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25일 국회에서 열린 새누리당 최고위원 간담회에 참석하기 위해 서청원 최고위원이 입장하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토요판] 특집
‘박근혜 호위무사’ 된 친박 거두 3인방
최순실씨와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 등을 검찰이 구속하면서 청구한 영장에 기재된 모든 혐의의 중심인물은 박근혜 대통령입니다. 사기업에 대한 인사 개입까지도 대통령의 지시로 이뤄졌습니다. 대통령으로서의 권위와 자격을 상실했습니다. 자진 퇴진이든 탄핵을 통해서든 물러나라는 게 국민의 요구입니다. 그러나 대통령은 진정성 없는 3차례의 담화만 했을 뿐 시간만 끌고 있습니다. 대통령의 버티기는 집권여당인 새누리당이 그를 감싸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박 대통령을 맹목적으로 감싸고 있는 친박계 지도자 3명을 깊이있게 들여다봤습니다.
정진석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얼마 전 친박계의 좌장 격인 서청원 의원을 만났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대한 비박계의 반발로 당이 자칫 쪼개질 상황을 막기 위한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정 원내대표가 들고 간 카드는 이정현 대표 등 친박계 지도부가 퇴진해서 비상대책위원회 체제로 당을 전환시키자는 것이었다. 그가 제시한 비대위원장 카드는 비주류의 대표주자인 유승민 의원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에게 ‘배신의 정치’라는 낙인이 찍혀 내쫓겼던 유승민 의원은 여권에서 비대위원장으로 폭넓게 지지를 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서 의원은 유승민 카드를 거부했다. 유 의원이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을 추진할 가능성이 크다는 이유에서였다. 이처럼 서 의원은 친박 지도부 지키기의 중심에 있다. 서 의원이 최경환, 윤상현 의원 등 친박계 핵심 인사들과 서울시내 한 호텔에서 최근 자주 만나는 장면이 목격된 것은 한 사례에 불과하다. 여권 사정을 잘 아는 한 정치권 인사는 “지금 친박계가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전략을 짜서 실행할 수 있는 사람은 당에서는 서청원 의원밖에 없다”며 “서 의원이 중심”이라고 말했다. 야당 쪽에서도 서 의원을 중심인물로 지목하고 있다. 표창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달 30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탄핵에 반대하는 새누리당 의원 16명의 명단을 공개하면서 서 의원을 첫머리에 적었다.
서 의원과 함께 친박계의 움직임을 정밀하게 컨트롤하면서 박 대통령 방패막이 구실을 하는 이는 최경환 의원이다. 친박계 핵심인 최 의원은 윤상현, 조원진 의원 등과 수시로 만나서 대책을 논의하는 등 사건 초기부터 활발히 움직이고 있다. 그는 박 대통령과도 직접 통화하면서 조율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티케이 여론 되돌리려 안간힘
최 의원은 비박계 대오를 와해시키는 데도 힘을 쏟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새누리당 비주류 쪽 한 인사는 “최 의원이 최근 비박계 모임인 비상시국회의 공동대표인 김무성 의원에게 비대위원장을 제시하면서 친박계와 비박계가 개헌을 추진하자고 제안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 인사는 또 “최 의원이 비박계 의원들의 탄핵 동참을 막기 위해 친박 의원들을 내세워 여러 갈래로 압박하고 있다”고 말했다.
최 의원은 또 박 대통령의 정치적 기반인 티케이(대구·경북) 여론을 붙잡는 작업에도 열심이다. 그는 지난달 28일 새누리당 경북도당에서 열린 주요 당직자 간담회에 참석해 “여러 유언비어로 정치 지도자이자 인간으로서 무차별적인 모독과 조롱을 받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국정농단 의혹 제기를 유언비어라고 폄하하면서 박 대통령을 적극 두둔했다. 그는 “경북 당원들은 지난 대선 때 ‘80-80'(투표율 80% 이상, 득표율 80%)의 힘을 모아 대통령으로 만드는 데 혼신을 다했는데 이런 사태가 와서 모두가 안타깝고 황망하고 당혹스러운 마음을 금할 길 없을 것”이라며 “서로에게 삿대질해서는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 대구·경북 당원들이 힘을 모아달라”고 당부했다.
