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신이의 발자취] 강제동원 피해자 김재림 할머니를 기리며
고인(휠체어 앉은 오른쪽)과 양금덕(왼쪽) 할머니가 2018년에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 항고심에서 승소하고 광주고등법원 현관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장헌권 목사 제공
44년 미쓰비시중공업에 강제동원
종일 노동에도 임금 한 푼 못 받아 2014년 미쓰비시 상대 손배 소송
2심 이기고 대법 판결 못보고 별세
“늘 다정하고 사랑 많이 베푸셨죠” “돌아보면 통한의 세월이었다. 일제의 침략으로 인해 조국 강토는 무참히 유린당해야 했고 …수 천길 지하 막장에서, 낯선 땅 어느 공사장에서 …인생의 황혼녘에 이른 할머니들의 여윈 어깨를 보라. …돌이켜보라 광주가 보듬어 안아야 할 역사적 사명이자 책무다…”(2009년 3월12일)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 모임 결성문이다. 필자는 결성준비 모임 때부터 함께하면서 현재 자문위원으로 있다. 14년이라는 시간 속에 피해자 한분 한분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 또 다른 원통하고 분한 일이다. 그 가운데 김재림 할머니가 93살로 지난달 30일 별세했다. 일제 강점기에 전범기업인 미쓰비시에 끌려갔다. 고인은 1930년 전남 화순군 능주면에서 태어났다. 1남4녀 중 넷째다. 할머니는 평소 공부를 하고 싶었다. 1944년 능주공립국민학교(현 화순군 능주초) 졸업 후 광주 불로동 삼촌 집에서 집안일을 돕고 있었다. 강제 동원된 분들의 공통점은 일본 가면 공부도 시켜주고 밥도 준다는 사탕발림으로 유혹당했다는 것이다. 할머니는 먹는 것보다는 공부시켜 준다는 말에 일본으로 향했다. 미쓰비시중공업 나고야항공기제작소에서 일했다. 열네 살 어린 소녀가 온종일 군용 비행기 부속품을 만드는 일에 혹사당했다. 비행기 동체에 페인트칠하기, 비행기 부속품 깎는 일 등으로 종일 노동에 시달리다 숙소에 돌아오면 몸을 제대로 가누기도 힘든 상태가 되었다. 저녁에도 야간공습에 대비하느라 낮에 입은 옷에 보조가방을 메고 신발까지 신은 채 누워 있어야 했다. 이처럼 허기와 중노동으로 참혹한 나날을 보내는 가운데 김재림 할머니는 1944년 12월7일 지진이라며 도망가라는 고함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를 들은 할머니는 사촌 언니 손을 잡고 공장에서 탈출했다. 하지만 무너지는 건물더미에서 사촌 언니의 손을 그만 놓치고 말았다. 결국 할머니는 구사일생으로 구출되었다. 그러나 사촌 언니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고 김재림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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