후변화를 경험한다. 다만 몇달 뒤에는 본래의 기후로 되돌아올 거라는 걸 알기에 당연하게 감내할 뿐이다. 이맘때쯤 찾아오는 계절의 교대식은 북반구와 남반구가 서로 임무를 맞바꾸는 시기와 맞물려 있다. 차가운 시베리아에서 적도를 향해 흐르던 대기의 강물은 이제 방향을 바꿔 타는 참이다. 강남에서 제비가 찾아오듯 다시 남쪽에서 따뜻한 기운을 싣고 우리나라를 향해 되돌아오는 것이다. 겨우내 메말라 바닥을 드러낸 대기의 물길은 이제 바다를 건너오면서 물이 차오르고 점차 활기를 되찾는다.

봄 날씨는 변덕이 심하다. 양쯔강 자락에서 햇빛을 받으며 자라난 따뜻한 기운은 젊은 혈기를 가진 것인지, 북상하면서 세력이 강해지고 아직 가시지 않은 한기와 부딪히며 요란한 폭풍우를 쏟아낸다. 한바탕 소동이 지나면 미처 후퇴하지 못한 막바지 찬 공기가 다시 내려오며 꽃샘추위가 찾아온다. 대기가 불안정한 탓에 하루에도 몇차례 소나기가 들이치다 개기를 반복해 여우가 시집간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아지랑이라도 끼는 날이면 햇살을 듬뿍 받아 낮밤의 기온 일교차가 15도 이상 벌어지기도 한다. 기온은 널뛰고 날씨가 롤러코스터를 타면 일기예보도 그 변화를 곧바로 쫓아가기 버거워진다. 우리 몸도 날씨 기복을 미처 따라가지 못해 춘곤증을 느끼고 스트레스를 받는다. 날씨나 신체나 모두 봄이 주는 축복을 받아들이기 전에 톡톡히 신고식을 치르는 셈이다.

일기도의 봄은 동아시아 대륙을 지배하던 찬 고기압 세력이 여러개로 쪼개지며 시작한다. 태양의 고도가 높아지고 낮이 길어지면서 대기가 덥혀진 탓이다. 그 새를 비집고 군웅이 할거하는 자리에 홀연히 온대저기압이 나타나 주변 세력을 규합하고는 모양새를 갖춰 한반도 주변을 지나가면 비가 내리고 봄의 서막이 펼쳐진다.

일기도는 느리거나 빠른 리듬이 뒤섞여 있는 악기의 경연장이다. 겨우내 우리나라에 머물렀던 시베리아 동장군은 말발굽 소리처럼 잰걸음으로 달아나다 점차 둔탁한 북소리로 바뀌며 사라진다. 저 멀리 오키나와 남쪽에서 북상하려고 시기를 엿보는 북태평양 고기압은 라르고에 저음의 콘트라베이스로 속삭인다. 우리나라를 지나가는 온대저기압은 고음의 바이올린으로 알레그로 템포로 경쾌하게 읊조린다. 다양한 기압 배치가 각각의 음색과 리듬을 뽐내는 동안 일기도의 경연은 다음 악장으로 넘어간다.

베토벤의 <바이올린 소나타 5번>은 다른 곡과 대조적으로 감미롭고 따뜻하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은 “봄”이라는 예명을 붙여주었지만, 선율에는 군데군데 알 수 없는 어두운 그림자가 느껴진다. 점점 심해지는 귓병으로 천직을 내려놓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속에서 음악가는 희망을 노래한 것이 아니었을까. 봄 소나타를 듣고 있으면, 박목월 시인의 ‘윤사월’이 떠오른다. 산지기 외딴집 눈먼 처녀에게 찾아온 봄의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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