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 후보단일화의 때를 보는 것 같아”
‘문·안·박(문재인·안철수·박원순) 연대’를 놓고 새정치민주연합의 문재인 대표와 안철수 의원 사이에 흐르는 기류를 보면서 의원들이 한마디씩 던지는 말이다. 계절도 딱 이때쯤이었다. 2012년 11월6일 백범기념관에서 두 사람이 처음 만난 이후 11월23일 안철수 대표의 전격 사퇴에 이르기까지 양 진영 사이에는 뜨거운 공방과 싸늘한 시선이 오고갔다. 3년 만에 그 가을 정경이 그대로 재연되고 있는 것이다.
당시 두 후보를 대신해 협상을 벌였던 사람들은 반복되는 풍경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과거의 실패를 되풀이 해서는 안 된다. 3년 전의 경험에서 배워야 한다”는 게 당시 협상에 나섰던 이들의 공통된 바람이다. 이들의 주문을 정리해봤다.
잡음을 제거하라
3년 전 협상이 본격화할 무렵인 11월13일 문재인 후보의 정무특보를 맡고 있던 백원우 전 의원이 자신의 페이스북에 글을 하나 올렸다. 안철수 캠프 협상단 일원인 이태규씨의 총선 공보물과 함께 “한나라당 정권을 만들었던 사람, 모욕적이다”라는 글귀가 붙어있었다. 이태규씨의 한나라당 경력을 문제삼은 것이다. 안철수 캠프 쪽은 당연히 강한 불쾌감을 표시했다. 결국 백원우 전 의원은 정무특보에서 사퇴했고, 게시물도 내렸다. 하지만 상처받은 자존심은 쉽게 아물지 않는 법이다. 비슷한 문제들이 시도 때도 없이 평지돌출하면서 협상에 장애물이 됐다.
최근 ‘문안박’ 구상을 놓고는 최재성, 문병호 두 의원의 발언을 양쪽이 문제삼고 있다. 최재성 의원은 안철수 의원을 향해 “너무 많은 혼수를 가져오라고 하지 말고…”라고 말한 게, 문병호 의원은 “문재인, 안하무인 독선적…정나미 떨어져”라고 발언한 게 예민한 부분을 건드렸다. 안철수 캠프 출신으로 지금은 본업으로 복귀한 한 인사는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두 사람의 관계에서 이런 말들이 나오면 상대방의 진의를 의심하게 된다. 문재인 안철수 두 분이 상황을 모두 장악할 수 없는 상황이니 주변분들 스스로가 언행을 조심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대리인이 필요하다
문재인 안철수 두 사람이 처음으로 만난 건 11월6일 백범기념관이었다. 그때 기자도 현장에 있었는데 그렇게 많은 카메라가 한꺼번에 모인 걸 본 것은 태어나 처음이었다. 두 사람이 회견장에 들어서자 카메라들이 일제히 ‘촤르르르’ 하는 셔터소리를 터뜨렸다. 길게 이어지니 마치 유리창을 두드리는 빗소리처럼 들렸다. 만남 뒤 두 사람은 주변 사람들에게 “참 좋은 분이다”라고 공통된 평가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 뒤 두 사람은 ‘화성 남자, 금성 여자’에 빗대 ‘화성 재인, 금성 철수’로 불리는 사이가 됐다. 두 사람을 다 겪어본 새정치민주연합의 한 의원은 “두 사람은 부산 사투리를 쓴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굉장히 다른 사고체계를 갖고 있다. 민주화운동을 거쳐 변호사를 한 분과 의대생에서 기업가로 변신한 분이 갖는 경험 차이는 생각과 관점에서도 큰 격차를 만들어냈다”고 해석했다.
중재자가 필요한 사이인 것이다. ‘문안박’의 박원순 서울시장이 제격이다. 하지만 박원순 시장의 한 측근은 어려움을 토로했다. “박 시장도 문안박 연대의 필요성은 절대적으로 인정하나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기에는 아주 조심스러운 측면이 있다. 안철수 의원 입장에서는 ‘내 덕에 서울시장이 되고도 내 편을 안 들고…’하는 서운함이 있을 수 있다. 문재인 대표 쪽에서도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지 왜 균형자 역할만 하려고 하나. 어부지리를 노리는 건가’하고 의심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두 사람을 대리할 수 있는 ‘복심’의 역할이 중요해진다. 새정치민주연합의 한 의원은 “꼭 의원급이 아니더라도 두 분의 의중을 정확히 알고 있는 측근들이 직접 만나 세부적인 내용까지 서로의 뜻을 알아보고 합의할 수 있는 내용을 맞춰볼 필요가 있다. 두 분이 직접 만나는 건 그 뒤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상대를 압박하지 말라
3년 전 문재인 후보의 민주당은 130명에 가까운 의원을 확보하고 있는 거대야당이었지만, 안철수 후보의 ‘진심캠프’의 현역의원은 달랑 송호창 의원 하나였다. 체급이 다른 것이다. 그러니 안철수 후보 쪽은 단일화를 요구하는 시민사회 진영의 요구만으로도 큰 부담감을 느꼈다. 압박이 커지자 단일화를 요구하는 다양한 목소리 자체를 모두 “문재인 후보와 짜고 치는 것”이라고 해석을 했다고 당시 진심캠프에 참여했던 인사가 말했다.
