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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행정·자치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게 민주주의냐”

등록 2015-03-06 19:16수정 2015-03-07 13:48

정월 대보름을 앞두고 지난 2일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유촌리에서 열린 척사(윷놀이)대회에서 박용석(왼쪽) 후보가 동네 어르신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하며 지지를 호소하고 하고 있다.
정월 대보름을 앞두고 지난 2일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유촌리에서 열린 척사(윷놀이)대회에서 박용석(왼쪽) 후보가 동네 어르신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하며 지지를 호소하고 하고 있다.
[토요판] 르포
조합장 선거, 격전지를 가다
▶ 3월11일 사상 처음으로 ‘조합장(농협·수협·산림조합) 전국동시선거’가 실시된다. 대상 조합은 모두 1326개. 농협(축협 포함) 1115개, 수협 82개, 산림조합 129개다. 전국 평균경쟁률은 2.7 대 1. 지난달 25일 후보등록 마감 뒤 다음날부터 본격 선거운동이 시작됐다. 그러나 관련 선거법이 합동연설회를 없애는 등 후보들의 선거운동을 극도로 제한해 ‘현 조합장만 유리한 깜깜이 선거’라는 비판이 거세다. 8 대 1로 최고경쟁률을 기록한 경기도 연천군의 임진농협 선거현장을 통해 이번 선거의 의미와 분위기를 살펴봤다.

“당신에게 농협은 무엇입니까? 농산물이 폭락해도 누구 하나 책임지는 사람이 없습니다. 평생을 함께한 농협이건만 고령농이라고 무시합니다. 농협이 역할을 잘하면 책임구매와 판매량 확충으로 농산물 폭락을 얼마든지 막을 수 있습니다. 언제까지 하늘만 바라보며 세상 탓만 하시겠습니까? 오는 3월11일 실시되는 전국 조합장 동시선거, 결코 남의 일이 아닙니다. 좋은 농협은 조합원이 만듭니다.”

지난 3일 오전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아미2리의 한 카페. ‘농협 개혁’을 외치며 조합장 선거에 처음 출마한 박용석(54) 후보의 최측근은 이런 내용의 인쇄물을 내보이며 이번 선거의 의미를 강조한다. “이곳 사람들은 (단위)농협 개혁의 필요성을 인식하면서도 각 후보들하고 동네 선후배나 혈연 등으로 서로 얽혀 있다 보니 뭐라고 얘기는 못하는 상황입니다. 농협이 엉망인데도 말이죠. 그래서 박 후보와 제가 이번에 들이대고 나선 겁니다.” 연천군농민회의 고덕균 회장은 박 후보와 오래전부터 의기투합해 도전장을 내게 됐다고 설명한다.

“농민을 위한 농협이 돼야 하는데, 일단 조합장이 되고 나면 아예 엉뚱한 짓거리를 하니…. 인사권을 막 휘두르고 이사회나 대의원총회 등 공식 의사결정기구도 무시한 채 독단적으로 운영하고, 현 조합장이 너무 신뢰를 잃었어요. ‘제왕적 조합장’이나 마찬가지죠. 그러니 이번에 바꿔 보겠다며 많은 사람들이 출마한 것 아니겠습니까?”

안양농협 등 다른 2곳과 함께 이번 선거에서 최대 격전지가 된 임진농협은 임진강을 끼고 강 동쪽의 군남면(12개리), 서쪽의 미산면(8개리)과 왕징면(4개리)을 관할로 두고 있다. 인구가 4만5000여명인 연천군에는 임진농협을 비롯해 연천농협, 전곡농협 등 3개의 농협이 있다.

