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고체연료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18형’ 발사 문제 논의를 위해 13일(현지시각) 미국 뉴욕에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회의가 진행되고 있다. 연합뉴스
“탈냉전기를 지나 완전히 다른 세계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지난해 2월 러시아의 침공으로 우크라이나 전쟁이 일어난 뒤 많은 외교 전문가들은 세계 질서가 이전과는 다른 형태로 개편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이들은 미국 단일 패권 시대가 지나며 미-중 패권 경쟁 구도가 격화하고 인도·태평양 지역과 유럽의 진영이 블록화하는 변화가 생길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약 1년 반이 흐른 지금, 신냉전 구도는 세계 질서의 흐름으로 자리잡았다. 최근 고위급 교류를 재개했지만, 반도체 공급망 등을 축으로 한 미-중의 갈등은 진행형이다. 아시아에서는 미국과 일본이 중국 견제를 목적으로 주도하는 인도·태평양 전략에 한국 윤석열 정부가 적극 가세하면서 한·미·일 대 북·중·러의 대립구도가 선명해졌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직접 영향권에 속한 유럽에서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가 회원국을 확대하고, 한국·일본·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 등을 참관국으로 초청하면서 범위를 넓히고 있다.
신냉전 구도 속에서 한반도의 긴장은 높아지고 있다. 북한은 국제사회의 제재 압박에도 잇따라 핵, 미사일 전력을 높이고 있다. 북한은 지난해에만 장·단거리 탄도미사일 70여발을 발사했다. 그러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추가 제재는 없었다.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안에서 미국과 중국·러시아의 대립이 그대로 반영되며 의견 일치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과거 북한의 장거리 탄도미사일과 핵실험 등에 중·러를 포함한 국제사회가 제재에 동참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북한에 대한 유엔 안보리 제재는 2017년 9월이 마지막이었다.
북한은 국제사회의 갈라진 틈을 타 핵, 미사일 전력 강화를 하고 있다.
김정은 조선노동당 총비서는 지난해 12월 열린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8기 6차 전원회의에서 “국제관계구도가 ‘신냉전’ 체계로 명백히 전환되고 다극화의 흐름이 더욱 가속화된다”며 대외 정세를 ‘신냉전’으로 규정한 뒤, 중·러와의 연대 강화에 공을 들이고 있다.
윤석열 정부도 남북관계 개선은 후순위로 미뤄둔 모양새다. 대신 미국 중심의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라는 가치 외교에 치중하며 강경 대북 노선을 추구한다. 윤 대통령은 “통일부는 북한지원부가 아니며 달라져야 한다”고 말해, 남북 화해와 교류·협력을 뼈대 삼았던 과거 통일부의 구실과는 다른 차원의 통일부를 예고한 상태다. 특히 그는 남북관계를 협력·교류의 관계가 아닌 적대관계로 여기고 김정은 정권을 ‘타도 대상’으로 보는 김영호 성신여대 교수를 통일부 장관 후보자로 지목해 북한 인권 문제를 본격 제기할 태세다. 정치권 주변에서는 “윤석열 정부에서 사실상 통일부가 북한과 협력·교류 확대 차원에서 할 일은 없을 것”이라는 말들이 공공연하다. 북한은 지난 12일 미국 전역을 사정거리 안에 둘 수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18형’을 쏘아 올렸다.
전문가들은 경색 속에서도 남북 대화와 협력의 공간을 상상하고, 만들어가야 한다고 말한다. 관리 가능한 범위를 넘어선 남북 긴장과 우발적 충돌 위험 고조는 남북의 존재 자체를 뒤흔드는 위협이기 때문이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북핵·미사일 결의 일지.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외교는 두 얼굴을 갖고 하는 만큼, 북핵 문제에 대해 미국의 확장억제를 요청하더라도 물밑에선 북-미 접촉이 이뤄질 수 있도록 설득을 해야 한다”며 “(한국이) 미국과 북한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하는 것은 한반도 상황을 ‘을’이 아닌 주인으로서 관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정욱식 한겨레평화연구소 소장도 “협력의 조건과 환경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남북 정상 모두 악화된 안보 환경을 이야기하는데, 8월 예정된 한-미 연합훈련을 유예하며 북에 대화를 제안하는 등 고조되는 한반도 위기 관리를 위한 대화의 틈을 열어야 한다”고 했다.
