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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한겨레 창간 30돌 사설] 진실과 평화를 향한 다짐

등록 2018-05-15 05:05수정 2018-05-18 10:12

다시, 백두산 천지다. 1994년 백두산 첫 방문 이후 지금껏 백두산 사진만 찍어온 안승일(72) 작가의 작품이다. “어느 해 6월 중순 백두산 남쪽 조-중 경계에서 찍었다”고만 작가는 밝혔다. 지금도 한국인은 북녘을 거쳐 천지에 오를 수 없다. 군사분계선 넘어 북녘을 거쳐 천지에 오를 수 있다면, 몽골 초원과 시베리아와 유럽에 이를 수 있다. 천지는 우리들을 다른 세상으로 이어주는, 자유와 소통과 열림의 다리다. 평화의 다른 이름이다. 하여, 천지는 아직도 “우리들 희망의 시작”이다. 사진 안승일 작가, 글 이제훈 기자 nomad@hani.co.kr
한겨레는 ‘광장의 자식’으로 태어났습니다. 6월 항쟁의 그 뜨거운 함성이 태어날 때부터 탯줄에 각인돼 있습니다. 역사의 광장 한복판에서 거센 비바람을 맞으며 부대끼고 성장하는 것은 한겨레의 운명입니다. ‘6월 광장에서 촛불 광장까지’. 한국의 지난 30년 역사는 오롯이 한겨레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1988년 5월15일치 한겨레 창간사는 “우리는 떨리는 감격으로 오늘 이 창간호를 만들었다”는 구절로 시작합니다. 그 떨림의 감격은 결코 잊을 수 없고, 잊어서도 안 되는 한겨레의 영원한 정신입니다. 이제 저희는 그 구절을 뜨거운 감동으로 새롭게 가슴에 새기며 30돌 기념호를 만듭니다.

타는 목마름이었습니다. 이 땅의 새벽을 기다리는 뜨거운 목마름은 30년 전 한겨레를 탄생시킨 원동력이었습니다. 그 목마름을 한겨레는 민주·민생·민족이라는 창간 정신에 담았습니다. 민주주의 실현, 민중의 생존권 확보, 민족통일의 지향은 한겨레가 30년간 쉬지 않고 달려온 지향점입니다. 그 길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역사는 전진과 퇴행을 거듭했습니다. 신록의 계절이 오는가 싶더니 가혹한 추위도 다시 찾아왔습니다. 밝음이 온 누리를 비추는가 하면 다시 암흑의 시대도 겪었습니다. 한겨레는 어둠이 내려앉은 밤에는 새벽을 밝히는 촛불이 되고자 했고, 눈 내리는 엄동설한에는 푸르름을 간직한 소나무가 되려 했습니다. 한겨레를 낳아주고 길러준 6만여 주주와 독자들은 그 긴 여정에서 언제나 든든한 버팀목이었습니다.

1988년 5월15일 발행된 <한겨레신문> 창간호에 실린 백두산 천지. 그때, 백두산 천지는 금기였다. 갈 수 없는 땅, 상상해선 안 될 곳. 30년 전 오늘 <한겨레신문>이 창간호 1면을 커다란 백두산 천지 사진으로 채운 이유다. 한국전쟁 이후 천지에 오른 한국인은 공식·공개적으론 단 한 명도 없었다. 전후 한국인이 찍은 사진이 있을 리 없다. 창간호의 천지는 일본의 세계적 사진작가 구보다 히로지(79)의 작품이다. 그때 <한겨레>가 천지 사진에 담은 게 ‘통일의 열망’만은 아니다. 민주주의와 민중(시민)생존권은 금기의 굴레에 갇혀서는 숨을 쉴 수 없음을 상기시켜, 철창에 갇힌 상상력의 해방을 꿈꾼 것이다. 천지를 “우리들 그리움의 끝이자 희망의 시작”이라 부른 까닭이다.
역사는 결국 진보한다는 명제를 다시금 확인하는 오늘입니다. 민주주의와 인권 열차는 후진의 어두운 터널을 벗어나 다시 정상궤도에 접어들었습니다. 국민의 삶도 더디지만 개선의 방향을 향해 어려운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습니다. 일촉즉발의 위기로 치닫던 한반도에는 화해와 상생의 기운이 피어나고 있습니다. 최근의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을 지켜보며, 창간 초기 ‘김일성 주석’이라는 표기 때문에 보수세력의 집중포화에 시달렸던 한겨레의 감회는 실로 남다릅니다.

