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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이우진의 햇빛] 대기의 춤

등록 2021-04-18 18:22수정 2021-04-19 02:04

이우진 ㅣ 차세대수치예보모델개발사업단장

꽃이 피니 나비가 날아든다. 누이와 함께 나비를 쫓아다녔던 워즈워스는 날개의 분가루가 떨어질까 봐 두려웠던 동심을 시에 담았다. 날개를 접고 고운 자태를 드러낸 그 모습을 붙잡고 싶어 조심스레 다가섰던 어릴 적 기억이 소환된다. 보드라운 가루가 닿지 않게 살며시 손을 대면, 나비는 어느새 빠져나가 이리저리 방향을 가늠할 수 없게 현란한 날갯짓을 한다. 가볍게 떠다니다가도 어느 순간 힘을 주어 오르기를 반복한다. 나비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대기가 흔들거리는 대로 나비가 따라가는 것 같기도 하다.

동이 트면 대기도 잠에서 깨어난다. 햇살에 눈이 부셔서가 아니라, 바닥으로부터 온기를 느껴서다. 태양의 고도가 높아지며 바닥의 열기가 더해지면, 본격적으로 대기의 춤이 시작된다. 홍학의 군무처럼 다리와 다리가 교차하며 여기저기 분수처럼 동그란 모양을 그린다. 처음에는 작은 몸짓으로 지면 부근을 맴돌지만, 몸놀림은 점차 커져 더 높은 곳까지 뻗친다. 마치 육상 선수가 숨 고르기를 한 후 달려나가 장대를 꽂고 반동으로 힘차게 차오른 후 가로대를 휘감아 내려오는 것처럼, 춤사위는 때론 격렬하게 때론 차분하게 이어진다. 한낮이 되면 춤의 열기는 구름이 닿는 곳까지 차올라 절정에 이른다.

패러글라이더는 이때를 틈타 높은 곳에서 활강하며 대기의 춤을 즐긴다. 따사로운 햇살이 산지에 내리쬐면 여기저기 열 기둥이 솟아난다. 대기의 손놀림에 따라 치올리는 팔을 따라 오르다가 내려오는 팔에 숨을 고른 후, 다음 장단에 맞추어 다시 오르기를 반복하면서 패러글라이더는 계속 하늘에 머무를 수 있게 된다. 새들도 대기의 춤을 즐길 줄 안다. 솔개는 솟구치는 대기의 어깨 위에 날개를 힘껏 기대고는, 마치 땅 위에 발을 딛고 서 있기라도 하듯이 정지한 자세로 먹잇감을 찾는다. 갈매기는 한술 더 떠 해안 절벽을 배경으로 춤을 즐긴다. 맞바람이 암벽에 부딪혀 치오르면 그 위에 더 쉽게 떠 있을 수 있게 된다.

소나기구름을 만나면 대기의 호흡은 더욱 가빠지고 춤도 격렬해진다. 왈츠가 이어지다가 갑자기 플라멩코로 전환하는 격이다. 하늘이 뚫린 듯 하늘의 울림이 곧바로 땅에 전해지고, 땅의 기운이 순식간에 높은 구름 위로 치고 올라가는 만큼 대기의 몸부림도 심해진다. 회오리바람을 동반한 토네이도에서 보듯이, 길게 늘어진 면 가락처럼 한쪽 방향으로 심하게 뒤틀린 모습에서 소나기구름 내부의 혼란한 대기의 운동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광란의 춤 속에 빠져들면 점보 여객기마저도 무사하기 어렵다.

소나기구름의 난폭한 성질을 모르는 건지, 민들레 꽃씨는 풍선처럼 잔뜩 부풀어진 자세로 갓털을 곧추세우고는 이 구름과 어울려 춤추려고 기회를 엿본다. 뮤지컬 <캣츠>에서 하늘나라로 올라가기를 꿈꾸며 축제를 벌이는 젤리클 고양이처럼, 이들도 소나기구름을 타고 비상하기만을 고대해온 것이다. 이윽고 일진광풍이 불자 꽃씨는 소나기구름이 만들어낸 거친 춤바람을 타고 하늘 끝까지 올라간다. 높이 오른 만큼 멀리 날아가 새로운 생명을 싹틔울 것이다.

한때 소나기도 물러가고 어느덧 해가 서편으로 기울어지면, 대기의 무희들은 구름에서 낮은 곳으로 다시 내려오고, 춤 동작도 점차 느려진다. 춤추는 무희들 사이로 햇살이 부서지며 무대에 조명이 클로즈업된다. 아직 남은 하늘빛 사이로 들어온 선홍색이 보라색을 띠더니 점차 희미해진다. 춤꾼들은 하나둘 무대에서 떠나간다. 마지막 남은 춤꾼마저 어둠으로 사라지자, 밤안개가 대신 무대를 메운다. 한낮의 환희는 온데간데없고, 고된 하루의 피로가 몰려온다. 고독과 정적만이 차가운 밤공기를 감싼다. 하지만 새벽이 오면 대기는 다시 깨어나 힘찬 날갯짓을 보여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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