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2일 부산 해군작전기지에서 미국 해군의 핵추진 순항미사일 잠수함(SSGN) ‘미시간함’이 출항하고 있다. 지난 16일 부산에 입항한 미시간함은 한국 해군과 연합 특수전 훈련을 한 것으로 전해졌다. 연합뉴스
☞한겨레S 뉴스레터를 구독해주세요. 검색창에 ‘에스레터’를 쳐보세요.
올해로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해 이른바 ‘북핵 문제’가 본격적으로 대두된 지 30년이 흘렀다. 한반도 비핵화를 위해 협상과 제재를 포함한 다양한 시도들이 있었지만, 현재까지는 모두 실패했다. 그리고 이제는 누구든 비핵화를 입에 올리면 ‘순진하다’는 핀잔을 듣기 일쑤다. 그도 그럴 것이 북한은 핵무력을 ‘국체’로 삼아 고도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고, 한국·미국 등의 실질적인 태도도 비핵화에서 북핵 대응으로 이동하고 있다. 한반도 핵문제의 ‘상수’인 미국 핵전력도 적어도 한반도 안팎에선 그 몸집을 키우고 있다.
비핵화 실현이 거의 불가능해진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혹자들은 미국의 핵무기를 한국에 재배치하거나 한국이 독자적 핵무장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선택은 칼자루가 아니라 칼날을 손에 쥐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자위적 조처가 아니라 자해적 조처가 될 공산이 크다는 뜻이다. 비핵화 프레임을 깨야 한다고, 되지도 않을 비핵화에 매달리지 말고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과 남북 교류와 경협 활성화에 힘써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취지는 이해하지만 이것이 한반도 핵문제 해결의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동의할 수 없다. 핵문제 해결을 포기하는 순간, 평화체제 구축과 남북 관계 회복·발전도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럼 대안은 무엇일까? 이제는 돌아보고, 멀리 보고, 깊게 보고, 넓게 봐야 할 시기라는 인식에서부터 출발할 필요가 있다. ‘돌아보자’는 취지는 왜 한반도 비핵화가 번번이 실패했는지 차분하게 짚어보자는 것이다. ‘멀리 보자’는 제안은 단기간에 핵문제 해결이 불가능해진 만큼, 긴 호흡과 시야를 가지고 해법을 찾아보자는 것이다. ‘깊게 보자’는 것은 한반도 핵문제의 뿌리를 제대로 보자는 것이고, ‘넓게 보자’는 말은 왜 세계의 절반은 핵무기가 없는 지대가 되었는지 살펴보면서 한반도 핵문제 해법을 위한 교훈을 추출하자는 것이다.
이들 네 가지 시선을 관통하고 있는 접근법이 바로 ‘비핵무기 지대’(비핵지대)다. 비핵화 협상이 실패한 원인 가운데 하나는 비핵화를 하기로 합의해 놓고선 정작 비핵화가 무엇인지 합의가 없었다는 데 있었다. 또 한반도 핵문제를 비핵지대 방식으로 풀자는 제안은 아직까진 생소하다는 점에서 장기적인 접근이 요구된다. 아울러 비핵지대 방식은 북핵 해결뿐만 아니라 미국 등 핵보유국들의 핵 위협 해결 방안도 담고 있고, 이미 비핵지대가 된 다른 지역의 사례도 참고할 수 있다.
이미 나는 2020년에 펴낸 <한반도의 길, 왜 비핵지대인가?>에서 상세한 내용과 제안을 담은 바 있다. 핵심 요지는 비핵화를 살리려면 비핵화를 버리고 비핵지대를 대안으로 삼자는 것이다. 아예 공식적인 용어를 ‘한반도 비핵화’에서 ‘한반도 비핵지대’로 바꾸면 더욱 좋다. 일종의 ‘사즉생’의 접근법이다.