“현직 조합장에게만 유리하게 돼 있다”

연천군 내 다른 두곳 조합장의 선거 경쟁률이 나란히 3 대 1인 데 반해, 8선을 노리는 80대의 전 조합장에다 현 조합장까지 출사표를 던진 임진농협은 초과열 경쟁지가 됐다. 조합원 1450명을 놓고 8명이 표심잡기 경쟁을 벌여야 한다. 군남면에서만 무려 5명이 도전장을 던진 상황. 전국 평균경쟁률에 비해 3배 이상 높다. 연천군은 쌀과 율무·콩 주산지로 바로 북한과 접해 있어 보수 성향이 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임진농협 조합장 선거에 처음 나온 후보들은 “이번 선거는 현직 조합장에게만 유리하게 돼 있다”며 이구동성으로 볼멘소리를 한다. 지난 2일 유촌리의 ‘미산면 주민자치센터’ 앞마당에서 대보름을 앞두고 열린 척사(윷놀이)대회. 8명의 후보가 모두 출동해 선거운동을 펼칠 절호의 기회가 있었는데 후보들은 선거운동의 문제점에 대해 불만을 쏟아냈다.

“이게 뭔 개떡 같은 선거입니까? 후보자들이 유권자 집을 개별 방문할 수 없고, 새로 출마한 사람들은 조합원 전화번호도 알 수 없는데, 전화와 휴대폰 문자메시지만으로 선거운동을 하라고 하니, 조합원 전체 전화번호를 다 가지고 있는 현 조합장만 유리한 선거죠.” 이종성(63) 후보는 이번 조합장 전국동시선거 운동 방법을 규정한 ‘공공단체 등 위탁선거에 관한 법률’에 대해 거세게 비판한다.

선거 효율성과 돈선거 방지를 위해 단위조합별 선거를 없애고 전국 동시선거를 위해 지난해 8월 제정된 위탁선거법은 사실상 정책선거 대결을 어렵게 해놨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후보자는 혼자만 선거운동을 할 수 있고, 운동원이나 선거 사무실을 두는 것은 물론, 현수막을 설치할 수도 없다. 자신을 알리는 어깨띠를 두르고 유권자한테 직접 명함을 돌리거나 개별적으로 지지를 호소하는 것만 가능하다. 유권자들에게 문자메시지는 보낼 수 있으나 음성·화상·동영상을 전송하는 행위는 금지된다. 특히 집회를 이용해 정견을 발표하는 등 집단적으로 지지를 호소하는 것은 불법으로 엄벌에 처해진다. 배우자도 운전은 해줄 수 있으나 선거운동에 동행할 수 없다. 공식 선거운동 기간도 13일에 불과하다.

김인산(55) 후보도 이날 “선거운동에 너무 규제가 많아 명함만 돌릴 수 있고, 척사대회 같은 이런 데서 유권자를 만나야 하다니, 이게 민주주의냐”며 불만을 터뜨린다. 박용석 후보는 “내가 미산면에 거주해 군남면 사람들은 잘 모르고 그곳 유권자가 많은데, 명함을 돌리는 것 외에는 나의 정책을 알릴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얼굴만 알려서야 되겠느냐”고 역시 강도 높게 비판한다.

실제 이날 임진농협이 있는 3개면 마을을 두루 둘러보니 “도대체 선거는 하고 있는 것인가?” 의문이 든다. 공식 선거운동 5일째인데도, 현장에서 도무지 선거운동 분위기가 감지되지 않는다. 출마한 후보를 알리는 벽보는 임진농협과 하나로마트 등 고작 4군데만 붙이도록 극도로 제한돼 있는데, 이를 보는 유권자들은 눈을 비비고 찾아봐도 없다. 유권자들도 조합의 개혁을 바라는 일부 사람들 빼고는 대부분이 “뭐 그놈이 그놈이지, 새로운 사람 뽑는다고 달라지는 게 있겠어”라는 반응들이다. 선거 분위기는 조용하다 못해 냉랭하다. 그나마 농번기 시작 바로 직전인 정월 대보름을 앞두고 마을별로 척사대회가 열리고 있는데 이것이 선거운동의 장으로서의 역할을 할 뿐이다.

어쩌다 이렇게 후보자들의 운신 폭을 좁게 하는 조합장 선거가 됐을까? 조합장 전국동시선거는 2011년 농업협동조합법(농협법) 개정으로 도입됐다. 단위조합별로 선거가 실시돼 선거관리가 효과적으로 이뤄지지 못하고, 돈선거가 판을 친다는 판단에서 그렇게 결정된 것이다. 부정 비리 등으로 임기 4년을 채우지 못한 조합장이 생기면, 신임 조합장에게 잔여임기 대신 다시 4년의 임기를 보장해 여러 선거가 산발적으로 실시되는 등 효율성이 떨어졌다.