서청원 의원과 최경환 의원이 막후에서 움직이고 있다면 이정현 대표는 내놓고 박 대통령의 호위무사를 자처하고 있다. 그는 국정농단의 증거들이 불거져 나온 이후 “나도 대정부질문서를 쓸 때 친구들의 조언을 듣는다” “(대통령 탄핵에 대한 동참 행위는) 예수를 팔아먹은 유다”라는 등 박 대통령 옹호에 결사적이다. 그는 대표직에서 사퇴하라는 당 안팎의 강한 요구에도 꿈쩍 않고 있다.
이에 따라 당 지도부 교체로 ‘질서있는 수습’을 꿈꿨던 비박계가 오히려 혼선에 빠졌다. 남경필 경기도지사와 김용태 의원, 정두언·정태근 전 의원 등이 먼저 탈당하고, 남은 비상시국회의 구성원들은 갈수록 결속력이 약해지는 모양새다.
반면에 궁지에 몰렸던 박 대통령은 친박 거두 3인의 육탄 방어에 힘입어 기력을 되찾는 모습이다. 박 대통령은 지난달 29일 퇴진 시점이나 방법에 대한 명확한 언급 없이 “대통령직 임기 단축을 포함한 진퇴 문제를 국회의 결정에 맡기겠습니다”라며 공을 국회에 던졌다. 게다가 그는 “어떠한 개인적 이익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주변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것은 결국 저의 큰 잘못입니다”라며 검찰이 밝힌 범죄 혐의를 전면 부인했다.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가 지난달 28일 오전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생각에 잠겨 있다.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한때 동료 의원에게 인기 짱이었던 서청원
친박 거두 3인이 긴밀히 협의하고 있겠지만, 리더는 서청원 의원일 것으로 정치권에서는 보고 있다. 박 대통령의 3차 담화가 있기 전날인 지난달 28일 친박 중진 의원 8명(서청원·정갑윤·최경환·유기준·윤상현·정우택·홍문종·조원진)의 모임 모습은 서 의원의 역할을 잘 보여준다. 이 자리에서 대통령의 조기 퇴진 이야기는 서 의원이 가장 먼저 꺼냈다. 이어 허원제 청와대 정무수석에게 전화를 걸어서 의견 전달을 주도한 것도 서 의원이었다. 돌이켜보면 이날 친박 중진 모임은 이튿날 있을 대통령 담화의 자락을 미리 깐 자리였다. 박 대통령이 자신의 거취에 관해 국회에 공을 던지면서 더 버틸 수 있는 시간을 벌어준 절묘한 수였다. 3차 담화 내용이 지난달 25일에 이미 가다듬어졌다는 점에 비춰볼 때 청와대와 서 의원이 사전에 교감했을 가능성도 크다.
대통령의 조기 퇴진 가능성을 언급하기 전까지 서 의원은 박 대통령 및 친박 지도부 감싸기로 일관했다. 최순실의 태블릿피시가 공개된 초기 그는 친박계 이정현 대표의 사퇴를 요구하는 비박계 의원들에게 “전쟁하자는 것이냐”고 윽박질렀다. 친박계의 버티기에 실망해 탈당하려는 남경필 경기도지사 등에게는 심지어 “회유와 협박”을 했다고 남 지사가 밝힌 바 있다.
서 의원의 이러한 행보에 대해 정치권에서는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다. 서 의원을 오랫동안 지켜본 여권의 한 관계자는 “헌정질서를 파괴한 반헌법적이고 비민주적인 행위를 민주화 운동을 한 사람이 두둔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며 “서청원 의원이 저런 사람인 줄 몰랐다”고 말했다. 새누리당의 한 전직 의원도 “박근혜 대통령 다음으로 이번 사태에 책임있는 집단이 친박계 아니냐. 서 의원은 친박계의 원로 정치인인 만큼 당연히 책임을 통감하고 자성하는 태도를 보여야 한다. 당 지도부가 안 내려가겠다고 버티더라도 동반 퇴진을 촉구했어야 한다”며 “그러기는커녕 대통령을 옹호하고 친박 지도부를 방어하고 있으니 저질도 이런 저질 정치가 없다”고 말했다.
