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 순방 일정을 마친 윤석열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가 15일 인도네시아 발리 응우라라이 국제공항에서 공군 1호기에 탑승, 손을 흔들고 있다. 연합뉴스
“다른 나라 정상들은 이익외교에 혈안인데, 윤석열 대통령 홀로 가치외교의 깃발을 흔들고 나선 모양새다.”
“대한민국 정부의 인도·태평양 전략이라…. 대한민국 외교인지 미국·일본 외교인지 헷갈릴 지경이다. 국적 없는 외교는 외교가 아니다.”
통일외교안보 분야 국무위원을 지낸 한 전직 장관과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이 16일 <한겨레>에 내놓은 윤석열 대통령의 이번 순방 외교 총평이다.
윤 대통령은 지난 11~15일 아세안 관계 정상회의(캄보디아 프놈펜)와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인도네시아 발리) 계기에 미국(13일)·일본(13일)·중국(15일) 정상과 양자 정상회담을 했다.
특히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지난 9월 유엔 총회 계기 ‘짧은 만남’에 이어 이번에 50분간 정식 대면 회담을 하고,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도 25분간 첫 대면 회담을 했다. 한·일, 한·중 모두 코로나 팬데믹 와중에 끊겼던 양자 정상외교의 물꼬를 2년11개월 만에 텄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가장 최근의 한-일 정상회담은 2019년 12월24일 ‘문재인-아베 회담’(중국 청두), 한-중 정상회담은 2019년 12월23일 ‘문재인-시진핑 회담’(중국 베이징)이다.
그러나 내용으로 들어가면 우려할 대목이 적지 않다. 윤 대통령이 11일 처음으로 공개 발표한 ‘한국판 인도·태평양전략’(인·태전략)과 13일 채택한 사상 첫 한·미·일 정상 공동성명인 “인도·태평양 한·미·일 3국 파트너십에 대한 프놈펜 성명”이 특히 그렇다.
한국판 인·태전략과 3국 프놈펜 성명은 이번 순방 외교에서 드러난 ‘윤석열표 외교’의 알짬이다. 실제 김성한 대통령실 국가안보실장은 16일 ‘독자적인 인·태전략’ 발표를 지난 순방의 1순위 성과로, 3국 정상 성명 채택을 4순위 성과로 꼽고 “우리 외교의 중요한 이정표가 세워졌다”고 자평했다.
문제는 ‘대한민국 외교의 미국화’ ‘미국의 언어로 쓰인 외교 문서’라는 비판적 꼬리표가 따라붙었다는 사실이다. 3국 정상 성명에 나온 “자유롭고 개방되고, 포용적이며, 회복력 있으며, 안전한 인도-태평양 지역”이라는 문구는 미국식 인·태전략의 핵심 모토다. 윤 대통령의 인·태전략은 중국 봉쇄·견제 목적으로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가 제안하고 미국의 트럼프·바이든 행정부가 구체화한 인·태전략과 이름부터 같다. 무엇보다 3국 정상 성명은 미국을 정점으로 한·미·일 3국의 위계가 분명한 인·태전략 실행 과정에서 “공동의 노력을 조율”하고 “연대하자”는 공개 선언이다.
더구나 3국 정상 프놈펜 성명은 “불법 해양 권익 주장과 매립지역 군사화 강력한 반대”를 하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 전쟁 반대”와 “러시아의 강압과 위협 규탄”을 명시해 중·러를 정면으로 겨냥하고 있다.
3국 정상의 “한·미·일 경제안보대화 신설” 합의도 미-중 패권·전략 경쟁과 공급망 재편 과정에서 미국 중심으로 뭉치겠다는 공개 선언이다. 이는 대륙과 해양이 만나는 결절점으로서 한반도의 지정·지경학적 처지와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등을 염두에 두고 미·일과 중·러 사이에서 자율 공간을 넓히려 했던 문재인 정부의 ‘균형외교’를 폐기한 것이다. 1988년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 이후 여러 차례의 진보-보수 정권 교체에도 ‘북방·대륙으로 가는 길’을 넓히려 애써온 역대 정부의 대외전략으로부터 이탈인 셈이다.
