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예술단 선발 23명이 경의선 육로를 통해 5일 오후 경기도 파주시 남북출입사무소로 입경한 뒤 차량에 짐을 싣고 있다. 북한은 4일 통지문을 통해 평창 겨울올림픽에 참가할 북한 예술단 본진이 6일 9700t급 대형 화물 여객선 `만경봉 92호'를 이용해 뱃길로 방남하고 예술단의 숙식 장소로도 이용할 예정이라고 알려왔다. 사진공동취재단
평창 겨울올림픽을 축하하기 위해 오는 9~11일 방남하는 고위급 대표단 단장으로 북한이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선택한 것은 형식적인 측면에서 최대한 ‘성의’를 보인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김 상임위원장이 갖고 있는 ‘상징성’에 더해 함께 방남할 단원 3명과 지원인력 18명의 면면에 따라 남북관계의 앞날을 예측해볼 수 있다.
북한 헌법 제87조는 최고인민회의를 ‘최고주권기관’으로 규정하고 있다. 또 제117조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은 국가를 대표하며 다른 나라 사신의 신임장, 소환장을 접수한다”고 돼 있다. 김 상임위원장이 형식상 북한의 ‘국가수반’에 해당한다는 뜻이다. 실제 김 상임위원장은 2008년 베이징 여름올림픽과 2014년 소치 겨울올림픽 등에도 대표단장 자격으로 참석해 ‘정상외교’를 벌인 바 있다.
1983년부터 1998년까지 우리의 외교부 장관 격인 외교부장을 지낸 바 있는 김 상임위원장은 의전과 격식에 능한 외교전문가로 통한다. 다만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을 정점으로 한 북한의 권력체계에서 그의 역할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지난 2002년과 2005년 두차례 김 상임위원장과 대면했던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외교관 출신답게) 1대1로 대화를 나눌 때도 교과서적인 모범답안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않았다”고 기억했다.
김 상임위원장이 단장을 맡는 것으로 ‘형식’을 최대한 끌어올렸다면, ‘내용’을 채우는 것은 함께 방남할 고위급 대표단원 3명에게 달렸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특히 당국 간 회담과 달리 고위급 대표단은 성과를 내야 한다는 부담이 없기 때문에 탐색을 위한 대화에 적합하다. 공식적인 면담 자리뿐 아니라 식사나 공연·경기 관람 등 다양한 접촉을 통해 남북이 서로의 의도와 전략을 가늠할 수 있다.
전문가들은 북한이 △통일전선부·조국평화통일위원회 등 대남관계 △북핵 문제 등 외교관계 △당과 내각의 대표성 등을 두루 고려해 대표단원을 결정할 것으로 내다본다. 대화의 동력을 평창올림픽 폐막 이후까지 끌고 갈 수 있느냐는 이들의 역할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조성렬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북한이 남북관계 개선을 넘어 북-미 대화까지 나아갈 것이란 전략적 판단을 내렸다면,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의 핵심 측근을 파견할 것으로 보인다”며 “경우에 따라 최룡해 당 부위원장 등 권력실세가 직접 나설 가능성도 아예 배제하긴 어렵다”고 내다봤다. 청와대는 꼭 최 부위원장이 아니더라도 김정은 위원장의 다른 측근이 대표단원에 포함된다면 평창 이후에 대한 의미 있는 탐색이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지원단원 18명의 방남도 향후 남북관계를 이끌어가는 데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인다. 장기간 남북대화가 끊겼던데다, 김정은 위원장 집권 이후 가장 폭넓은 남북 실무당국자 간 접촉이 이뤄질 수 있기 때문이다. 정세현 전 장관은 “대남관계와 관련한 북쪽 실무자들이 내려와 우리 쪽 실무자들과 얼굴을 맞대고 의견을 나눈다면, 앞으로 당국회담의 동력을 이어가는 데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평창올림픽 개막식에 참석하는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과 북쪽 고위급 대표단 간 직접 접촉이 이뤄질 수 있을지도 관심사다. 북-미 관계의 현주소에 비춰, ‘의미 있는 대화’보다는 ‘우연한 만남’ 정도에 그칠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김연철 인제대 교수는 “평창 현지에서 북·미가 의견의 일치를 보기는 어려울 것”이라며 “향후 본격적인 대화를 어떻게 시작할 수 있을지에 대한 실마리를 포착하는 게 오히려 중요하다”고 짚었다.
정인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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