정치인 서청원은 한창때 동료 의원들한테 인기가 높았다. 성격이 직선적이고 급하긴 해도 의리를 중시하고 친화력이 강했다. 정치자금이 생기면 자기 주머니에 넣기보다는 동료들에게 많이 나눠줬다고 한다. 이런 점은 정치 스승인 와이에스(YS·김영삼)를 닮았다. 신한국당(새누리당 계열의 옛 여당) 대선 후보 경선을 앞둔 1997년 7월 서청원 의원이 며칠간 묵었던 국회 앞 맨하탄호텔 객실의 서랍에서 10만원권 수표로 1천만원이 든 돈봉투가 발견돼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서 의원 측이 바로 돈을 찾아갔는데 당시 경선에 대비한 정치자금의 일부였을 것으로 추측됐다.
서 의원이 1994년 김영삼 정부에서 정무1장관을 할 때였다. 당시 야당이 국무위원 전원에 대해 해임건의안을 냈다. 어차피 여당이 과반이어서 해임안이 가결될 가능성이 없어 장관들에 대한 의원들의 호감도 조사가 됐다. 그는 반대표를 가장 많이 받음으로써 야당 의원들 중에도 ‘숨은 친구’가 많음을 과시했다.
김영삼 만류에도 박근혜 지지한 사연
이런 그였으니 2007년 대선을 앞두고 한나라당(새누리당의 전신)에서 몸값이 치솟았던 것은 불문가지였다. 본선이나 마찬가지로 여겨졌던 한나라당 후보 경선을 앞둔 이명박 캠프와 박근혜 캠프에서는 그즈음 정치무대에 다시 나타난 서청원을 서로 끌어당기려고 애썼다. 서청원은 대선(2002년) 때 당 대표로서 이회창 후보를 위해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죄로 옥살이를 한 뒤 한동안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있었다. 2007년 여름 그는 의리론을 내세워 박근혜 캠프를 택했다. 2002년 대선자금 차떼기로 무너졌던 당을 박근혜가 대표를 맡아서 살렸기에 박근혜를 도우는 게 당원으로서의 의리라는 주장이었다. 당시 대선 캠프에서는 상임고문을 맡았다.
그가 친박계에서 확실하게 자리를 잡게 된 계기는 2008년 18대 총선이었다. 불법 정치자금 수수자라는 꼬리표가 있던 그는 애초 출마를 포기했다가 주류인 친이계가 친박계를 공천에서 대거 학살하자 격분했다. 이에 그는 특정인을 당명에 넣은 ‘친박연대’를 창당했다. 친박연대는 “살아서 돌아오라”는 박근혜의 노골적인 응원에 힘입어 14석(지역구 6석, 비례대표 8석)을 차지하는 돌풍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는 비례대표 공천 대가로 거액의 헌금을 받은 사실이 드러나 투옥됐으며 의원직도 상실했다. 또다시 긴 정치 방학에 들어갔으나, 박근혜와의 관계는 더 깊어졌다. 친박연대 소속 의원 14명은 친박계의 중요한 자산이 됐기 때문이다. 박근혜가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장 시절인 2011년 12월 서청원이 이끄는 전국 조직인 청산회의 송년모임에 보낸 메시지(“의리가 없으면 인간도 아니다”)는 두사람의 특수관계를 잘 보여준다. 앞서 서청원 역시 2010년 12월 의정부 교도소를 나올 때 “우정은 변치 않을 때 아름답다”며 박근혜를 향한 단심을 표현했다. 서청원은 2012년 대선 때는 친박 원로들의 모임인 7인회의 일원으로 활약했다.