13일(현지시각) 캄보디아 프놈펜 한 호텔에서 열린 한미일 정상회담에서 윤석열 대통령(왼쪽부터),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윤 대통령의 이러한 외교적 지향은 미·중·일 정상과의 양자 회담에서도 뚜렷하게 드러난다. ‘밀착하는 한·미·일, 위태로운 한·중’ 구도다.
우선 회담 시간 배분에서 차이가 확연하다. 윤 대통령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50분,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45분 회담을 했는데, 시진핑 주석과는 그 절반인 25분간 회담을 했다. 차별적인 시간 배분은 논의 내용으로 들어가면 온도차가 더 크다.
예컨대 윤 대통령의 대표적 통일·대북정책인 ‘담대한 구상’에 대한 미·일과 중국 정상의 반응이 확연히 갈린다. 미·일 정상은 3국 성명을 통해 “‘담대한 구상’의 목표에 대한 지지”를 분명히 했다. 반면 시 주석은 “북한의 의향이 관건”이라며 “북한이 호응해 온다면”이라는 단서를 달아 “지지·협력” 의사를 밝혔다.
그런데 북한은 이미 ‘담대한 구상’에 대해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 담화에서 “이명박 역도가 내들었다가 동족 대결의 산물로 버림받은 ‘비핵·개방·3000’의 복사판”이라며 “절대로 상대해 주지 않을 것”이라고 공개 거부한 터다. 이런 사정을 모를 리 없는 시 주석의 언급은 ‘담대한 구상’에 대한 지지로 여기기 어렵다. 이에 대해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북이 받아들이는 순간 중국이 전폭적으로 힘을 보태겠다는 긍정적인 메시지로 읽었다”고 말했다.
윤 대통령은 ‘북핵’ 문제 등과 관련해 협상틀 마련보다 대북 압박 국제공조 기반을 넓히는 데 더 공을 들였다. 바이든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북한의 ‘핵 사용’에 “모든 가용한 수단을 활용해 압도적 힘으로 대응”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것이나, 시 주석한테 “더욱 적극적이고 건설적인 역할”을 주문한 게 대표적이다. 그런데 시 주석은 “한국이 남북관계를 적극적으로 개선해나가기를 희망한다”며 다른 접근법을 권했다.
무엇보다 시 주석은 “양자 간 자유무역협정 협상을 가속화하자. 경제협력을 정치화하고 범안전(안보)화하는 것에 반대해야 한다”며 “진정한 다자주의를 함께 실천하자”고 말했다. “진정한 다자주의”는 미국의 오커스·쿼드 등 소다자주의와 인·태전략을 비판할 때 중국이 즐겨 쓰는 개념이다. 윤 대통령의 인·태전략과 한·미·일 3국 경제안보대화 신설에 반대한다는 얘기다. 앞으로 한-중 관계에 우여곡절이 불가피해 보이는 대목이다.
동북아에서 한·미·일 3국의 밀착과 흔들리는 한-중 관계, 중대 고빗길에 들어선 듯한 한-러 관계는 한국엔 절대 과제인 대화와 협상을 통한 ‘북핵 문제’ 해결과 항구적 평화체제 건설 노력에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한 외교안보 분야 원로는 “동북아에서 갈라치기 외교, 진영외교가 득세하는 분위기인데 그럴수록 남북관계를 포함한 한반도 정세 관리가 어려워지고 한국 외교의 공간은 비좁아질 수밖에 없다”고 우려했다. 전직 정부 고위 관계자는 “우크라이나 사태 이후 러시아와의 무역이 한국은 17% 줄었는데 일본은 오히려 13% 늘었다”며 “가치외교라는 말에 현혹되지 말고 이익외교의 실상을 봐야 한다”고 당부했다.
하지만 윤 대통령은 귀국 전용기 안에서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자유와 연대의 정신”을 거듭 강조했다. 가치외교로 포장된 사실상의 ‘편가르기, 진영외교’를 더욱 강화하겠다는 뜻이다.
이제훈 선임기자
nomad@hani.co.kr 김미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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