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2022년 마지막 날과 새해 첫날 각각 초대형 방사포 3발과 1발을 발사했다고 밝혔다. 사진은 방사포 발사 장면.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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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한 지도부의 말이 갈수록 거칠어지고 있다. 서로를 가리켜 ‘주적’이라는 표현을 서슴지 않고 있고, ‘전쟁 준비’, 심지어 ‘종말’이라는 말도 주저하지 않고 있다. 말뿐만이 아니다. 작년 한해 역대급 미사일 발사에 나섰던 북한은 올해 국방력 건설의 기조로 ‘전술핵무기의 다량생산’과 ‘핵탄두 보유량의 기하급수적 증산’을 제시하고 있다. 남한도 향후 5년간 무려 331조원을 투입해 대규모 군비 증강에 나서겠다고 한다. 2018년에 남북한 정상들이 만나 부전(不戰)과 불가침, 그리고 단계적 군축 추진에 합의했던 것이 아득한 옛일로 느껴질 정도다.
예정된 일정만 보더라도 8천만 주민들의 삶의 터전인 한반도가 심각한 위기로 빠져들 것이라는 걱정이 지나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장 올해 전반기부터 걱정이다. 이미 연합훈련 강화와 확대에 나선 한·미는 상반기에만도 과거 독수리 연습에 준하는 야외기동훈련을 20여 차례나 실시할 계획이다. 과거에 독수리 훈련은 한국군과 미군 등 30만명 안팎이 참여하는 세계 최대 규모의 군사훈련이었다. 올해도 이 정도 규모가 될지는 불분명하지만, 전면전을 상정한 전구급 훈련이 될 가능성은 높다. 또 한·미는 연합훈련에 북한의 핵사용 시나리오에 대한 대비도 포함하기로 했는데, 이는 미국의 전략자산 전개 규모와 빈도가 커질 것이라는 점을 의미한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지난해 12월31일 초대형 방사포 증정식에 참석해 박수 치고 있다. 연합뉴스
북한의 군사적 맞대응 가능성이 높다는 점도 걱정거리다. 북한이 한-미 연합훈련에 반발해온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작년 가을을 거치면서 그 양상이 크게 달라졌다. 이전에는 외교적 비난과 중단 요구에 방점을 찍었다면, 작년 가을부터는 한·미, 혹은 한·미·일의 군사 활동에 대해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의 군사적 맞대응에 집중하고 있다.
‘전환점’은 북한이 지난해 9월8일 최고인민회의 법령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핵무력정책에 대하여’를 채택한 것이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이를 통해 “미제가 일방적으로 핵위협을 가해오던 시대를 끝장냈다”고 말했는데, 여기에는 핵무력 건설과 법제화를 통해 ‘힘의 균형’을 이뤄냈다는 자신감이 깔려 있다. 작년 11월에 북한 외무성은 한-미 연합훈련을 거듭 비난하면서 “끝까지 초강력 대응으로 대답할 것임을 다시 한번 명백히 천명”했는데, 전반기에 찾아올 한반도 위기의 예고편을 보는 것 같아 매우 우려스럽다.
과거에도 전쟁 위기는 여러 차례 있었다. 하지만 위기의 끝이 보이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오늘날의 위기는 그 끝을 알 수 없다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과거에 대결이 대화로, 위기가 기회로 반전된 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작용하곤 했다. 우선 북한이 벼랑 끝 전술로 한반도 위기를 고조시킨 이면에는 한·미를 압박해 대화의 장으로 나오도록 하겠다는 의도가 깔려 있는 경우가 많았다. 때때로 미국도 이런 선택을 하곤 했다.