두 사람의 ‘우정과 의리’는 박근혜 정권 출범 이후에 더 두터워졌다. 새누리당은 정치자금 불법 수수 등 4대 범죄자에 대해서는 공천하지 않겠다는 대국민 약속을 내팽개치고, 2013년 경기도 화성갑 보궐선거에 불법 정치자금으로 두번이나 투옥됐던 서청원을 후보로 내세웠다. 그는 이 선거에서 이긴 뒤 이듬해인 2014년 7·14 전당대회에서 친박계 대리인으로 당 대표에 도전했다. 비주류의 지원을 업은 김무성에게 졌지만, 친박계에서 서청원의 입지는 그만큼 넓어지고 높아졌다.
서청원의 정치적 성장은 와이에스가 이끄는 상도동계에서 이뤄졌다. <조선일보> 기자를 하다가 11대 총선(1981년) 때 관제야당인 민한당 소속으로 정계에 진출했지만, 12대 총선(1985년)에서 김대중·김영삼이 중심이 된 신민당 돌풍에 밀려 낙선한 뒤 정통 야당 쪽으로 옮겼다. 그는 양김씨가 만든 정치조직인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에 1985년에 참여해서 민주투사로 활약했다. 이후 김영삼의 통일민주당에서 대변인과 총재 비서실장 등을 맡으며 김영삼의 측근이 됐다. 1990년 김영삼의 3당 합당에 강하게 반대하기도 했으며, 합당 이후에도 민자당 안에서 민정계에 맞서 싸우는 데 선봉에 섰다. 김영삼 정권 때는 정무1장관과 신한국당(한나라당의 전신) 원내총무(현재의 원내대표) 등을 지냈다.
지난 5월3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새누리당 당선자 총회에서 최경환 의원이 투표를 마친 뒤 걸어가고 있다.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최경환, 이회창 외곽조직에서 첫발
서청원은 인연과 정을 중시하는 기분파 기질이 강했다. 이회창과의 대립과 화해는 대표적 사례다. 1997년 중반 이회창이 신한국당의 대선 후보로 유력해지자, 서청원은 ‘정치발전협의회’(정발협)를 만드는 등 반이회창 대열에 앞장섰다. 그가 반이회창이 된 결정적인 이유는 그해 초 신한국당의 새 대표가 된 이회창이 사무총장에 내정된 자신을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이회창으로서는 1996년 말 노동법 날치기의 주역(원내총무)이었던 서청원을 주요 당직에 기용하는 것이 부담스러웠을 터이나, 서청원은 자신을 거부한 이회창을 이해할 수도 용납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1998년에 복귀해 두번째 대선 도전에 나선 이회창은 2000년 16대 총선 때 서청원에게 선대본부장을 맡기면서 화해의 손을 내밀었다. 이에 서청원은 2002년 당 대표와 대통령선거대책위원장을 맡는 등 이회창 대통령 만들기에 앞장섰다.
2007년 친박계에 몸담게 된 내막 역시 서청원 스타일을 보여준다. 공식적으로는 당을 살린 데 대한 보답이라는 공적 의리론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인연을 중시하는 사적 의리가 주요하게 작용했다. 1998년 박근혜가 대구 달성 보궐선거로 정치입문할 때 공천장을 준 사람이 당시 사무총장이던 서청원이었다. 그때 서청원의 부인이 달성에 내려가 선거운동을 돕기도 했다. 박근혜 역시 서청원에게 꽤 공을 들였다. 2004년 서청원이 불법 대선자금 사건으로 감옥에 있을 때 면회를 갔으며, 석방됐을 때는 가장 먼저 자택으로 난 화분을 들고 찾아갔다. 이런 인연을 중시한 서청원은 당시 이명박을 도우라는 김영삼의 간곡한 요청도 거절한 채 박근혜 캠프로 갔다.
정치 경력이나 연륜 등에서 서청원이 친박계의 어른이라면, 최경환은 친박계를 실질적으로 움직이는 중심인물이다. 최경환은 서청원보다 친박계 입문도 훨씬 빠른 원조 친박이다. 최경환이 친박에 본격 가담한 것은 2005년 초부터였다. 박근혜가 2004년 노무현 탄핵 역풍을 만나 휘청거리던 한나라당의 대표를 맡아서 총선을 성공적으로 치른 뒤였다. 한나라당의 구세주가 됐던 박근혜는 2007년 대선을 꿈꾸면서 당 안팎의 인물을 끌어모았다. 이때 최경환은 경제전문가의 한명으로 안종범, 강석훈 등과 함께 박근혜의 비밀 ‘과외교사’를 했다.