한반도 비핵화와 비핵지대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의문이 들 수 있다. 놀랍게도 한반도 비핵화는 합의된 정의가 없다. 북한이 말하는 ‘조선반도 비핵화’와 미국이 요구하는 ‘한반도 비핵화’의 차이가 크고, 한국의 경우에는 정권마다 다르다. 반면 ‘비핵지대’는 유엔 군축위원회가 1999년 가이드라인을 제정하고 그해 유엔 총회도 승인한 바 있다. 이 가이드라인과 1992년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종합하면, 한반도 비핵지대는 이렇게 정의할 수 있다. “남북한은 핵무기를 개발·생산·보유·실험·접수를 하지 않고, 1992년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에 따라 우라늄 농축 및 재처리 시설을 보유하지 않는다. 또 핵보유국들은 남북한에 핵무기 사용 및 사용 위협을 가하지 않고, 핵무기 및 그 투발수단을 배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법적 구속력을 갖춘 형태로 보장한다.”
이러한 새로운 접근을 북한이 수용할 수 있을까? 단기적으로는 그럴 가능성이 거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우선적으로 전쟁 방지와 긴장 완화, 그리고 상호 간의 위협 감소 조처를 통해 그 여건을 하나둘씩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또 북핵 해결을 위해서는 미국의 핵 위협 해소 이외에도 대북 제재 해결, 평화체제, 북-미 수교, 한반도 군축 등도 요구된다. 이러한 과제들을 시야에 넣으면서 긴 안목을 가지고 비핵지대 방식을 추진하면 희망의 근거를 찾을 수 있다. 기실 비핵지대는 북한이 1990년을 전후해 먼저 제안했고, ‘조선반도 비핵화’와 친화성이 있으며, 한반도 핵문제의 공정한 해결을 포함하고 있다. ‘강압’에 의한, 그래서 실패를 되풀이해온 방식이 아니라 지금까지 시도되지 않은 ‘공감’을 통한 접근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궁극적인 대안으로 비핵지대와 평화체제를 융합하는 방안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 ‘한반도 비핵지대와 평화체제 구축에 관한 협정’(이하 한반도 비핵평화협정)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제안의 근본 취지는 비핵지대와 평화체제 구축을 별도가 아니라 하나의 협정으로 추진함으로써 이 두 가지 목표의 선후 관계와 우선순위를 둘러싼 논란에 종지부를 찍자는 데 있다. 이 협정은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한다는 의미와 함께, 한반도 핵문제의 완전하고 궁극적인 해결 방안도 담을 수 있다.
지금까지 한번도 가보지 않았지만, 가게 된다면 마주치게 될 최대 난관은 평화협정 체결의 조건과 시기가 될 것이다. ‘북핵 폐기 완료 이전이냐, 동시냐, 이후냐’를 두고 치열한 논쟁이 벌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북핵 폐기 완료와 평화협정 체결 사이에는 비대칭성이 존재한다. 핵폐기 완료는 물리적인 조처여서 이를 되돌리기가 매우 힘들다. 반면 평화협정은 법적 구속력을 갖추더라도 선언적인 내용이나 물리적인 조처에 대한 약속이 주된 내용이 될 수밖에 없다. 즉, 평화협정을 체결하더라도 평화체제가 완전히 구축된다는 보장은 없다는 것이다.
한반도 비핵평화협정은 이러한 난관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다. 이 협정은 협정 체결 이전까지의 성과를 반영하고, 한국전쟁을 공식적으로 종결하면서 상호 불가침을 확약하며, 비핵지대와 평화체제의 완성을 위한 과제와 이행 방안을 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북핵 폐기가 완료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러한 협정을 체결한다는 데 거부감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현재까지의 결과와 방치되는 미래보다는 훨씬 우월할 것이다. 북한이 흔쾌히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이 생존과 번영을 도모하는 데에 핵을 국체로 삼는 것보다 유리할 것이라는 점도 유념했으면 한다. 정욱식 한겨레평화연구소장
※연재를 마칩니다. 필자와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평화다’라는 믿음으로 평화 활동과 연구를 해오고 있다. 1999년 평화네트워크를 설립해 대표를 맡고 있으며, <핵과 인간>, <한반도 평화, 새로운 시작을 위한 조건> 등 다수의 책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