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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보시라이’ 숙명적 라이벌의 긴 그림자

등록 2021-03-23 14:18수정 2021-03-24 02:42

박민희의 시진핑 시대 열전 _20
보시라이 전 충칭 당서기가 2013년 8월22일 산둥성 지난중급인민법원에서 뇌물 수수와 직권남용 등 혐의로 재판을 받으면서 피고인석에 서 있다. 지난/로이터 연합뉴스
보시라이 전 충칭 당서기가 2013년 8월22일 산둥성 지난중급인민법원에서 뇌물 수수와 직권남용 등 혐의로 재판을 받으면서 피고인석에 서 있다. 지난/로이터 연합뉴스

시진핑 시대 중국공산당은 좌파 노선을 강화하면서 충칭 모델의 많은 요소를 선택적으로 이용했지만, 극심한 빈부격차의 근본적 원인인 성장 모델을 바꿀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충칭 모델과 이를 활용한 시진핑식 통치는 기득권층의 부를 줄여 일하는 보통 사람들의 몫을 늘리는 근본적인 개혁 대신, 대중의 불만과 분노의 에너지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포퓰리즘과 권위주의의 결합이다. 보시라이와 시진핑의 권위주의와 포퓰리즘의 결합은 미국에서 벌어진 트럼프주의의 전주곡으로도 볼 수 있다.

그날의 충격은 아직도 생생하다. 2012년 2월6일 중국 최대도시 충칭의 부시장 겸 공안국장 왕리쥔이 청두의 미국영사관으로 들어가 망명을 요청했다. 보시라이 충칭 당서기의 최측근으로, 온갖 ‘더러운 일’을 도맡아 했던 왕리쥔은 보시라이 일가의 치부와 중국 지도부와 관련한 비밀 자료들을 가지고 갔다. 그의 망명 시도로 시진핑의 권력 승계를 막기 위해 보시라이 등이 쿠데타를 모의했음이 드러나게 된다. 중국공산당 최고 지도부 내 권력 암투가 만천하에 드러났을 뿐 아니라 미국까지 얽히며 ‘세계화’되었다.

그해 11월 시진핑의 최고지도자 등극을 몇달 앞두고 벌어진 이 사건은 시진핑 시대 중국이 나아갈 방향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고, 지금까지도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보시라이는 시진핑의 영원한 라이벌이었다. 중국 고위 지도자들의 아들인 두 사람은 최고 지도부의 집무실 겸 거주지인 베이징의 중난하이에서 함께 자랐다. 이들 ‘태자당’ 도련님들은 자신들이 중국의 차기 지도자라는 의식을 가지고 성장했고, 문화대혁명과 아버지의 숙청에 휩쓸렸다. 문혁이 끝나고 아버지가 복권되면서, 보시라이도 시진핑과 마찬가지로 일찌감치 정치에 뛰어들어 랴오닝성 성장, 상무부장 등으로 승승장구하며 차기 지도자의 야망을 키웠다. 하지만 2007년 그는 일생일대의 좌절을 겪었다. 최고 지도부인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에 들지 못하고 충칭 당서기로 ‘좌천’된 것이다. 그가 평생 자기보다 한 수 아래로 얕잡아 봤던 시진핑은 이때 국가부주석이자 차기 지도자로 결정되었다.

이때부터 보시라이는 ‘충칭 모델’이라는 새로운 실험으로 전국적 관심을 모으며 정치적 재기를 도모하기 시작했다. 국유기업의 역할을 강화해 여기서 나오는 수익을 활용해 저소득층을 위한 복지를 확대하는 것이 충칭 모델 실험의 뼈대였다. 농촌 주민들에게 도시 후커우(호구)를 주고, 서민·노동자들을 위한 주택 제공 등 복지를 확대하겠다고 했다. 정치적으로는 마오쩌둥과 문혁의 유산을 활용했다. 주민들을 모아 혁명가요 부르기 행사를 열고, 관리와 학생들을 농촌으로 보내 농민의 삶을 배우게 했다. 범죄조직, 그리고 이들과 결탁한 관리, 기업가들을 처단하는 범죄와의 전쟁을 대대적으로 벌였다. ‘붉은 노래 부르기와 검은 세력 소탕’(唱紅打黑·창홍타흑)이 충칭 모델의 구호였다. 부패한 관리들을 혼내주고 서민을 위한 정치를 펼 ‘제2의 마오쩌둥’처럼 보였던 보시라이에게 대중은 열광했다.

