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년 전 처음으로 미국을 가봤다. 취재가 목적이었으나 뉴욕 맨해튼 구경을 빠뜨릴 수는 없었다.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도 놀라웠으나 화려함과 세련미에 압도당한 건 ‘트럼프 타워’였다. 우선 건물 입구에 붙어있는 이름 ‘트럼프 타워’의 글자 크기가 집채 만했다. 우리로 치면 삼성의 고층건물에 ‘이건희 집’이라고 큼지막하게 써붙인 셈이니 얼마나 당당한가. 주눅이 들어 조심스레 들어가 본 건물 안은 온통 금빛으로 흘러넘쳤다. 실내에 조성된 5층짜리 폭포는 아시아의 한쪽 끝에서 온 시골사람의 기를 죽이기에 충분했다.
동행한 뉴욕 교민은 건물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줬다. 원래 이 자리에는 여자 옷을 주로 파는 10층짜리 빌딩이 있었다고 한다. 트럼프가 눈독을 들이고 주변의 작은 건물을 야금야금 사들였다. 목표인 건물의 임대권도 하나하나 매입했다. 100년짜리 장기 계약을 맺었으니 사실상 소유한 거나 진배없다. 그러다 마침내 건물 주인에게 패를 내보인다. “함께 개발을 하자.” 고립된 건물 주인은 어쩔 수없이 동업에 응했다. 그러나 은행으로부터 돈을 빌리는 과정에서 원래 건물 주인의 지분을 쪼그라뜨렸다. 결국 모두 트럼프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포위 작전의 성공이다.
옛 건물에는 문화재급의 조각이 하나 있었다고 한다. 트럼프는 반대 여론을 무마하기 위해 이 조각을 박물관에 기증하겠다고 약속하고 건축허가를 받았다. 그러나 조각을 떼어내 옮기기가 만만치 않았다. 트럼프는 돈과 시간이 많이 들 것 같자 조각을 아예 부숴버렸다고 한다. 욕은 먹었으나 건물은 올라갔다. 냉혹한 부동산 개발업자의 진면목이다.
# 며칠 전 <중앙일보>에는 트럼프 소유의 ‘마라라고 리조트’에 관한 흥미로운 기사가 실렸다. 플로리다에 위치한 마라라고는 트럼프가 아베 신조 일본 총리,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정상회담을 연 곳이니 ‘제2의 백악관’이라고 할 수 있다. 기사를 보면, 마라라고는 원래 시리얼로 유명한 ‘포스트’ 집안의 소유였다. 플로리다에서 겨울 휴가를 즐기곤 했던 트럼프는 1985년 마라라고를 보자 홀딱 반했다. “보자마자 내 것으로 만들겠다고 생각했다”고 그는 자신의 책에 적어놓았다. 그는 포스트 가족에게 2500만 달러에 사겠다고 제안했으나 가족은 더 큰 금액을 요구했다. 트럼프는 협상 대신 협박을 선택했다. 30만 달러쯤 하는 마라라고 앞 해변을 거금 200만 달러에 사들였다. 그러고는 “바다 조망을 망칠 끔찍한 건물을 짓겠다”고 을러댔다. 결국 트럼프의 승리. 그는 단돈 800만 달러에 마라라고를 얻었다. 훗날 트럼프는 “내가 해변을 가졌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팔 수 없었고, 값은 계속 떨어졌다”고 무용담을 늘어놓았다. 알박기 전략의 성공이다.
리조트로 개발하는 데는 당연히 주민의 반대가 있었다. 그러나 트럼프는 5000억 달러짜리 소송부터 걸어놓고 지역 신문엔 “스티븐 스필버그, 헨리 키신저, 덴절 워싱턴,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회원권을 이미 샀고,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 왕세자비 부부도 가입서를 작성했다”는 기사를 내보냈다. 한편으로는 협박, 한편으로는 회유에 나선 것이다. 그러나 기사는 가짜였다. 가입서만 보내 놓고는 회원권을 산 것처럼 거짓말을 한 것이다. 그래도 결국 주민들은 두 손을 들었다.
# 주한미군이 26일 새벽을 틈타 기습적으로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 체계를 들여놓는 것을 보면서 트럼프의 부동산 매입 전략이 떠올랐다. 사드 배치는 맨해튼 10층짜리 건물에 100년짜리 장기 계약을 맺은 것과 비슷하다. 골프장 땅은 우리 것이지만 미군이 발을 들여놓았으니 쉬 쫓아낼 수가 없다. 불과 열흘 전 미 백악관 외교정책 참모가 사드 배치는 “한국의 다음 대통령이 결정할 사안”이라고 했던 것은 연막 작전이었나 보다. 트럼프는 맨해튼 건물에 100년짜리 임대 계약을 맺을 때도 아마 다른 사람의 이름을 빌려 건물주의 시선을 분산시켰을 것이다.
26일 오전 경북 성주군 성주골프장에 사드(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THAAD)가 전격 배치돼 있다. ‘대구일보’ 제공
중국 쪽에서 보자면 알박기다. 트럼프가 마라라고에서 “바다 조망을 망칠 끔찍한 건물을 짓겠다”고 을러댄 것처럼, 태평양으로 향하는 중국의 시야를 가려버렸다. 중국이 보유하고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은 무용지물이 될 가능성이 높다. 이제 협상 테이블에서 중국 쪽 요구는 헐값에 후려칠 수 있는 위치에 섰다.
트럼프 타워 주변의 건물을 야금야금 사들인 것처럼 미국은 중국과 북한 주변의 국가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아베는 신이 나서 한술 더 뜨고 있고, 김관진 안보실장은 대통령이 없는 청와대에서 대통령 흉내를 내고 있다. 브로맨스(남자들의 친밀한 관계)로 불릴 만큼 우호적관계인 푸틴 러시아 대통령도 동참할지 모른다. 그때쯤이면 트럼프는 마침내 자신의 패를 꺼내보일 것이다.
이 모든 게 관여(engagement)를 위한 최대의 압박(Maximum pressure)이라면 그래도 봐줄 만하다. 제재 끝에는 협상이 기다리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트럼프는 비용과 시간을 줄이기 위해 조각상을 부숴버린 사람이다. 참을성이 없어서가 아니라 자본의 논리에 충실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트럼프 뒤에는 항상 전쟁에 목말라하는 미국의 군산복합체가 버티고 서있다.
트럼프는 지금 미국의 대통령으로서가 아니라 부동산 개발업자로서의 면모가 더 두드러져 보인다. 노는 곳이 미국이 아니라 아시아 대륙이라는 게 다를 뿐이다. 트럼프 같은 사람을 만나서 이꼴저꼴 보기 싫으면 집을 싼값에라도 처분하고 훌쩍 이사를 가버리면 된다. 그러나 한반도를 이고 이사를 갈 수는 없다. 바싹 다가온 대통령 선거에서 제대로 된 대통령을 뽑아야 하는 이유가 더 절박해졌다.
김의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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