한반도는 가깝게는 2017년, 좀 더 멀게는 1994년에 일촉즉발의 전쟁 위기까지 다가간 적이 있다.
한국 정부는 열악한 국제 환경에서 외교로 긴장을 돌파해왔다. 1998년 김대중 정부도 고비를 넘었다. 그해 8월 북한의 금창리 지하 핵시설 의혹이 불거졌고, 대포동 미사일 발사와 함께 북핵 위협이 고조됐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는 ‘북폭론’까지 주장했던 강경파 윌리엄 페리 전 국방장관을 설득해 북한이 핵·미사일 프로그램을 중단하면 경제 제재 해제 및 북-미 관계 개선을 약속하는 ‘페리 프로세스’를 만들어냈다. 페리 프로세스는 2000년 남북 정상회담, 남북 경협의 기초가 됐다.
노무현 정부도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했던 미국 조지 부시 행정부의 적대적인 분위기를 뚫고, 2003년 8월 첫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6자 회담 틀을 만들었다.
당시 통일부 장관을 지낸 정세현 전 장관은 “한국 정부가 대북지원 등을 통해 북한에 대한 영향력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미국은 일본·북한·중국·미국에 더해 한국이 참여하는 5자 회담을 제안했다. 그러나 북한은 ‘중국은 미국 편을 들게 될 것’이라며 북-미 양자회담을 주장했다”며 “그래서 수석대표 비공개 회담 때 우리가 5개국에 러시아를 포함하는 아이디어를 내어 북한에 6자 회담을 제안했다”며 “이후 6자 회담에서 북한이 읽기 어려운 미국 쪽의 의도와 숨은 맥락을 파악하도록 (한국이) 도왔다. 한국 정부 없이 2005년 공동성명을 내진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6자 회담은 2005년 북한이 모든 핵무기와 핵계획을 포기하고, 한반도 평화협정과 단계적 비핵화 등을 약속한 9·19 공동성명을 채택하는 성과를 냈다.
문재인 대통령 역시 취임 직후 남북 간 군사적 긴장이 고조된 상태를 마주했다. 북한은 신형 중장거리 탄도미사일 ‘화성-12형’을 발사하고, 2017년 9월 6차 핵실험을 감행했다. 한해 동안 안보리 대북결의안만 4건이 채택됐다.
그러나 문 대통령은 2017년 7월 독일 쾨르버재단 연설 등에서 베를린 선언으로 불리는 ‘신 한반도 평화비전’을 발표하고 북한에 대화 의지를 발신했다. 평창 겨울올림픽으로 남북 대화의 창을 연 그는 북-미 회담이 갈등으로 결렬 위기를 맞을 때 중재자로 나서 회담 불씨를 살렸다. 북-미 간 최종적 합의는 불발됐지만, 2018년 6월 첫 북-미 정상회담과 2019년 2월 2차 회담, 같은 해 6월 판문점 남·북·미 정상 회동 등은 이런 곡절 속에 성사됐다.
전재성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남북 교류를 위한 변화의 계기는 또 올 수 있다. 당장 미국 대선이 있고, 미-중 관계의 회복 가능성, 북핵 이슈를 둘러싼 중국의 중재 외교 가능성 등 여러 변수를 고려해야 한다”며 “현 정부는 북에 대한 원칙을 강조하고 있는데, 그만큼 시민사회나 전문가들은 교류를 위한 외교 노력도 더 하도록 목소리 낼 필요가 있다”고 했다.
남북 대화 공간이 매우 협소해진 상황이지만, 변화무쌍한 국제관계에서 늘 유연성을 유지하고, 변화에 대비할 공간을 마련해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장예지 기자
penj@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