이 ‘범죄와의 전쟁’을 지휘했던 왕리쥔과 사이가 틀어지면서 보시라이는 몰락하기 시작했다. 왕리쥔이 망명을 시도한 일주일 뒤 당시 시진핑 부주석이 미국을 방문했다. 시 부주석을 맞이한 당시 조 바이든 미국 부통령이 왕리쥔으로부터 미국영사관이 입수한 쿠데타 모의 증거를 건넸을 것으로 많은 이들이 추측한다. 시 부주석이 미국 방문에서 돌아온 이후 열린 전국인민대표대회 마지막 날인 3월14일, 원자바오 당시 총리는 내외신 기자회견에서 보시라이를 겨냥해 “충칭시 지도부는 반성해야 한다”며 “정치개혁이 성공하지 못하면 문혁과 같은 역사적 비극이 다시 일어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다음날 공산당 지도부는 보시라이의 해임을 발표했다. 이후 진행된 재판에서 보시라이는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반 시진핑 정변 음모’가 드러나지 않았다면, 시진핑의 길은 달랐을지도 모른다. 야심가 보시라이와 저우융캉, 링지화, 쉬차이허우 ‘4인방’이 손잡고, 시진핑을 끌어내리고 보시라이를 최고지도자로 만들기 위해 쿠데타를 모의했다는 것은 중국공산당 지도부를 충격에 빠뜨렸다. 후진타오 시기 중국 정치는 최고지도자의 1인 권력이 절대적이지 않은 집단지도체제로, 상무위원 9명이 각자의 분야를 맡아 다스렸다. 저우융캉은 권력 서열 9위였지만, 무장경찰·사법·공안·검찰기구를 관할하고 있어 병력까지 움직일 수 있었다.

2010년 10월 충칭을 방문한 저우융캉 당시 중국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왼쪽 둘째)가 보시라이(오른쪽) 충칭 당서기와 함께 혁명가를 부르고 있다. 온라인 갈무리
2010년 10월 충칭을 방문한 저우융캉 당시 중국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왼쪽 둘째)가 보시라이(오른쪽) 충칭 당서기와 함께 혁명가를 부르고 있다. 온라인 갈무리

우여곡절 끝에 집권한 시진핑은 정치국 상무위원들이 권력을 분점해 한명이 야심을 품으면 혼란을 일으킬 수 있는 집단지도체제의 불안정을 경고하면서, 최고지도자인 자신에게 권력을 집중시켜 공산당이 직면한 위기를 헤쳐가야 한다는 주장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저우융캉과 보시라이, 쉬차이허우, 링지화와 관련된 인맥을 제거하는 숙청이 끝없이 계속되었다. 이들과 연류됐다는 이유로 숙청된 관료들의 자리에 시진핑의 측근 세력을 임명하면서, ‘시자쥔’(習家軍)으로 불리는 시진핑의 측근 세력이 빠르게 당·정·군의 요직을 장악했다.

보시라이가 남긴 충칭 모델의 유산도 주목해야 한다. 보시라이가 정치 무대에서 사라진 뒤에도 충칭 모델은 사라지지 않았다. 시진핑은 충칭 모델을 차용하고 전국적으로 확대해 ‘시진핑 모델’을 만들었다. 1978년부터 ‘먼저 부자가 되라’는 목표를 향해 질주해온 중국의 발전 모델은 후진타오 시기 후반기부터 한계에 부딪혔다. 특권층에 막대한 부가 집중됐고, 저임금 노동력과 정부의 대규모 투자를 통해 이룬 초고속 성장 뒤에선 부정부패에 대한 분노와 소외계층의 불만이 임계점을 향해 끓어오르고 있었다. 보시라이는 누구보다 민감하게 민심의 요구를 포착했다. 문혁 시기에 대한 대중들의 향수를 이용해 평등을 강조했지만, 대규모 투자와 성장 중심 노선은 바꾸지 않았다.

보시라이가 선구적으로 보여줬던 대중 동원 전략들이 ‘시진핑 신시대’에 변주되거나 더욱 강화된 형태로 등장했다. 시진핑도 보시라이와 마찬가지로 강력한 카리스마 지도자의 이미지를 만들어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마오쩌둥을 활용하고 있다. 건국의 아버지, 미국과 싸워 이긴 마오의 이미지다.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활’ 구호 아래 애국주의를 고조시켜 대중의 에너지를 동원하면서도, 공산당에 위협이 될 만한 충칭 모델의 요소들은 제거했다. 대중시위나 부유층에 대한 분노를 동원하는 부분은 허용되지 않는다. 첨단기술을 활용한 촘촘한 감시망으로 대중의 에너지를 통제한다. 보시라이가 펼쳤던 ‘범죄와의 전쟁’ 대신 ‘부패와의 전쟁’이 계속되고 있다.