현재 상황도 다르지 않다고 한다. 김성곤·문희상·강기정 등 3선 이상 의원 18명이 “문재인 대표는 안철수 전 대표의 혁신안을 적극 수용하고 안철수 전 대표는 문 대표의 제안을 수락하여 실질적 당내 혁신과 통합을 이루어야 한다”는 성명을 발표한 바 있다. 진심캠프 출신의 이 인사는 “중진의원들이 문안박 연대를 성사시키려는 마음이야 이해가 되지만, 당내에서 세력이 약한 안철수 의원으로서는 ‘문재인 대표의 지시를 받고 하는 건가?’라고 의심할 수도 있다. 지금은 안 대표를 압박할 때가 아니라 충분히 시간을 주고 드러나지 않게 1대 1로 만나 건의를 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2012년 대선 당시 문재인 후보와 안철수 후보가 부산 시내에서 지지자들을 향해 함께 인사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요구사항은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2012년 협상과정에서 안철수 후보 쪽에서는 “민주당에서 먼저 성의를 보이라”고 말했다. 민주당 협상팀들은 이를 ‘이해찬 대표 퇴진’으로 받아들였다. 실제로 안 후보 협상 대표들은 협상장 밖에서는 “민주당 지도부가 물러나라는 뜻”이라고 확인도 해줬다는 게 민주당 쪽 주장이다. 그래도 안철수 후보 쪽에서는 “우리 입으로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고 발을 빼기도 했다. 결국 이해찬 대표는 장문의 사퇴서를 발표하며 대표직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안철수 후보는 나중에 문재인 후보와의 텔레비전 토론회에서 “내가 그런 적이 없다”고 부인했다. 요구가 불투명함에 따라 협상은 제자리 걸음이었고 정상적인 대화는 이뤄지지 않았다. 혼선을 겪으며 상호불신만 깊어졌다. 금쪽 같은 시간은 빠르게 흘러만 갔다.
3년이 지났지만 비슷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안철수 후보가 요구하는 혁신안 10가지를 놓고는 당내에서 다양한 해석이 나오고 있다. 열이면 열 다 다르게 해석하고 있다. 문재인 대표와 가까운 어느 의원은 “안 의원이 바라는 바가 뭔지 정확히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다. 요구사항이 좀 더 구체적이면 대응도 더 진지하고 성실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한때는 안철수 후보의 협상 대표였던 어느 인사는 이렇게 말했다. “낡은 진보 청산을 얘기하는데 더 책임있는 자세로 말해야 한다. 당 대표를 지낸 경험이 있으니 ‘낡은 진보 청산을 위해 이런저런 노력을 해봤는데 되지 않더라. 그러니 문재인 대표는 이러저러한 지점에서부터 출발해 달라’고 제안해야 한다. 그래야 받아들이는 쪽도 지켜보는 사람들도 진지하게 고민할 것이다.”
아직 시간이 있다
3년 전 후보단일화 협상은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처음에는 국민경선 등 다양한 방법이 가능했으나 시간에 점점 쫓기면서 공론 조사냐, 적합도 조사냐로 좁혀졌다. 나중에는 그마저도 물 건너 가고 박선숙 의원이 최후통첩식으로 여론조사 문항을 내놓았다. 물론 그마저도 실현되지 않았다. 그에 비하면 문안박 연대는 시간적 여유가 있는 편이다. 12월15일 내년 총선에 뛸 예비후보 등록이 마감 시점일 수 있다.
안철수 의원은 오는 24일 부산 기자간담회에서 문재인 대표의 제안에 대해 자신의 답변을 내놓을 예정이다. 그 답변은 문 대표의 제안을 차버리는 것도 받아들이는 것도 아닌 ‘중간 지대’ 쯤 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에 따라 양쪽의 논의는 12월 초까지도 더 이어질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한 의원은 “이번 협상이 실패로 돌아가면 문재인 대표나 안철수 의원 모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받을 것이다. 그러니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양쪽이 아주 세밀한 부분까지 다 맞춰보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의겸 선임기자 kyummy@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