양측의 셈법이 극적인 화학작용을 일으킨 때가 바로 2017~2018년의 ‘반전 드라마’였다.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은 2017년 내내 같은 하늘 아래에선 도저히 같이 살 수 없을 것처럼 말폭탄과 무력시위를 주고받았다. 이랬던 두 지도자는 2018년에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낯 뜨거울 정도의 우정을 과시했다. 하지만 2019년 2월과 6월 두 차례의 만남을 통해 미국의 각본에 놀아났다고 판단한 김 위원장은 2020년 들어 “새로운 길”로 발길을 돌렸다. 북-미 관계와 남북관계에 대한 미련을 접고, 안보는 핵으로, 경제는 자력갱생으로, 외교는 중국·러시아 중심으로 삼겠다고 결심하곤, 3년째 그 길을 고집하고 있다. 이게 가장 중요하다. 과거의 북핵이 외교적 수단의 속성도 품고 있었다면, 현재와 미래의 북핵은 그 자체가 목적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11월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에 대응해 F-35 전투기가 한-미 연합공군 훈련의 하나로 상공을 비행하고 있다. UPI 연합뉴스
한반도 위기가 과거와 달라지고 있는 양상은 ‘갈등의 중재자’마저 마땅치 않다는 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일촉즉발의 위기로 치닫던 1994년 전쟁 위기 때에는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중재자로 나선 바 있다. 김정일 정권과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날카롭게 대립했던 2000년대 초반에는 한국의 김대중·노무현 정부와 중국 정부가 위기관리 및 북-미 대화 중재에 힘썼다. 2010년 11월 북한의 연평도 포격으로 촉발된 남북한의 전쟁 위기 국면에선 미국이 한국을, 중국이 북한을 자제시키는 역할을 했다. 2017년 하반기부터 2018년 초까지 있었던 김정은과 트럼프의 벼랑 끝 대결 국면에서는 문재인 정부가 갈등 중재와 대화 촉진자로 나섰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양상이 크게 달라졌다. 북한이 대화에 흥미를 잃은 만큼, 한·미를 상대로 대화에 나서달라고 말하는 것부터가 힘이 크게 떨어졌다. 김 위원장과 만났던 문재인·트럼프 전 대통령에게 모종의 역할을 기대하는 것도 난망하다. 김 위원장이 이들 전직 대통령에게 큰 실망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한·미 모두 정치적 양극화가 갈수록 심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한·미·일과 북·중·러도 짝을 지어 상대를 향해 삿대질하기에 바쁘다. 남남갈등-남북갈등-국제갈등이 중첩되면서 한반도 정세의 돌파구를 만드는 게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는 셈이다.
한반도 위기가 남북관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는 것도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 과거 전쟁 위기는 주로 북-미 관계에서 비롯되었다. 미국의 북폭론과 북한의 전쟁 불사론이 맞섰던 1994년 상반기, 미국 부시 행정부의 대북 강경책과 북한 김정일 정권의 핵개발 시도가 충돌한 2003년, 그리고 2017년 위기가 대표적이다.
지난해 12월27일 한 시민이 서울역 대합실에서 북한 무인기의 영공 침범 뉴스를 보고 있다. 연합뉴스
하지만 2020년부터 갈등의 중심축은 남북관계로 옮겨붙었다. 2022년 5월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면서 그 추세는 더욱 빨라지고 있다. 김정은 정권은 전술핵을 앞세워 남한을 노골적으로 위협하고 있고, 윤석열 정부는 어떤 방식으로든 핵을 공유하자고 미국에 간청하고 있다. 한국전쟁 이래 처음으로 미사일이 양측 공해상으로 떨어지고, 무인기가 비무장지대를 오가는 일도 있었다. 급기야 윤 대통령은 “북한이 다시 우리 영토를 침범하는 도발을 일으키면 9·19 군사합의 효력 정지를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그나마 우발적 충돌과 확전 방지의 역할을 해온 안전핀마저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최근 더욱 격화되고 있는 한-미 동맹 대 북한 사이의 ‘강 대 강’ 대결 국면은 숱한 항의성 질문을 떠올리게 한다. 상대방을 악마화하고 군사력을 과시하는 것으로 과연 평화를 지킬 수 있는가? 혹시 전쟁을 막으려는 언행이 전쟁 위험을 키우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한·미가 “정상화”라는 이름하에 강화하고 있는 연합훈련과 군비 증강이 과연 한반도의 안보를 ‘안정화’시키고 있는가? 북한의 도발적인 언행은 스스로 표방해온 ‘인민대중제일주의’와 어울리는 짝인가? 상대방의 공격 징후가 포착되면 선제공격에 나설 수 있다고 하는데, 인간의 오판이나 기계의 오작동 가능성은 생각해봤는가? 북한은 한·미의 비핵 공격 때에도 전술핵을 쓸 수 있다고 하는데, 이게 어떤 결과를 초래할 것인지는 알고 있는가? 한·미는 북한이 전술핵을 써도 김정은 정권을 끝장낼 수 있는 “압도적 대응”에 나서겠다고 하는데, 그 과정과 이후에 겪게 될 한반도 주민들의 피해에 대해서는 생각해봤는가? 전쟁이 났을 때 무고한 사람들이 입게 될 가공할 피해는 누가, 어떻게 보상해줄 수 있는가? 쌍방 간에 제대로 된 소통 채널도 없는 상태에서 남·북·미는 위기 상황을 안정적으로 관리할 의지와 능력을 가지고 있는가?