최경환은 원래 이회창이 한나라당 대표 시절인 2000년쯤부터 정치권에 들어왔다. 경제기획원의 관료 출신인 그는 이회창이 2002년 대선 도전을 앞두고 만든 외곽 조직에서 안종범 등과 일했다. 당시 함께 일했던 여권 인사는 “주로 교수들로 구성된 정책팀이 2000년에 만들어져 여의도에 사무실을 두고 있었다. 어느 날 당시 성균관대 교수였던 안종범이 최경환을 데려왔다. 당시 최경환은 사무실에서 이것저것 심부름을 했다”고 말했다.
대선에서 패배한 이회창이 정계 은퇴를 한 뒤 최경환은 당 대표를 맡았던 최병렬의 지원을 받아서 2004년 고향인 경북 경산·청도의 한나라당 후보로 공천을 따냈다. 당시 사정을 잘 아는 한 인사는 “티케이 지역은 한나라당 공천이 곧 당선인데 지명도도 없던 무명의 최경환이 중앙에서 공천을 받아 내려와서 지역에서 놀랐다. 나중에 알아보니 경제기획원에서 같이 일했던 임태희가 당 대표인 최병렬에게 최경환을 추천해서 공천을 받았더라”고 말했다.
2007년 한나라당 당내 후보 경선 때 최경환은 박근혜 캠프에서 상황실장을 맡았다. 초선 의원으로서는 요직이었다. 당시 캠프에서 일했던 한 인사는 “2007년에는 박근혜를 돕는 현역 의원들이 몇명 안 됐다. 그래서 최경환이 상황실장을 맡게 됐다”고 말했다. 당시 캠프 총괄은 김무성이었으며, 서청원은 상임고문이었다. 이정현은 언론을 담당하는 공보특보를 했다.
최경환이 박근혜의 신임을 얻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였다. 업무 능력에 대한 평가는 “경제 전문가로서 실력이 떨어졌다. 관료 때도 한번도 요직에 있지 못했다”(2007년 캠프 동료)와 “오더가 떨어진 일에 대해서는 최선을 다해서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위에서 좋아할 만했다”(2007년 캠프 실무자)로 갈린다.
2015년 8월26일 박근혜 대통령이 새누리당 지도부를 초청한 청와대 오찬 모임에서 서청원 최고위원(왼쪽)이 최경환 당시 경제부총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포스트 박근혜’ 꿈꾸기도
하지만 당시 최경환이 상당히 기여했다고 모두가 인정하는 부분이 있다. 바로 자금이다. 당시 캠프에서 일했던 한 인사는 “최경환은 캠프 실무자들에게 별도의 활동비를 지급했다. 당시 이정현이 사용하는 공보비의 대부분도 전부 최경환이 줬다. 비용의 출처를 알 수는 없었지만 씀씀이가 컸다”고 말했다. 특히 최경환은 박근혜의 의원실 보좌진이었던 4인방(2012년 대선 직전에 교통사고로 사망한 이춘상 포함)을 이때부터 ‘관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위의 인사는 “안봉근은 최경환과 고향이 같아서 아주 친했다. 안봉근을 포함해서 4인방한테 최경환이 매달 용돈을 준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최경환은 경북 경산시 신천동의 농가에서 3남3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막내아들에게 농사일을 물려주려고 했다. 집안에 물려받을 만한 재산이 거의 없었다. 그가 재력을 갖춘 것은 부잣집 딸에게 장가를 들면서였다. 대구에서 기업체를 운영했던 그의 장인은 당시 대구에서 소문난 재력가였다.