1326곳서 사상 첫 조합장 동시선거
현 조합장서 80대 전 조합장까지
8명 출마한 연천군 임진농협
조합원 1450명 놓고 초과열 경쟁
“규제 너무 심해 정책대결 불가능”

공식선거운동 5일째, 분위기 안나
운동원·사무실·현수막 모두 금지
언론 대담·토론회 못하도록 봉쇄
인터넷 누리집에 공약 띄우고
후보가 지지 호소하는 것만 가능

후보 정체성과 됨됨이 평가할 수 없어

개정 농협법에 따르면 2009년 3월22일부터 2013년 3월21일까지 조합장 임기가 개시된 경우, 해당 조합장 임기는 2015년 3월20일까지 보장하기로 했다. 그리고 2015년 3월 두번째 수요일에 첫 전국동시선거를 실시해 새롭게 출발하기로 한 것이다. 아울러 선거관리 주체를 중앙선거관리위원회로 바꿔 불법 및 비리 행위를 집중 감시하도록 했다.

그러나 선거운동 방식이 지나치게 제한되면서 새롭게 얼굴을 내민 조합장 후보가 조합원에게 자신은 물론 자신의 정책을 효과적으로 알릴 수 있는 길이 막혀 불만이 폭발하고 있다. 각 조합 인터넷 누리집에 공약 등을 띄워놓을 수는 있으나, 50대 이상이 대다수인 농촌에서 이를 통해 각 후보의 공약을 비교해보고 투표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느냐는 회의적 시각이 많다.

애초 국회 안전행정위원회 법안심사소위원회는 지난해 4월28일 ‘1회 전국동시조합장선거’ 선거운동 방식을 정한 ‘공공단체 등 위탁선거에 관한 법률’ 제정안을 심사하면서 애초 안에 담겼던 후보자의 언론 대담·토론회 조항을 삭제했다. 농협중앙회와 산림조합중앙회는 ‘조합의 자율성 침해’를 이유로 언론기관 등 단체들이 주최하는 대담·토론회에 반대했다. 특히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기존의 선거운동 방식인 합동연설회·공개토론회 제도로 돌아가는 것에도 부정적 태도를 보였다. 모든 조합의 합동연설회 관리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게 이유였다.

이 때문에 앞서 국회에서 정청래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조합장 전국동시선거가 헌정사상 가장 깜깜이 선거로 치러질 가능성이 높다”며 위탁선거법 개정안을 발의하기도 했으나 무산됐다. ‘좋은농협만들기운동’에 참여한 김영호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 의장도 지난달 국회 협약식에서 “소중한 선거임에도 후보자의 정체성이나 됨됨이, 살아온 과정 등 아무것도 평가할 수 없는 선거가 되고 있다. 언론들도 부정선거인 양하는 보도만 양산하고 있다”고 질타하기도 했다.

이런 깜깜이 선거 논란에도 임진농협 출마자들은 ‘현 조합장 체제는 농협이 지역농민을 위한 조직이 아니다’라며 저마다 공약을 내놓았다. 기호 1번 이일구(62) 후보는 5년 전 당선된 현 조합장으로 재선을 노리고 있고, 기호 8번 심양섭(80) 후보는 7차례나 조합장을 한 사람으로 ‘젊은 사람들한테 맡겨놨더니 농협이 엉망이 됐다’며 고령임에도 다시 8선 도전장을 냈다.

이일구 후보는 “조합장 자리라는 게 고액연봉(자신은 7800만원 받는다고 함)에다 직원 인사권까지 있으니 그런 욕심 때문에 후보들이 이번에 많이 나온 게 아니겠느냐”며 “7명의 후보들이 나를 표적으로 삼고 감시하니 전혀 움직일 수가 없다”고 고개를 흔든다. 그는 위탁선거법에 대해서도 “저도 잘못된 선거법이라고 본다. 현직도 손발을 묶어놨다. 그러나 지난 5년 동안의 조합장 활동으로 인지도가 다른 후보들보다 높은 게 나의 장점”이라고 말한다.