당연한 말이지만, 국가의 가장 기본적인 책무는 국민의 안전과 생명을 지키는 데에 있다. 그런데 남·북한 정부가 경쟁적으로 ‘전쟁 불사론’을 외치고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남·북한 지도자 모두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준비하라”는 격언을 신조처럼 떠받들면서 상대방에 대한 적개심을 부추기고 이를 국내 정치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지금부터라도 달라져야 한다. ‘네가 나를 건들면, 너를 끝장내버리겠다’는 철부지의 호기를 접고 자칫 전쟁이 터질 수도 있는 위기의 징후가 차곡차곡 쌓이고 있는 현실부터 직시해야 한다. 위기를 지금부터 하나하나 관리하고 예방하지 않으면, 자칫 대재앙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경고를 귀담아들어야 한다. 한반도 정세가 작은 불씨 하나가 큰불을 일으킬 수 있을 만큼 메말라 있는 현실임을 유념해야 한다. 상대에게 더 큰 두려움을 주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는 ‘치킨 게임’을 중단하고 작은 양보 하나가 큰 결실을 맺을 수 있는 디딤돌이 될 수 있다는 지혜가 절실한 시점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시선을 돌려보면 남·북한 정부가 힘써야 할 대목은 차고 넘친다. 남·북한 당국이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민생고가 대표적이다. 그런데 민생고는 한반도 위기와 별개가 아니다. 남·북한이 전쟁 준비에 탕진하는 소중한 자원을 민생고 해결에 사용한다면, 한반도 주민들이 지금보다는 더 나은 삶을 영유할 수 있기에 하는 말이다.
지난해 12월27일 경기도 파주시 임진각에 디엠제트(DMZ) 평화관광 중단 안내문이 붙어 있다. 연합뉴스
기후위기는 어떤가? 이 위기는 국경을 가리지 않는 지구촌 전체의 문제이지만, 한반도는 기후변화에 가장 취약한 지역 가운데 하나이다. 그런데 기후위기도 군사 활동과 결코 무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한반도는 세계에서 군사 활동이 가장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는 지역 가운데 하나다. 하여 남·북한 지도자는 각종 무기가 동원되는 군사훈련을 보면서 흐뭇해할 것이 아니라 이들 무기와 장비가 내뿜는 탄소가 우리의 미래를 더욱 어둡게 만들고 있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새해부터 걱정만 늘어놓은 것 같아 독자에게 송구스러운 마음이다. 평화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한다. 그 길을 향해 힘과 지혜를 모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새해 인사를 올린다.
정욱식 한겨레평화연구소장
고려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북한대학원대학교에서 군사안보를 전공했다. 조지워싱턴대 방문학자로 한-미 동맹과 북핵 문제를 연구했다. 1999년 평화네트워크를 설립해 대표를 맡고 있다. <핵과 인간>, <한반도 평화, 새로운 시작을 위한 조건> 등 다수의 책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