그럼에도 민주·민생·민족의 창간 이념은 여전히 내릴 수 없는 깃발입니다. 민주주의는 정치적 차원을 넘어 삶의 현장 곳곳에서 깊게 뿌리내려야 할 과제입니다. 보통 사람들의 삶은 여전히 고단하고 하루하루가 전쟁터와 같습니다. 남과 북이 하나가 되고 민족이 더불어 행복하게 사는 날까지는 아직도 갈 길이 멀고 험난합니다.

창간 이후 30년을 돌아보면 기쁨과 자부심 못지않게 회한과 반성도 몰려옵니다. 한겨레가 조금 더 잘했더라면, 더 열심히 했더라면, 세상의 변화는 더 빨리 우리 곁에 왔을 것입니다. 30년의 세월을 거치면서 뜨거웠던 가슴이 식고, 인식과 사고에 이끼가 낀 것은 아닌지 되돌아봅니다. ‘초심이 바랬다’는 독자 여러분의 질책은 저희의 안일과 나태를 일깨우는 죽비입니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의 저하, 독자와 소통하지 않으려는 오만함 등에 대한 매서운 비판도 귀청을 아프게 흔듭니다. 저희는 다시 마음을 새롭게 가다듬습니다.

<한겨레신문> 창간호 1면. 제13대 대선이 끝난 지 일주일 뒤인 1987년 12월24일치 <동아일보>에 실린 <한겨레신문> 창간기금 모금 광고가 함께 실렸다.
한겨레는 창간 30돌을 맞이해 두 개의 화두를 내걸었습니다. 첫째는 진실입니다. 지극히 당연하면서도 너무나 어려운 언론의 영원한 숙제입니다. 한겨레 초대 사장을 지낸 청암 송건호 선생은 진실 보도에 대해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부분이 아니라 전체를 봐야 하고, 퇴보하는 가치가 아니라 역사의 새로운 가치의 편에서 봐야 하며, 무엇이 근거이며 무엇이 조건인가를 명확히 해야 한다.” 송 선생은 그 길이 ‘고독의 길’이라고 말했지만, 이제는 ‘함께 가는 길’입니다. 독자 여러분과 상의하고 토론하고 배우면서 진실을 밝히는 정직한 창이 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두 번째 화두는 평화입니다. “스페인 카탈루냐의 새들은 피스(평화), 피스, 피스라고 노래한다.” ‘첼로의 성자’로 불리는 파블로 카살스가 남긴 유명한 말입니다. 이 땅의 휴전선 철책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새들도 ‘평화 평화’라고 노래하게 합시다. 하지만 평화는 전쟁의 반대말이 아닙니다. 대상이 남북 관계에만 국한되지도 않습니다. 평화는 ‘갈등의 부재’가 아니라 서로의 차이점을 평화로운 방식을 통해 해결하는 ‘창조적 대안의 존재’입니다. 평화는 불화를 넘어서는 공감대 위에서 피어납니다. 평화는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간절한 목마름 속에서 자라납니다. 그리고 평화의 기본조건은 결국 진실입니다.

한겨레는 이제 새로운 30년을 향한 여정을 시작하려 합니다. 그 출발점에 서서 다시 창간의 초심을 되새깁니다. 무디어진 펜을 날카롭게 벼리고, 가슴에 사랑과 열정의 불꽃을 다시금 지펴 올립니다. 주주·독자 여러분께 감사의 큰절을 올립니다.