4인방과의 친분은 최경환이 급속하게 박근혜와 가깝게 되는 데 주요한 요인이 됐다. 2007년 경선에서 박근혜가 이명박에게 진 뒤에도 최경환은 친박 인사로는 거의 유일하게 이명박 정부의 장관(지식경제부) 자리에 발탁됐다. 박근혜는 친박계 의원들이 당직이나 정부직에 들어가는 것을 극구 말렸지만, 최경환에 대해서는 입각을 허락했다. 당시 친박계 내부에서는 4인방이 최경환에 대한 호의적인 평가를 박근혜에게 끊임없이 주입한 결과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는 2012년 대선 때는 선거대책본부 총괄본부장이라는 요직 중의 요직을 맡았다. 사실상 대선을 총지휘하는 자리였다. 박근혜 후보 지지율의 급격한 하락과 선대위 조직의 무기력 등이 겹치면서 중도에 하차하기는 했지만, 그에 대한 박근혜의 총애는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박근혜 정부 출범 직후인 2013년 5월 집권여당의 원내대표에 올랐으며, 2014년 7월에는 정부의 경제사령탑(기획재정부 장관)을 맡았다. 원조 친박계 의원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승승장구해 왔다. 김무성, 유승민, 이혜훈 등이 2007년 대선을 거친 뒤에 박근혜와 멀어졌던 것과 대조적이다. 새누리당의 한 중진의원은 “최경환은 어느 순간부터 포스트 박근혜를 노렸다. 2017년 대선에 나설 꿈까지 꾸고 있었다. 윤상현 등이 이를 기획했다고 한다. 이를 위해 자금도 꽤 많이 모았다는 소문이 파다하다”고 말했다.
서청원, 최경환이 상층에서부터 시작한 친박이었던 데 비해 이정현은 밑바닥에서부터 올라간 자수성가형 친박이다. 당 사무처 출신의 이정현이 박근혜와 인연을 맺은 것은 2004년 17대 총선 때였다. 그는 당시 광주(서구을)에 출마한 유일한 한나라당 후보였다. 당시 당 대표였던 박근혜는 이정현에게 격려 전화를 두차례 하고는 선거 뒤 위로하는 점심 자리를 마련했다. 이때 ‘한나라당이 호남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열변을 토하는 이정현에게 박근혜는 “어쩌면 말을 그렇게 잘하세요”라며 호감을 표시했다. 그 직후 박근혜는 이정현을 수석부대변인에 발탁했다.
그는 2007년 후보 경선 때까지만 해도 친박계에서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캠프의 공보특보라는 직책을 맡기는 했지만, 여러 명 중의 한 실무자 정도의 위치였다. 그가 ‘박근혜의 복심’이 된 것은 경선에서 패배한 뒤부터였다. 이명박 쪽에서 당 선대위 홍보부본부장을 제의했지만, 그는 박근혜에 대한 충성을 이유로 거절했다. 경기도 정무부지사 제의도 마찬가지 이유로 사양했다. 당시 “왜 안 갔느냐”는 박근혜의 물음에 이정현은 “대표님(박근혜)을 모시고 정치를 하면서부터는 한나라당이라고 써진 파란 점퍼를 입고 서울 시내를 활보했습니다. 제가 이렇게 당당하고 이렇게 떳떳하고 이렇게 행복한 정치를 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대표님이 저한테 다른 데로 가라고 하시면, 저는 깨끗이 정치판을 떠나겠습니다”라고 답했다. 그의 충성심을 확인한 박근혜는 “제가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박근혜는 친박계가 대거 학살을 당했던 2008년 18대 총선 공천 때 친박계 인사로는 유일하게 이정현을 챙겼다. 이정현은 이 덕분에 비례대표로 꿈에 그리던 금배지를 달았다. 친박계의 한 의원은 “이정현은 친박계의 이너서클에 든 적이 한번도 없다. 그는 충성심 하나로 오늘의 자리에 올랐다”고 말했다. 친박계 3인은 왜 도도한 물결을 거스르는 걸까. 새누리당의 한 전직 의원은 “박근혜 대통령 구하기라기보다는 결국 자기들 이해관계가 걸렸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들을 포함한 친박계 핵심들은 정권이 끝나는 순간 검찰에 불려나갈 일들이 많다”고 했다. 이들의 각종 이권 개입 의혹과 로비 활동에 관한 첩보가 여의도 국회 주변에는 나돈 지 오래됐다.
