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 직원이 아닌 것처럼 ‘신분세탁’을 한 현대사상연구회 이희천 부회장이 지난해 6월 파주시 오두산 전망대에서 현역 군인들을 대상으로 안보강연을 하고 있다. 강의 주제는 ‘6·25전쟁과 종북세력’이었다. 국방홍보원 제공
장병 상대 ‘종북교육’ 스타강사
‘신분 감춘 채 활동’ 불순한 속내
군, 이씨 신분 알고도 ‘모르쇠’
‘신분 감춘 채 활동’ 불순한 속내
군, 이씨 신분 알고도 ‘모르쇠’
이희천 씨는 ‘종북교육’ 분야에선 스타강사였다. 2012년 상반기 육군 안보강연 횟수 1위다. 전체 안보강연 155회 가운데 48회를 그가 진행했다. 정훈교육을 담당하는 부서에서는 ‘종북교육’하면 ‘현대사상연구회’ 부회장 이희천을 꼽는다.
지난 10월 육군본부 국회 국정감사 현장에선 이희천씨의 신분을 둘러싼 논란이 일었다.
“현역 국정원 직원이 신분을 속이고 교육을 한 겁니까?”(안규백 민주당 의원)
“신분을 속였는지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이붕우 육군본부 정훈공보실장(준장))
국회 국방위원장인 유승민 새누리당 의원이 직접 나섰다. “현역 국정원 직원이 신분을 속이고 교육을 한 겁니까? 왜 대답을 못하세요.”
이붕우 실장은 “현대사상연구회에 일하는 사람으로 알고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거짓말이었다. 국방부가 지난 10월 국정감사 때 안규백 의원에게 제출한 자료를 분석해 보니, 2011년 6월24일 이희천씨는 경기도 양주시 인근의 육군 65사단에서 ‘국정원 안보교수’라는 직함으로 ‘대한민국 앞에 놓인 현실’이라는 강연을 했다. 사단 간부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에서 자신의 신분이 국정원 요원임을 드러낸 것이다. 국방부 관계자는 “이희천씨가 국정원 직원이라는 것은 국방부나 합참에 근무하는 정훈 담당 간부들이라면 다 아는 사실이었다”고 말했다. 이씨가 65사단 교육을 할 당시 합참 공보실장이었던 이붕우 정훈공보실장은 이희천씨가 국정원 요원임을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럼에도 이실장이 이희천씨의 신분을 애써 감추려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씨는 <반대세의 비밀>이라는 책의 저자로도 알려져 있다. ‘반대세’는 ‘반 대한민국 세력’의 줄임말이다. 이 책은 국정원과 군이 지난 대선 당시 ‘사이버 심리전’이란 미명 아래 정치에 개입하는 과정에서 이론적 바탕이 됐다는 게 군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이 책의 저자는 ‘현대사상연구회’로 돼 있고, 이씨는 이 단체의 부회장이다. 이씨는 2011년 현대사상연구회와 북한인권학생연대가 주최한 특강에서 책의 저자임을 공개한 바 있다.
“좌경세력을 얼마나 많이 순화시켜 대한민국 세력으로, 나아가 우익세력으로 만들 수 있느냐가 대한민국 체제의 안정 여부를 가늠하는 기준이 되는 것이다.” ‘반대세의 비밀’에 나오는 글이다. 이씨는 이 책에서 ‘촛불집회’에 참석한 이들을 ‘종북’세력으로 규정하고 대한민국세력, 우익세력으로 ‘순화’시킬 대상으로 지목했다. 이씨의 이 책은 보훈처, 국방부, 통일부, 행안부(현 안행부) 등에 널리 배포된 ‘종북교육 디브이디’의 근간이 됐다. 또한, 5000회가 넘도록 각종 ‘종북교육’ 강연자료로도 쓰였다. 심리전이라는 이름으로 정치 댓글·트위터 활동을 펼친 군 사이버사 요원들에게 이 책은 지침 구실을 한 것으로 보인다. 국방부 조사본부의 수사를 받는 과정에서 사이버사 요원들은 자신들의 정치 댓글·트위터 활동을 범죄로 인식하기보다는 종북세력을 응징하는 정당한 행위였다는 인식을 드러낸 것으로 전해졌다.
이씨가 책을 출간한 것은 2009년 4월이었다. 군이 사이버심리전 전담부서를 두고 본격적으로 포털, 게시판 등의 댓글작업과 함께 SNS를 활용한 여론전을 시작한 시기와 거의 일치한다.
국정원 심리전단에 소속돼 정치 댓글을 단 김 아무개씨, 군 사이버사 소속 이 중사, 국정원 소속 안보강사 이희천씨의 공통점은 자신들의 신분을 감추려고 무던히도 애썼다는 점이다. 정당하고 떳떳한 행위였다면 굳이 그럴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거짓말은 결국 꼬리가 잡혔다.
하어영 기자 ha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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