불의와 냉전 맞선 한겨레 30년

<한겨레>는 참언론을 갈구하는 시민들의 성원으로 탄생한 신문입니다. 2만7000여명의 창간 주주들이 <한겨레>가 똑바로 설 수 있도록 주춧돌을 놓아 주셨습니다. 이미 많은 언론이 존재하고 있음에도 시민들이 새 신문을 만드는 데 십시일반 힘을 모은 이유는 간명했습니다. 독재정권 눈치를 보며 진실을 감추고 비트는 기존 언론이 못미더웠기 때문이었습니다. <한겨레>는 창간 발기 선언문에서 “권력의 부당한 간섭을 거부하고, 용기있게 진실을 보도할 것”이라고 다짐했습니다. 창간 이후 <한겨레>의 30년은 진실을 찾기 위한 험한 여정이었습니다. 정권과 재벌의 치부를 드러낸 숱한 특종은 그런 노력의 산물입니다. 때로는 정권과 자본의 혹독한 탄압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진실을 좇는 과정에서 <한겨레>가 부여잡은 핵심 가치 중 하나는 ‘평화’입니다. ‘진정한 민주화 실현’ ‘민중의 생존권 확보’와 함께 ‘민족의 평화통일’을 창간 이념으로 삼았습니다. 서슬 퍼런 권위주의 정권 시절에 ‘반북 이데올로기’에 외롭게 맞서며 민족의 화해와 평화를 추구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한겨레>의 30년은 평화를 향한 여정이기도 했습니다. 진실과 평화를 찾아 달려온 <한겨레>의 30년을 12개 장면으로 재구성해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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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

고문기술자 이근안 경감 ‘공개 수배’ _1988년 12월21일
고 김근태 전 의원 등 민주화운동 인사들을 고문한 ‘얼굴 없는 고문기술자’의 실체를 처음으로 세상에 알렸다. ▶기사 바로가기

이지문 중위 ‘군 부재자 투표 부정’ 폭로 _1992년 3월23일
언론이 권력의 눈치를 보던 권위주의 정권 시절, <한겨레>는 폭압에 맞선 양심선언의 통로이자 보호자였다. ▶기사 바로가기

김영삼 전 대통령 차남 김현철씨 국정개입 의혹 특종 _1997년 3월10일
‘소통령’으로 불리던 김현철씨의 와이티엔(YTN) 사장 선임 개입을 보여주는 녹취록을 입수해 보도함으로써, 그의 국정개입 실상을 폭로했다. ▶기사 바로가기

김용철 변호사, 삼성 비자금 폭로 _2007년 10월30일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 비자금’ 양심 고백을 처음으로 보도했다. 이 보도 뒤 삼성은 2년 넘게 <한겨레>에 광고를 싣지 않았다. ▶기사 바로가기

⑤ ‘국정원 댓글 조작’ 사건 첫 보도 _2013년 1월30일
국정원 직원 김하영씨가 커뮤니티 사이트 ‘오늘의 유머’ 게시판에 댓글을 달았다는 사실을 최초로 보도했다. ▶기사 바로가기

⑥ 탄핵의 서막 연 ‘비선실세 최순실’ 특종 _2016년 9월20일
‘최순실’이라는 비선실세의 존재를 처음으로 세상에 알렸다. 이후에도 잇단 특종으로 최순실·박근혜 게이트 국면을 주도했다. ▶기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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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① 안기부, 한겨레 편집국 침탈 _1989년 7월13일
국가안전기획부는 한겨레 임직원들의 저항에도 편집국 철문을 쇠망치로 부수고 난입해 서경원 의원 방북 관련 취재 자료를 탈취해감으로써 언론자유를 유린했다. ▶기사 바로가기

② 시베리아 북한 벌목장 르포 _1994년 5월22일
북한 벌목장의 운영실태와 그곳에서 일하는 북한 노동자들의 실상을 처음으로 현지 취재했다. ▶기사 바로가기

③ 정연주 워싱턴 특파원의 평양 르포 _1994년 9월12일
국내 언론인으로는 처음으로 단독 방북 취재를 통해 평양 소식을 전했다. ▶기사 바로가기

④ 북녘 동포 돕기 캠페인 _1997년 6월27일
북한에 기근이 심각하던 1997년 ‘아! 굶주리는 북녘’ 연재에 이어 ‘북녘 동포를 도웁시다’와 ‘북녘 어린이에게 생명을’ 캠페인을 벌였다. ▶기사 바로가기

⑤ 평양에서 ‘윤이상 통일음악회’ 개최 _1998년 11월5일
민간 주도의 첫 남북 합동 음악회인 ‘윤이상통일음악회’를 북한 윤이상음악연구소와 함께 평양에서 개최했다. ▶기사 바로가기

⑥ 남북 정상 ‘판문점 회담’ 보도 _2018년 4월28일
회담 다음날치 지면을 ‘정상회담 특별판’으로 제작했다. ▶기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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