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일이 한창일 때면 요리조차 힘든 현실이다. 새벽부터 밭에서 씨름하다 보면 팔다리·허리 안 쑤시는 데가 없거든. 점심은 보통 간단한 끼니고, 해거름까지 작업한 날은 바깥음식을 먹을 때도 종종 있단다.
조금숙 | 괴산서 농사짓는 엄마
꽃 진 자리마다 아로니아가 소물소물 달린다. 작은 것으로 가득 찬다는 소만(小滿) 절기를 지나가며 내린 비에도 장마를 떠올릴 만큼 날씨에 예민한 요즘이다. 줄곧 학생이던 너를 오래 기다려주고, 어려울 때 든든한 버팀목이, 용기가 된 보라가 있으니 정말 기특하고 고마워. 이제 막 꽃봉오리를 만들어가는 너와 보라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너희 아버지와의 시작을 생각하게 된단다.
즐겨 듣던 프로그램 중에 ‘사소한 문제 해결’이란 코너가 있었어. 결코 문제가 해결되는 거 같지 않았지만 상당히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단다. 결혼생활이 일상에서 반복되는 사소함의 무게가 결코 작지 않으니, 시골에 오겠다는 뜻을 같이했다 하더라도 사소한 문제에서도 항상 배려하는 마음을 잊지 말렴.
40년 한 지붕 아래서 살다 보니 쌓인 사소함의 무게를 이야기하고 싶어. 눈에 깍지가 씌어 결혼한다고 할 때는 앞뒤 가리지도, 무얼 계산하지도 않았다. 시할머니에, 시동생까지 있는 판잣집도 괜찮다고 했다. 그런데 살아보지 않고서는 일상의 습관은 알 수 없는 노릇이지. 서로 너무도 다른 습관을 알게 된 건 시댁 식구들도, 아들딸을 떼어 놓고 둘만의 시간을 다시 갖고 나서였다.
26년의 직장생활을 정리하고 배낭 하나 메고 유라시아 횡단 여행을 할 때, 엄마는 매일 아침 심심했어. 여행 내내 새벽이 밝기도 전에 잠이 깨어 옆지기가 일어날 때까지 뒤척이며 기다려야 했지. 한 소리 하면 그 변명이 군대 얘기란다. 작전처 차트병으로 밤새워 차트를 썼는데 그런 군생활이 끝나고 나서 생긴 습관이라고 해. 그렇게 아침에 늦게 일어나는 게 버릇이 되었다는데 직장생활을 할 때도 새벽까지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일이 허다했단다. 밤이 깊을 때 집중이 잘된다고 하면서 말이다. 아침을 늦게 맞는 그 습관 때문에 지금도 속을 달래고, 또 달래고 있단다. 사소한 문제 같지만 일상에서 반복되고 누적되면 한번은 터지기 마련. 네 아빠는 무슨 일인가 집중하면 옆에서 무슨 말을 해도 못 알아들어. 분명히 말을 했는데도 귓등으로 넘겨듣고는 모른다 하니 속이 뒤집어지지! 혼자서 바쁜 긴 아침을 보내고 나서 그런 일이 있으면 불꽃이 튀게 한바탕하는 거지.
아로니아 가공 사업도 마찬가지였어. 새로운 일을 추진하는 것에 신이 났었다. 마냥 생과로 판매할 수 없다고 가공을 시작했지. 캠벨 포도와 함께 주스를 만들기도 하고, 복숭아와 혼합해 만들어보기도 했어. 수많은 시도 중 아로니아 발효원액은 지금까지 만들고 있지만 찾는 사람 없는 것들은 모두 중단해야 했다. 새 제품마다 만든 스티커와 포장상자들은 상자째 여기저기 쌓여 있단다. 네 아버지의 집중력은 대단해서 하고자 하는 일을 척척 해내지만,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기쁨에 집중하다 보면 결과 예측에 소홀해지는 아쉬움이 있단다. 말을 바로 하자면 엄마도 무조건 동조했으니까 ‘우리’의 아쉬움이겠다. 사소한 일마다 따지기가 싫어서 못마땅해도 넘어가다 보니 사업성과를 만들어내야 하는 일에도 그렇게 됐네. 지금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닌 만큼 스스로의 그리고 보라의 속마음까지 꼭 생각해보면 좋겠구나.
겉옷을 벗게 하는 것은 심술궂은 바람이 아니라 따뜻한 햇빛인 것처럼 따뜻함을 나누는 너희는 그야말로 천생연분이지 싶다. 사부인의 이야기를 들으니 네 짝꿍의 따뜻함이 어디에서 왔는지 가늠하고도 남는다. 다만, 그렇다고 시골살이가 쉬워지는 건 아니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는 만들어진 이야기란다. 현실에서 부닥치는 어려움은 접어두고 ‘딱 1년’이라는 환상에 바탕한 영화라고 생각해. 농사일이 한창일 때면 요리조차 힘든 현실이다. 새벽부터 밭에서 씨름하다 보면 팔다리·허리 안 쑤시는 데가 없거든. 점심은 보통 간단한 끼니고, 해거름까지 작업한 날은 바깥음식을 먹을 때도 종종 있단다.
이곳 시골에서는 아이들 교육문제 또한 큰 고민거리다. 부모가 공동체 중심적 교육관을 갖는 것과는 별개로, 도시 아이들과의 ‘점수’ 경쟁은 아주 어려울 거야. 무언가를 배울 기회를 갖기가 어려운 현실이다. 그래서인지 도시로 유학(?) 보내는 경우를 주변에서 흔히 봐. 아직 아이가 없더라도 곧 닥칠 일 아니겠니.
네가 정약용의 청복과 열복으로 설명했으니 나도 정약용의 의지를 빌려 답해보려고 한다. 다산 선생이 유배지에서 맞은 동짓날, 자신이 묵던 작은 방을 사의재(四宜齋)라 불렀단다. ‘생각을 담백하게, 외모를 장엄하게, 언어를 과묵하게, 행동을 신중하게 하겠다’는 의지였다고 하니 깊이 새겨들을 만하지 않니. 담백한 생각에서 비롯한 신중한 행동인가 돌아봤으면 좋겠구나.
▶편집자 주: 도시에서 나고 자란 청년과 10년차 농부인 여성이 ‘귀농’을 주제로 편지를 교환합니다. 한칼 공모를 통해 선발된 두 모자가 이야기 나눌 귀농의 꿈, 귀농의 어려움은 이 도시의 꿈, 그 도시의 어려움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