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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이 뻔한 세계의 아름다움

등록 2021-06-07 14:42수정 2021-06-08 02:07

[숨&결] 이안 ㅣ 시인·<동시마중> 편집위원

지난달은 중부지방에 감자꽃이 한창이었다. 올해도 동네 감자밭을 오가며 권태응(1918~1951)을 생각했다. 감자꽃은 권태응과 꼭 붙어서 온다. 진달래꽃이 김소월과 같이 오듯이. 아니, 김소월이 진달래꽃을 데리고 오듯이 우리나라 감자꽃은 권태응이 데려온다고 해야겠다. “자주 꽃 핀 건 자주 감자,/ 파 보나 마나 자주 감자.// 하얀 꽃 핀 건 하얀 감자,/ 파 보나 마나 하얀 감자.” 소박하고 단아한 기품이 느껴지면서도 곧장 외워 읊조리게 만든다. 서른여섯 글자, 한 글자도 가감하거나 대체할 수 없다. 이런 걸 시로 쓸 만한 가치가 있나 싶을 정도로 뻔하고 당연한 얘기다. 그런데 묘하게도 직접 확인해보고 싶게 만든다. 정말일까? 봉숭아도 채송화도 대궁이 말간 것은 하얀 꽃 피고, 대궁이 빨간 것은 빨간 꽃 핀다는 걸 ‘감자꽃’을 읽고 나서야 알았다. 자명한 세계는 당연해 보이지만 당연한 것이야말로 얼마나 신비로운 세계인가. 달걀에서 병아리가 나오지 않고 수박씨에서 수박이 열리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정말 큰일 날 일 아닌가. 권태응의 동시에는 이런 자명한 세계에의 동경과 지향이 담겨 있다.

“피란들 가건 말건/ 총소리 나건 말건/ 도둑놈 오건 말건// 아무치도 않은 꿀벌들/ 저 할 일만 하는 꿀벌들”(‘꿀벌’ 전문)

“비행기도 총소리도/ 겁 안 난다./ 모두들 피란 가라/ 나는 일한다./ 어떤 놈이 내 귀를/ 뚤불까 보냐?”(‘귀머거리’ 전문)

두 편 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7월에 쓴 작품이다. 전쟁으로 인해 일상을 빼앗긴 안타까움과 이에 항변하는 마음을 꿀벌과 청각장애인의 노동을 통해 표현했다. 사람이 아닌 꿀벌과 장애가 있는 사람이 ‘정상인’들이 벌인 전쟁을 비판하고 있는 점이 이채롭다. 만나기 쉽지 않은 작품이다. 일하는 사람들, 또는 노동을 바라보는 시선에도 이러한 묵묵함의 세계가 기입돼 있다.

“쪽 쪽 푸르른 보리밭 골./ 나란히 세 사람 호미를 들고/ 햇살 발끈 받으며 밭을 매지요.// 하늘에선 종달새 노래를 부르고/ 아지랑인 아로롱 물결 지는데/ 쉬지 않고 세 사람 밭을 매지요.”(‘보리밭 매는 사람’ 전문)

“쪽 쪽”을 띄어 써 푸르고 긴 보리밭 골을 시각화한 점, 부사 “발끈”의 적실한 사용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하늘과 땅, 그 사이에서 쉬지 않고 일하며 나란히 살아가는 사람들 모습을 “종달새 노래”라는 하늘의 음악과 “아지랑이”라는 땅의 북돋움 속에 아름답게 그려냈다. 그러나 이 작품에는 어떤 찬사도 들어 있지 않다. 이런 모습이야말로 자주 감자에서 자주 꽃 피고 하얀 꽃 아래 흙속에선 하얀 감자가 들어서는 것처럼 이 세계의 자명하고 당연한 이치다. 여기엔 한 줄기 희망이거나 안쓰러움 같은 것도 없다. 그저 “나란히 세 사람 호미를 들고” “쉬지 않고 밭을” 매면서 “쪽 쪽 푸르른 보리밭 골”을 지나고 있을 뿐이다. 마치 이 생을 다 건너간 이후에도 이런 일이 계속되리라는 듯이. 이것은 운명론이 아니다. 코로나19로 인해 위기에 처한 인류가 새롭게 되찾아야 할 ‘이 뻔한 세계의 아름다움’에 가깝다.

“달 달 달팽이/ 뿔 넷 달린 달팽이// 건드리면 옴추락/ 가만두면 내밀고.// 달 달 달팽이/ 느림뱅이 달팽이// 멀린 한 번 못 가고/ 밭에서만 놀고.”(‘달팽이’ 전문)

“누에는 누에는/ 뭘 먹고 사-나.// 새파란 뽕잎만/ 먹고서 살-지.// 누에는 누에는/ 몇 번이나 자-나.// 다 커 늙도록/ 꼭 네 번 자-지.// 누에는 누에는/ 무엇이 되-나.// 동그란 고치 짓고/ 번데기 되-지.”(‘누에’ 전문)

이 두 작품은 전쟁이 일어나기 한 달 전인 1950년 5월에 썼다. 전쟁을 사이에 둔 두 달의 세계가 이렇게나 다르다. 달팽이가 빠른 속도로 멀리까지 가고자 할 때, 누에가 번데기 아니고 다른 것이 되고자 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 서른넷 아까운 나이에 생을 거둔 사람, 〈권태응 전집〉(창비, 2018)을 읽으며 우리가 잃어버린 세계를 생각한다. 하지감자가 나올 무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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