지난 10월17일 오후 국회에서 ‘송민순 회고록 논란’과 관련해 중진의원 간담회를 열기 위해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왼쪽)가 서청원 의원과 함께 걸어가고 있다.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예전의 서청원이 아니다”
당장 최경환 의원은 자신의 인턴 출신 황아무개씨를 중소기업진흥공단에 2013년 특혜 채용하도록 외압을 행사한 혐의로 검찰에 소환될 처지에 있다. 그가 경제부총리 시절에 이뤄진 검찰 수사에서는 근거가 없다며 무혐의 처분을 받았지만, 최근 박철규 당시 중소기업진흥공단 이사장이 재판에서 최 의원의 외압이 있었다고 진술을 번복함에 따라 검찰이 재수사를 벌이고 있다.
최 의원은 또 롯데와 에스케이의 면세점 재허가 과정에도 개입됐다는 의혹이 불거져 나오고 있다. 이에 앞서 <아시아투데이>는 지난 7월 “롯데그룹 신동빈 회장 측이 최경환 의원에게 지난해 말부터 올해 초 사이에 50억원의 금품을 건넨 사실을 검찰이 확인하고 수사를 진행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최 의원은 즉각 사실무근이라며 <아시아투데이>에 대해 5억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지만, 아직 의혹이 깨끗이 해소되지는 않았다. 이와 관련해 미르재단과 케이스포츠재단 의혹을 수사중인 검찰 특별수사본부(본부장 이영렬 서울중앙지검장)가 최근 롯데그룹 비리를 수사했던 서울중앙지검 특수4부로부터 롯데면세점 등과 관련된 수사 자료 일부를 최근 넘겨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서청원 의원과 관련해서도 주변 인사들이 지나치게 설치고 있다는 등의 소문이 여의도 주변에 무성하다. 새누리당의 수도권 한 중진인사는 “예전의 서청원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서 의원은 2008년 국회의원 재산등록 때 전 재산이 1억400여만원에 불과해 국회의원 중 꼴찌를 기록했다. 그의 올해 초 공개 재산은 지난해보다 9800여만원이 증가한 5억2040만원이었다. 서 의원은 현 정부 들어 아들의 국무총리실 특혜 채용 의혹으로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그의 아들 동익씨는 2013년 4월 공개채용 공고도 없이 시민사회 비서관실의 4급 서기관으로 채용됐다.
이정현 대표는 개인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다는 얘기는 그다지 없다. 수도권의 여권 중진은 “이 대표는 그의 신앙적으로 박 대통령을 보호하려는 것 같다”고 말했다.
친박계 3인의 뒷받침과 버티기로 친박 지도부는 아직까지 ‘성공적’으로 유지되고 있다. 박 대통령도 겨우 조기 퇴진할 가능성을 열어놓기는 했지만, 민심의 반전을 꾀하면서 시간을 끌고 있다. 하지만 탄핵 및 퇴진 여론은 식기는커녕 더욱 높아지고 있고, 국정 혼돈은 끝이 안 보이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친박계의 이런 막무가내식 대응은 사실 새누리당의 전통과도 어긋나는 방식이다. 새누리당은 과거 정치적 위기가 닥칠 때마다 기민하게 민심에 부응하는 조처를 취했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으로 역풍을 만났을 때나 2011년 디도스 사태 등으로 당 지지율이 추락했을 때가 대표적이다. 당 지도부부터 전면적으로 교체하고, 천막당사 퍼포먼스 등 쇄신작업을 벌였다. 두번 다 쇄신의 기수는 박근혜 대통령이었다는 점이 공교롭긴 해도, 과거 보수정당은 민심의 요구에 늘 민감했다. 새누리당을 탈당한 한 전직 의원은 “이런 식으로 가면 새누리당은 쓰나미에 쓸려 갈 것이다. 역사에서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가 지난 9월5일 국회 본회의에서 교섭단체 대표연설을 하기에 앞서 최경환 의원을 만나 웃고 있다. 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