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엄마아들 귀농서신] 장모님이 따뜻한 밥을 주셨습니다

등록 2021-05-26 16:00수정 2021-05-27 02:37

모두가 가지 말라는데 가고 싶은 길이 있습니다. 아내와 7년을 만나면서 많은 선택을 해왔습니다. 다시 선택의 기로에서, 시골살이에 도전하기로 했습니다. 저 혼자 내린 결정이 아닌, ‘우리’가 함께 내린 결정입니다.

선무영 ㅣ 시골로 가려는 아들·로스쿨 졸업

2020년 4월24일. 당연히 붙을 줄 알고 있었던 시험에 떨어진 다음 날이자 상견례 날이었습니다. 그날 난감해하시던 어머니, 아버지 얼굴이 생생합니다. 장모님 댁은 가까이 있었기에 상견례 전에도 자주 왕래가 있었어요. 종종 찾아가면, 부모 품 떠나서 고생한다며 따뜻한 밥을 해주셨습니다. 맛난 음식을 많이도 준비하셔서 장모님 댁에 갈 때는 약간 헐렁한 바지를 입고 갔어요. 가끔 시험 얘기를 꺼내실 때면 걱정 마시라 너스레를 떨었는데, 뚝 떨어졌어요. ‘변호사가 될 줄 알았던 사위가 농부가 되겠다니! 이 결혼은 반대다!’ 하셔도 할 말이 없을 텐데, 장모님은 제가 시골에 내려가 살겠다고 할 때도 “잘해보라”며 다시 따뜻한 밥을 해주셨습니다. 그간 고생했다며. 변호사가 되어서 자랑스럽게 해드리고 싶었는데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렸는지 그런 말도 못하고 말았는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래도 늘 말씀드리는 바가 있습니다. 아내는 꼭 행복하게 해주겠다고요.

예로부터 무릇 사람을 평가할 때 신언서판(용모 언변 글솜씨 사리분별력)을 보았다 하는데, 저는 삶이란 인지체매재(인성 지성 체력 매력 재력)로 정리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사람다워야죠. 그러기 위해, 옳고 그름을 곧잘 알아챌 정도로 똑똑하며, 자기가 하려는 일을 거뜬히 해낼 만큼 몸과 마음이 튼튼해야 합니다. 여기에 매력을 조금 더해 다른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을 정도의 사람이 된다면 재력은 따라오기 마련 아닐까요. 그러니 큰 부자가 되려면 먼저 똑똑하고 튼튼한, 사람다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삶을 대하는 태도가 제일 중요한 것 아니겠냐고, 그려놓은 대로 인생이 흘러가지 않더라도 괜찮다고 다독여준 아내입니다.

정약용 선생께서는 복을 열복과 청복으로 나누신다죠. 세상을 호령할 열복과 유유자적 풍류를 즐기는 청복이 있는데 열복만큼 청복도 큰 복이라며 청복을 은근히 치켜세웠다 합니다. 그렇다 해도 저희가 유유자적 청복을 누리려고 시골에 가려는 건 아니에요. 오히려 시골에서 더 많은 열복을 꾀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사람은 서울에서 살아야 한다고요? 나태주 시인의 ‘그리움’이란 시로 답하고 싶습니다. 모두가 가지 말라는데 가고 싶은 길이 있습니다. 그것이 인생이고 바로 꿈이죠. 어느 때보다 뜨거운 마음을 가지고 시골로 가려 합니다.

아내와 7년을 만나면서 많은 선택을 해왔습니다. 대학을 졸업하며, 일자리를 잡은 뒤 서둘러 결혼을 할 수도 있었죠. 그럼에도 로스쿨에 갔던 건 ‘더 멋진 사람이 되고 싶어서’였어요. 아내와 함께한 결정이었습니다. 서로 더 크고 멋진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성장할 시간을 충분히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직장생활 하는 아내가 보기에, 회사일이란 많은 시간을 남을 위해 쓰게 되는지라 빠른 시일 내 큰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오롯이 스스로를 위해 시간을 쓸 필요가 있다고 했습니다. 다시 선택의 기로에서, 로스쿨 때와 같은 맥락으로 시골살이에 도전하기로 했습니다. 시골에 내려가자는 결정도 저 혼자 내린 결정이 아닌, ‘우리’가 함께 내린 결정입니다.

어머니 말씀대로 농사는 어렵습니다. 귀농하신 지 벌써 10년 되셨네요. 그간 멀리서나마 지켜보았을 때도 절대 편해 보이는 삶이 아니었습니다. 항상 바쁘시고 해야 할 일이 늘 있었죠. 절임배추일, 밭매기, 풀뽑기, 열매따기 무엇 하나 쉽지 않습니다. 전화할 때면 끙끙 앓으시는 게 보이는 듯했어요.

편히 살려는 마음으로 그곳에 가려는 건 아닙니다. 다만, 저희는 시골에서의 삶이 더 자기주도적이라는 점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만들어서 어디다 어떻게 팔지 모든 것이 농부에게 달려 있죠. 아내는 10년차 그래픽디자이너입니다. 시댁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겠다며 한번도 해본 적 없던 패키지 디자인을 기쁜 마음으로 해낸 사람입니다. 농촌진흥청 디자인상도 받고, 우리 디자인이 좋다며 소개해달라는 연락도 많이 받으셨다 했죠? 아내는 벌써부터 내려가면 어떤 작물을 길러서, 어떻게 만들어보자 이야기하고 있어요. 하나부터 열까지 제 손으로 농가를 꾸려나갈 생각에 가끔 신이 나 보이기도 한답니다. 저희는 이렇게 스스로 일을 해나갈 때 가장 빠르고 바르게 성장하리라 생각하고 있어요. 그렇게 서로가 성장하는 중에 사업도 같이 키워나가면, 어머니가 걱정하시지 않을 정도의 여유를 얻어내지 않겠습니까. 혹, 그렇지 아니하면 또 어떻습니까! 이미 충분히 자유롭고 멋진 삶을 살아가고 있을 텐데요.

※편집자 주: 도시에서 나고 자란 청년과 10년차 농부인 여성이 ‘귀농’을 주제로 편지를 교환합니다. 한칼 공모를 통해 선발된 두 모자가 이야기 나눌 귀농의 꿈, 귀농의 어려움은 이 도시의 꿈, 그 도시의 어려움이기도 합니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내란을 일으키려다 사형당하다 1.

내란을 일으키려다 사형당하다

[사설] 윤석열·국힘의 헌재 흔들기 가당치 않다 2.

[사설] 윤석열·국힘의 헌재 흔들기 가당치 않다

[유레카] 대통령까지 중독된 알고리즘 공화국 3.

[유레카] 대통령까지 중독된 알고리즘 공화국

앞으로도 우린 파쇼와 싸우게 된다 [아침햇발] 4.

앞으로도 우린 파쇼와 싸우게 된다 [아침햇발]

트럼프, 멜라니아, 밈코인 [헬로, 크립토] 5.

트럼프, 멜라니아, 밈코인 [헬로, 크립토]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