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김동수ㅣ기록노동자·<유령들: 어느 대학 청소노동자 이야기> 저자
학창시절, 학교에서 해야 하는 청소는 무조건 학생들의 몫이었다. 청소를 왜 해야 하는지 묻는 건 금기였다. 그때는 ‘너희가 사용하는 공간은 너희들이 해야 한다’는 사고가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마음속에서 샘솟는 의문은 있었다. 선생님이 쓰는 곳까지 왜 우리가 청소해야 할까.
청소 인원과 장소를 결정하는 권한은 언제나 선생님에게 있었다. 그런 점에서 자발적인 청소는 없었던 것 같다. 청소당번은 주로 순번대로 나누었다. 모든 이가 골고루 청소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지만 예외의 경우도 있었다.
자칭 ‘우열주의자’였던 선생님은 시험 결과를 꼭 청소와 연계시켰다. 상위권에 위치한 아이들에게는 칭찬과 함께 ‘청소면제권’이 주어졌다. 반면에 하위권을 맴도는 학생들은 몽둥이로 흠씬 두들겨 맞고, 다음 시험 결과가 나올 때까지 교실과 교무실 청소를 해야 했다. 그래서 공부를 잘하면 1년 내내 청소를 하지 않을 수 있었다. ‘우열주의자 선생님’에게 청소는 징벌적인 수단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던 셈이다. 청소를 오락의 수단으로 바라보는 선생님도 있었다. 그가 공평하게 이루어지던 청소 순번에 균열을 일으킬 때 우리는 단숨에 환호했다. 한 분단에 몰아주는 ‘청소권’을 걸고 이루어지는 대결은 언제나 치열하고 격정적이었다. 가위바위보로 진행되는 삼세판의 승부에서 이긴 자는 승리를 자축했고, 진 자는 한동안 같은 분단 친구들의 야유세례를 받아야 했다. 청소는 그렇게 오락의 재미를 가미하기 위한 소재로 활용되었고, 대결의 패자는 당연히 청소를 해야 한다는 명제를 각인해주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선생님이 학생에게 교직원 이용 공간을 청소하라고 지시하는 것에 대해 인권침해라고 보았다. 한 중학생의 진정에 대한 답이었다. 결과가 나오기 전, 학교 쪽은 인성 함양, 공동체문화 형성 등을 위해 학생들이 교직원 사용 공간을 청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청소란 행위가 그동안 학교에서는 그런 위대한 가치들을 담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실제 현장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점에 아이러니함만 남는다. 학교의 주장과 달리 학생들에게 청소는 귀찮고, 짜증나고, 더럽고, 그래서 남에게 떠넘기고 싶은 일로 규정된다. 그것이 누군가에겐 노동이 된다는 사실을 잘 알지 못한 채 말이다. 솔직히 나는 고등학교 때까지 노동이란 단어조차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었다. 청소노동자의 얼굴도 대학에 와서야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지난 4월, 서울시교육청이 발표한 제2기 학생인권종합계획에는 노동인권교육을 강화하겠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학생이 왜 쓸데없이 노동인권을 배우느냐는 학부모들의 반발도 만만찮다. 그 시간에 국·영·수 한 문제라도 더 푸는 것이 아직까지는 진정한 교육인 시대이고, 그 결과가 직업의 우열을 가른다. 이런 상황에서 사회로부터 ‘무시받는 일들’이 실은 너희의 직업이 될 수도 있다고 말하면 대부분은 학생의 장래에 대해 저주하는 것이라 받아들인다. 사실 귀천 없는 노동은 비현실적이다. 현실에서 저주스러운 악담이라 치부되는 직업들이 더는 저주라고 느껴지지 않도록 일깨워주는 것이 노동인권교육의 지향점이다. 하지만 그러한 일이 우리 가장 가까이에 머물고 있다는 현실마저도 잘 가르치지 않고 오히려 금기시한다. 그 연장선상에서 노동에 신성성을 부여하는 건 역설적이게도 사회가 선망하는 직업 이외의 일이 처한 비루한 현실을 은폐한다. 오늘의 노동인권교육은 일회성 이벤트에 불과하다. 좋은 학벌이 좋은 직업을 얻을 수 있다는 당위성만 독려하고, 청소 같은 육체적 부담이 큰 노동은 처벌과 재미의 요소로 활용된다. 그것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또 한편으로 자기는 절대 하지 않을 거란 믿음을 준다. ‘저주스러운 직업’의 이미지는 이렇게 12년의 정규교육을 통해 탄생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