시진핑 시대 중국공산당은 좌파 노선을 강화하면서 충칭 모델의 많은 요소를 선택적으로 이용했지만, 극심한 빈부격차의 근본적 원인인 성장 모델을 바꿀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마이클 페티스 베이징대 교수는 중국의 경제적 성공은 노동자들의 낮은 임금, 저금리, 취약한 사회안전망, 역진세, 환경 파괴 등의 형태로 기업에 막대한 보조금을 제공하면서, 생산에 비해 소비자들의 구매력이 턱없이 낮아 생기는 ‘높은 저축’을 대규모 투자에 활용하는 모델에 의존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개혁개방이 막 시작된 1980년대 중국 국내총생산에서 가계 소비가 차지하는 비율은 50~52%였지만 2019년에는 39%로 하락했다. 유럽 주요 국가들의 60~65%, 미국 72%에 비해 턱없이 낮다. 중국 서민과 노동자들은 국내에서 생산된 물자를 소비할 구매력이 턱없이 부족하고, 이렇게 축적된 중국의 ‘과잉저축’은 국내에서 대규모 인프라 건설 등에 투자되고, 해외로 흘러나가 미국의 무역적자를 계속 키우면서 글로벌 불균형 문제를 일으킨다. 마이클 페티스와 매슈 클라인은 공저 <무역전쟁은 계급전쟁이다>(Trade wars are class wars)에서 무역전쟁은 국가 간 전쟁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은행가, 금융자산 소유자가 서민들을 상대로 벌이는 전쟁, 억만장자와 그렇지 않은 이들 사이의 전쟁이라고 지적한다. “중국 노동자들이 누려야 할 부가 엘리트 계층에게 이전되는 구조가 (노동자들의) 구매력을 억누르고 기업가에게 보조금을 주는 효과를 낸다. 이런 상황이 과잉생산을 만들어내고 주식, 채권, 부동산 가격을 올려 글로벌 경제를 왜곡시킨다. 중국의 과소소비는 다른 국가의 일자리를 없애고 자산 가치를 부풀려 호황과 거품, 부채 위기의 악순환을 만들어낸다.” 이런 구조에서 미국과 중국의 기업가, 정치 엘리트들은 ‘공생 관계’이며, 이들은 불평등한 구조를 바꾸는 데 저항하고 있다.

중국은 2028년께 미국을 추월해 세계 1위 경제대국이 될 것이란 전망이 나오지만, 지니계수는 0.46~0.49로 매우 심각한 불평등의 기준인 0.4를 훨씬 뛰어넘었다. 이는 소득 불평등만을 계산한 것이며, 자산까지 고려하면 불평등 문제는 훨씬 심각하다. 지난해부터 중국에선 ‘네이쥐안’(内卷·involution)이란 용어가 유행하고 있다. 원래 중국 근대사에서 아무리 노동력을 투입해도 1인당 생산성은 오히려 떨어지는 상태, 노동량을 무한 투입해도 생산성도 노동자의 삶도 나아지지 않는 상태를 설명하는 학술 용어다. 996(아침 9시부터 밤 9시까지 주 6일 근무)의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면서도 치솟는 집값과 불평등에 절망하는 젊은 세대에게 ‘네이쥐안’은 현실의 절박한 화두가 되고 있다.

‘충칭 모델’과 이를 활용한 시진핑식 통치는 기득권층의 부를 줄여 일하는 보통 사람들의 몫을 늘리는 근본적인 개혁 대신, 대중의 불만과 분노의 에너지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포퓰리즘과 권위주의의 결합이다. 이는 태평양 건너 미국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보시라이와 시진핑의 권위주의와 포퓰리즘의 결합은 미국에서 벌어진 트럼프주의의 전주곡으로도 볼 수 있다. 클라인과 페티스는 미-중 갈등이 지정학적 문제라기보다는, 국내에서 막대한 소득을 부유층과 이들이 통제하는 기업들에 이전하고 있기 때문에 점점 더 구매력이 낮아진 보통 사람들이 “점점 더 공격적 애국주의자들과 기회주의자들에게 속게 되는 상황” 때문에 일어나고 있다고 본다.

시진핑은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메이크 차이나 그레이트 어게인)을 외치고, 트럼프는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메이크 아메리카 그레이트 어게인)를 외쳤던 것은, 두 제국의 포퓰리즘이 충돌하는 기묘한 광경이다. 더이상 사회가 지탱하기 어려울 정도로 극심한 불평등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이 수렁에서 헤어나올 길이 보이지 않는다. <끝>

박민희 ㅣ 논설위원. 대학과 대학원에서 중국과 중앙아시아 역사를 공부했다. 중국 인민대학에서 국제관계를 공부한 뒤, 2009년부터 2013년까지 <한겨레> 베이징 특파원으로 중국 곳곳을 다니며 취재했다. <중국을 인터뷰하다>(공저)를 썼고, <중국과 이란> 등의 책을 번역했다. ‘혐중’에 반대한다. 중국과 중국인에 대한 공정한 이해와 동행을 희망한다.

mingg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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