전두환 정권 때인 1980년대 초부터 오랫동안 조합장을 해온 심양섭 후보는 “빨간 전표와 파란 전표도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번 선거에 나왔다. 젊은 사람이 5년 전 조합장 했는데 못해서 내가 다시 나서게 된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기호 2번 이종성 후보는 “연천군 3개 농협이 각자의 길을 갈 게 아니라 하나의 농협으로 합병해야 자유무역협정(FTA) 등 파고에서 지역이 살아남을 수 있다”며 농협 직원들 성과급제 도입, 농산물 제값 받기 위한 경제사업 활성화를 공약으로 내세웠다. 3번 이원조(56) 후보는 “이번 선거가 공청회 등을 막아 유권자의 알권리를 막고 있다”고 지적하며 역시 3개 농협 합병과 직원 성과급제를 강조한다. 그는 “조합장도 비상임으로 해야 하고, 경영능력이 검증된 상임이사한테 경영을 위임해야 한다”고 한다.

농협 개혁 외치는 이들은 웃을 수 있을까

4번 조상현(67) 후보는 “무등리에서 25년 동안 정미소를 운영하면서 농협이 제자리걸음만 하는 모습을 봐왔다”며 “농민이 뙤약볕에서 애써 지은 지역농산물을 잘 팔기 위해서는 농협이 현재처럼 책상에 앉아서 컴퓨터로 장사하는 게 아니라, 별도의 판매부서를 만들어 직접 서울 등의 큰 시장을 방문해 직접 보고 듣고 물어서 우리 지역 농산물을 잘 팔아 농가소득 증대에 기여하는 조직이 돼야 한다”며 경제사업 활성화를 강조한다. 그는 “조합장이 되면 연봉의 반을 확 잘라서 조합에 환원하겠다”고 한다.

기호 5번 김인산 후보는 “농협이 현재처럼 금융사업에 몰두하기보다는 지역농민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 경제사업에 전력을 다해야 한다”며 “양질의 농산물 생산은 물론 2차 가공식품을 개발해 세계시장과 경쟁하겠다”고 힘을 준다. 6번 이상철(56) 후보는 “연천군 농지 대부분이 외지인 소유로 돼 있어, 농민들이 소작인으로 전락하는 처지가 되고 있다. 조합장이 되면 농민이 땀 흘리며 생산한 농산물을 제값에 판매하도록 의무를 다하겠다”고 다짐한다.

7번인 박용석 후보는 “현재 임진농협은 직원 40명에 상무급이 6명이나 되는 등 비효율적 인력구조로 인건비가 과다지출되고 있다”며 “2014년 기준 매출액이 52억원인데, 100억원 달성 때까지 조합장 무보수를 실천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웠다. 그는 “조합원의 주머니를 터는 신용사업 중심에서 탈피해 지역농산물을 제값 받고 팔 수 있도록 조합장이 직접 발로 뛰는 영업을 하겠다”고 강조한다.

임진농협 개혁을 바라는 조합원들의 목소리는 어떨까? ㅇ조합원은 “현 조합장은 자기가 못했기 때문에 여러 후보가 나온 것에 대해 창피한 줄 알아야 한다. 농협이 농민들을 위한 경제사업은 거의 하지 않고 중간상인한테 위탁판매만 한다. 그러니 농산물을 제값 받을 수 있겠는가? 그러면서도 농협 직원의 임금이 너무 높다. 현 조합장도 당선되면 연봉을 3000만원으로 줄이겠다고 했는데 이를 지키지 않았다”고 꼬집는다. 임진농협 대의원을 지낸 ㅎ씨도 현 조합장과는 인연이 깊은 사이라면서도 “그가 다시 되면 임진농협은 망가진다”고 우려를 표명한다.

불과 나흘 앞으로 투표일이 다가왔지만 열기를 거의 느낄 수 없는 사상 첫 조합장 전국동시선거. ‘농민을 위한 경제사업보다는 돈장사(신용사업)만 한다. 농민을 위한 조합이라기보다는 조합장과 직원을 위한 조합이다’라는 비판을 받아온 농협의 개혁을 외치며 출사표를 던진 사람들은 과연 웃을 수 있을까?

연천/글·사진 김경무 선임기자 kkm10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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