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전쯤 서른여덟 살 유시민이 낸 책 한 권으로 세상이 시끄러웠다. <97대선 게임의 법칙>이다. 거칠게 내용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비호남 유권자들이 지닌 ‘반 김대중 정서’ 때문에 김대중(DJ) 총재는 대통령이 되기 어렵다. DJ가 넘을 수 없는 ‘마의 벽’이 있다. 그러니 제3의 후보를 내세워야 한다.” 읽고 나서 마음이 불편했는데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는 DJ 말고 도대체 누가 있는가, 왜 가장 앞서 있는 대선 후보를 내팽개치려는 건가, 조순 서울시장을 제3의 후보로 생각하나 본데 대선 후보를 그리 뚝딱 만들어낼 수 있나 하는 의문이다. 둘째는 DJ에 대한 호남인들의 절절한 한에 냉정한 현실 논리를 들이댔기 때문이다. 감정선을 건드리면 아무리 옳은 말이라도 통하지 않는 법이다. 아마도 그때 적잖은 호남인들이 마음의 상처를 받은 듯하다. 유시민이 이후 정치 인생에서 과도하게 몰매를 맞은 건 이때 미운털이 단단히 박혔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며칠 전 전남의 한 단체장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큰일입니다. 문재인 이야기만 나오면 광주 전남의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대화가 안 됩니다. ‘문재인은 안 돼’라는 한마디에 더 이상 논의가 진행되지 않습니다.” 그와 통화를 하며 ‘문재인은 안 돼’라는 말이 20년 전 유시민이 말했던 ‘김대중으로는 안 돼’와 자꾸만 겹쳐 들렸다.
호남의 반 문재인 정서는 두 개의 기둥이 떠받치고 있는 모양새다. 하나가 ‘야당에서조차 호남이 홀대받고 있다’는 소외감이라면 다른 하나는 ‘문재인으로는 대선을 치를 수 없다’는 불가론이다. 후자에 대해서는 문재인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있다. 8일 광주에 내려가 “호남분들의 전폭적 지지를 밑거름 삼았던 제가, 여러분에게 한 번도 제대로 승리의 기쁨을 돌려드리지 못했습니다. 정권교체의 희망도 드리지 못했습니다”라며 호남이 지지를 거둔다면 정계에서 은퇴하겠다고 밝혔다. 여론조사 수치를 보면 현재 호남에서 국민의당 녹색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나 보다. 그 숫자가 투표 결과로 이어진다면 문재인의 퇴진은 현실화된다. 국민의당도 공격의 초점을 박근혜 대통령이 아닌 문재인에 맞추고 있다.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8일 오전 광주광역시 운정동 5·18국립민주묘지에서 김대중 전 통령의 삼남 홍걸씨와 함께 참배하고 있다. 광주/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그런데 정말 광주가 문재인을 버려도 되나 싶다. 정권교체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김대중 대통령도 얼마나 많은 패배를 겪었던가. 대선만 해도 1971년 87년 92년 세 번이나 떨어졌고, 총선에서 진 건 셀 수도 없다. 패배의 질이나 양 모든 측면에서 결코 문재인보다 가볍다고 할 수 없다. 9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둔 DJ의 앞날은 암울했다. 심지어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DJ가 출마할 경우 여당에서 누가 나가도 이길 수 있다고 보고 DJ가 고사되지 않도록 관리에 들어가기도 했다. DJ를 청와대로 불러 2시간 넘게 칼국수를 함께 하며 국정의 동반자로 인정하는 모양새를 취했다. 문재인은 그래도 각종 여론조사에서 여야를 통틀어 대선 후보 지지도 1위를 달리고 있다. 유시민이 과거 선거 통계치를 분석해 36.4%를 DJ가 넘긴 힘든 마의 벽으로 분석했던 것에 비하면 문재인 불가론은 너무 섣부르다.
그렇다고 국민의당 안철수 대표를 ‘대안’으로 생각하는 것 같지도 않다. 광주 호남에서 국민의당은 더불어민주당을 훨씬 앞서는데 대선 후보 지지도에서는 안 대표가 문재인 전 대표에 밀리고 있다. 심지어 국민의당 지도부도 ‘안철수 대통령’을 얘기하지 않고 있다. 김한길 의원은 광주 지원 유세를 돌며 “호남이 지지하지 않는 야권의 대권주자는 이제까지 있어본 적도 없고 있을 수도 없고 있어봐야 정권교체를 실현해 낼 수 없다”고 문재인을 겨냥하면서도 “광주와 호남이 한마음으로 지지할 수 있는 야권 대선후보를 키워 내년에 정권교체를 실현해 낼 것”이라고 말할 뿐이다. 심지어 권노갑 전 의원은 10일 전주에서 “정동영 후보야말로 호남권의 유일한 대통령 후보감”이라고 말했다.
그러니 문재인의 종아리를 치는 회초리에는 감정이 묻어 있다고 느껴진다. 호남이 그토록 밀어줬으면 고마운 줄을 알아야지 필요할 때만 표 달라고 손 벌리지 언제 한번 호남을 존중한 적이 있느냐는 서운함 말이다. 산이 높으면 골이 깊은 게 자연의 섭리다. 친구가 원수 되는 법이고, 살갑던 연인일수록 살벌한 복수극이 펼쳐진다. 이른바 근친증오(近親憎惡), 근린증오(近隣憎惡)다.
사도에서 영조 역을 맡았던 배우 송강호. 사진 흥미진진 제공
어쩌면 영조의 마음도 그렇지 않았을까? 영조는 자신이 무수리의 자식이라 업신여김을 받았지만 아들 사도세자만은 제왕의 기품을 지니기를 바랐다. 그러나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커지고 끝내 분노로 치달아 아들을 뒤주에 가두고 말았다. 그래도 영조는 총명한 세손이 있었기에 끝내 뒤주 문을 열어주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호남이 그만한 여유를 부릴 수 있는 처지인가 싶다. 내년 대선도 구도 면에서는 야당이 여당에 상대가 안 되는 게 현실이다. 지역, 세대, 이념 뭘 따져 봐도 불리하다. 그래도 인물들의 면면이 여당에 밀리지 않는다는 게 유일한 자산이다. 되도록 많은 후보들을 보유하고 서로 경쟁을 시켜 가장 높은 지지를 받는 후보를 키우는 게 활로다. 그런데 이래서 쳐내고 저래서 쳐내면 그마저도 다 까먹게 된다.
대선 후보 문재인이 소중해서 하는 말만은 아니다. 야당을 밀고 가는 두 바퀴는 호남과 민주화 세력이다. 문재인을 버려버리면 두 집단 사이에 금이 간다. 특히 영남에서 빨갱이 소리 들어가며 민주화 운동을 했던 이들의 심정을 헤아려보라. 잘 이해가 되지 않으면 처지를 바꿔서 20년 전 유시민에게 느꼈던 마음을 떠올려보면 된다. 그 문제가 문재인 한 사람을 폐기하느냐 여부보다 훨씬 크고 심각한 문제다. 뒤주에서 문재인을 꺼내야 하는 이유다.
김의겸 선임기자 kyummy@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