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총기사고 희생자들의 합동분향소가 마련된 경기 성남시 분당구 국군수도병원 장례식장에서 5일 오후 헌화병들이 국화꽃을 손에 든 채 조문객을 기다리고 있다. 국방부는 4일 밤 희생자들에게 1계급씩 진급을 추서했다. 성남/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참사 부른 ‘기수열외’
김 상병도 “없어져야” 고립·분노감 키운듯
인권위 시정 권고에도 해병대 ‘전통’ 간주한듯
김 상병도 “없어져야” 고립·분노감 키운듯
인권위 시정 권고에도 해병대 ‘전통’ 간주한듯
국방부와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의 조사 결과, 이번 해병대 총기참사 사건을 저지른 김아무개 상병은 ‘기수열외’가 낳은 괴물이자 피해자인 것으로 드러났다. 언제부터 시작됐는지 정확한 기원은 알 수 없지만, 부대 안에서 특정 사병을 지목해 조직적으로 ‘왕따’시키는 해병대 특유의 악습이 이번 참사를 부른 것이다.
김 상병은 5일 국방부 조사에서 “죽고 싶다. 구타, 왕따, 기수열외가 없어져야 한다”고 진술해, 결국 기수열외 때문에 자신이 고립감과 분노를 키워 왔음을 드러냈다.
외부와 단절돼 있는 군부대, 특히 해병대에서 기수열외 대상이 느끼는 고립감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고 한다. “기수열외가 가장 무서웠습니다.” 지난 1월 해병대 안 가혹행위에 대해 직권조사에 나선 인권위 조사관 앞에서 해병대원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당시 한 병사는 선임병이 음식물을 강제로 먹게 하고 창고로 끌고가 폭행한 사실을 부대 안 행정관에게 알렸다가 해당 선임병에게 다시 불려가 “기수열외 당하고 싶냐”는 협박과 함께 폭행을 당하다 기절했다. 당시 조사를 맡았던 정상영 인권위 조사관은 “(입대) 기수를 하늘같이 여기는 해병대 특성상 기수를 무시하고 따돌리는 ‘기수열외’에 대한 공포심은 매우 컸다”고 밝혔다.
해병대와 관련된 각종 커뮤니티에도 기수열외를 이번 참사의 원인으로 지목하는 글이 이어졌다. 한 누리꾼은 디시인사이드 해병대 갤러리에 “훨씬 후임인 이병한테 고참 뺨 때리라고 하고, 관물함에서 속옷 훔쳐가고… 이게 기수열외입니다. 해병대의 자랑스런 문화”라고 남겼고, 또다른 누리꾼은 “나 때도 저런 일이 비일비재했다”며 “아마 상병 고참 선에서 인계사항(기수·계급마다 허용된 생활규칙)이 내려져 일·이병들이 김 상병을 때리거나 모욕 줬을 것”이라고 적었다.
2005년 10월 해병대에서 전역한 강아무개(30)씨는 “일종의 상징적 협박인 기수열외는 해병대 안에서 오래된 것”이라며 “일단 기수열외가 되면 그 사람은 유령이라고 보면 된다. 다들 없는 사람으로 취급하고 무시한다”고 했다. 강씨는 거기서 더 나아가 “구타·가혹행위가 있는 경우도 있다”고 했는데, 김 상병도 이런 사례에 해당한다.
더욱 큰 문제는 해병대가 이런 악습을 모르지 않았는데도 일찌감치 청산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인권위는 지난 3월 기수열외에 대해 직권조사를 벌인 뒤 해군참모총장과 해병대사령관에게 “해병대원간 ‘기수열외’는 해병대 조직에서 배제하는 것을 의미한다”며, 재발 방지를 위해 △정기적인 인권교육의 실시 △구타·가혹행위 관련 지휘책임 원칙 수립 △외부 전문가를 포함한 해병대 정밀진단 실시 등을 권고했다. 그러나 해병대는 이런 권고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은 것으로 인권위는 파악하고 있다.
정상영 조사관은 “대부분의 (기수열외) 가해자가 후임병 시절 유사한 구타·가혹행위를 당했는데도 이를 참고 견디는 것을 ‘해병대 전통’으로 알고 있다고 진술했다”며 “폭행사건을 상급자에게 발설할 경우 기수열외 등 2차 피해를 주는 해병대의 폐쇄적인 조직문화가 결국 이러한 비극을 만든 것”이라고 말했다. 구타·가혹행위에 관대한 해병대의 병영문화와 지휘감독자들의 관리 부실이 문제를 키웠다는 지적이다. 강씨도 “해병 2사단은 중대별 소초로 돼 있어 행동반경이 작고 소수가 모여 있기 때문에 소대장이나 부사관이 (기수열외를) 모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해병대에 자식을 보낸 부모들 사이에서도 ‘기수열외’에 대한 걱정이 크다. 해병대가 공식적으로 안내한 해병대 가족 모임 커뮤니티에조차 “부대의 선임들이 괴롭힌다는 아들의 말을 듣고도 말 잘못했다가 기수열외(왕따)를 당해 전역 때까지 마음고생을 할까봐 속으로 눈물을 흘리는 가족들이 많다”는 운영자 안내글이 올라와 있을 정도다.
임지선 이승준 기자 su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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