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재준 국가정보원장이 8일 열린 국회 정보위원회에서 자체 국정원 개혁 방안의 뼈대를 밝혔다. 핵심 내용은 국정원의 운영이나 조직을 통한 정치개입을 하지 않고, 이적단체·간첩 적발을 위해 국내외 국정원 활동을 융합하며, 대공 수사를 위해 국내 수사 부문을 크게 보강하겠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개혁이 아니라 기득권 수호를 위한 궤변이자 퇴행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 국정원의 정치개입은 지금도 국가정보원법에 따라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는데도 이것을 개혁 방안이라고 내놓은 것 자체가 난센스다. 이를 국내 대공수사를 더욱 강화하겠다는 것과 연결해 보면 국정원의 의도가 확실하게 드러난다. 그동안 해왔던 기관원의 정부기관 또는 국회 등의 출입을 잠시 중단하는 척하면서 실제 정치개입의 통로였던 대공수사권은 축소하기는커녕 오히려 확대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터넷 댓글 공작을 통한 국정원의 대선 개입으로 촉발된 국정원 개혁에 대한 국민적 요구를 철저히 무시하는 일이다. 국제적으로도 제대로 된 국가의 경우, 정보기관의 전횡 방지 차원에서 정보 수집과 판단을 분리하는 게 관례이다. 더더구나 수사권까지 주는 곳은 없다. 수사권을 지닌 국정원이 정치개입을 하지 않겠다는 것은 마치 샤일록이 피를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안토니오의 심장 부근 살을 베어 가겠다는 것과 같다. 멀리 갈 것도 없이 국정원은 지금 선거법 위반으로 기소된 댓글공작에 대해서조차 대북심리전의 일환이라고 억지를 부리지 않는가.
이렇게 ‘거꾸로 가는 국정원’의 핵심에는 남재준 원장과 박근혜 대통령이 있다. 남 원장은 국정원의 댓글공작 사건에 대한 사과 요구에 “전임 원장이 한 일이기 때문에 책임감을 느끼지 않는다. (사과할) 이유가 없고, 사퇴할 이유도 없다”고 말했다. 국정원이 개인의 기관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나올 수 없는 어이없는 망발이다. 이런 오만방자한 태도의 이면에는 국민적인 국정원 개혁 요구를 개혁 대상인 국정원에 맡기고, 남 원장의 돌출 행동에 전폭적으로 신임을 보내는 박 대통령의 그림자가 서려 있다.
남 원장이 제시한 국정원 개혁 방향은 박 대통령이 한나라당 대표를 맡고 있던 2006년 3월 낸 한나라당 국정원 개혁안에서도 크게 후퇴한 것이다. 당시 한나라당은 검찰 수사지휘권 강화, 국회 예산통제권 강화, 국정원장에 대한 국회의 탄핵소추권 신설 등을 주장했다. 남 원장은 근거가 희박한 대북 정보의 남발이나 대화록 공개 등 ‘공작정치’에 몰두할 것이 아니라, 국민이 국정원에 바라는 개혁이 무엇인지부터 제대로 살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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