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누리당 김무성 대표가 3월17일 오후 국회 의원회관을 나서기 위해 엘리베이터에 탑승해 있다. 연합뉴스
‘진박(진짜 박근혜계)’을 제외한 친유승민계, 친이계 의원들 대거 낙천, 무소속 출마 선언, 일부는 유승민 의원을 중심으로 세를 규합할 가능성….
20대 총선을 한 달도 앞두지 않은 17일 새누리당에서 벌어지는 풍경입니다. 8년 전, 4년 전에도 비슷한 모습을 본 것 같다고요? 맞습니다. 그때마다 ‘무대(김무성 의원)’가 주인공이었다는 점도 기시감을 부추깁니다.
2008년 18대 총선 D-30
2008년 3월, 다음달 열릴 18대 총선을 앞두고 한나라당 공천심사위원회는 서청원·홍사덕·김무성·이규택·엄호성 의원 등을 공천에서 탈락시켰습니다. 2007년 대선 후보 경선 과정에서 박근혜 후보를 지지했던 친박계 의원들이었죠. 곧 공천에서 탈락한 의원의 입을 통해 박근혜 전 대표의 메시지가 공개됩니다. “박 전 대표가 ‘살아서 돌아와 달라’고 말했다.”
며칠 뒤 박 전 대표는 공개적으로, 그리고 노골적으로 ‘당을 떠나 출마해 당선된 뒤 복당해 나를 도와달라’고 말합니다. 2008년 3월23일, 그 유명한 박 전 대표의 기자회견입니다.
[관련기사] 박근혜 “저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 http://me2.do/GQoxdmt2
“상향식 공천이 사라지고, 당헌당규는 무시되고, 당권-대권 분리도 지켜지지 않았다. 당 대표가 비례대표 영입에 대해 (이명박) 대통령에게 칭찬받았다고 자랑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결과적으로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이렇게 할 목적으로 (공천을) 뒤로 미뤘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결국 저는 속았다. 국민도 속았다.”
친박계 의원들의 ‘탈당-출마’는 두 갈래로 정리됐습니다.
[관련기사] 무소속연대-미래한국당 출마, 탈락 친박 ‘두갈래 길’로 뛴다 http://me2.do/GAGdzMFe
이규택 한나라당 의원이 2008년 3월17일 오전 국회에서 한나라당을 탈당해 (가칭)미래한국당에 입당하는 기자회견을 하던 중 눈물을 흘리고 있다. 이 의원은 미래한국당은 친박근혜 연대를 의미하는 새로운 정당이라고 밝혔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먼저 ‘친박연대’입니다.
3월19일 서청원, 홍사덕 의원 등은 한나라당을 탈당해 대거 미래한국당에 입당합니다. 친박연대를 창당한 것 아니냐고요? 아닙니다. 한나라당을 나와 몸을 의탁한 곳은 미래한국당이었어요. 이 당은 2007년 9월 정근모 전 과학기술처 장관이 대선 출마를 위해 급조했던 참민주연합이 이름을 바꾼 당입니다. 총선을 불과 20여 일 앞둔 상태에서 물리적으로 신당 창당이 어렵게 되자, 대선 이후 방치돼있던 미래한국당으로 들어갔죠. 그러고 ‘친박연대’로 당명을 바꿉니다. 정말 대단한 기획력이죠. 미래한국당으로는 ‘친박’ 인사들이 참여한다는 정체성을 드러낼 수 없고, 군소 정당으로 인식될 수 밖에 없다는 점을 고려한 것이죠.
당시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친박연대’라는 당명이 특정인을 연상시킬 수 있다며 당명 사용에 부정적이었다고 하는데 어쩐 이유인지 결국 정당명으로 쓸 수 있다는 유권해석을 내립니다. 한나라당 밖에 있는 박 전 대표 지지그룹이 4월 총선에서 유력한 정치 결사체로 결집할 법적 근거를 마련해준 셈이죠. 실제로 친박연대라는 명칭은 미래한국당과는 비교할 수 없는 ‘인지도 제고’ 효과를 냈습니다.
두번째 갈래는 ‘친박 무소속 연대’입니다. 김무성 의원을 비롯한 박종근·이경재·이해봉·이인기·유기준·김태환 의원 등의 결사체죠. 영남에 지역구를 가진 이들 의원들은 무소속으로 출마하되 연대했습니다. 정당을 만들면 한나라당과 갈등이 깊어져 복당이 어려울 수 있고, 한나라당 표를 흡수하기 어렵다고 본 것이죠.
선거에서 두 세력은 ‘공천 주도세력 심판론’을 내세웠습니다. “총선이 끝난 뒤 영남권의 ‘친박 무소속 연대’와 힘을 합친 다음에 한나라당으로 되돌아가서 잘못된 공천을 주도한 세력을 심판하겠다.”(서청원 친박연대 대표)
선거 결과는 어땠을까요? ‘친박연대’는 14명, ‘친박 무소속연대’는 11명을 당선시켰습니다. 특히 친박연대는 13.18%의 정당 득표율을 기록해 비례대표만 8명을 배출했습니다. 당선이 확정된 뒤 김무성 의원은 <한겨레>와 통화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친박연대나 친박 무소속 연대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똑같은 가족이라고 보면 된다.”
2012년 19대 총선 D-30
새누리당 공천심사위원회가 2012년 3월21일 오후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열리고 있다.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2012년, 한나라당은 새누리당으로 이름을 바꿔 19대 총선을 맞이합니다. 당내 주도세력은 친이계에서 친박계로 바뀌었죠. 박근혜 대통령은 당시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아 공천을 주도했습니다. 그는 ‘계파 공천’ 시비를 일축하며 “‘시스템 공천’이 정치쇄신의 분기점”이라고 강조했지만 결과는 친박계 집중 공천이었습니다. 당시 새누리당 비대위원이던 김종인 현 더불어민주당 대표도 이를 인정할 정도였죠. “원래 권력의 생리가 그런 것이 아니겠느냐.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한 쪽이 이(利:이득)를 본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상이다.”(김종인, 2012년 3월19일 <와이티엔>과 <불교방송> 라디오 인터뷰에서.)
18대 총선때 공천 불이익을 받았던 ‘우리의 주인공’ 김무성 의원은 또 공천에서 배제됩니다. 2009~2010년 원내대표 출마 문제와 세종시 수정 논란을 거치며 박근혜 위원장과 정치적으로 결별했기 때문입니다. 2008년에는 친박이라는 이유로, 2012년에는 친박이 아니라는 이유로 잘리게 된 겁니다.
김 의원은 낙천이 불가피한 것으로 알려지자 탈당 뒤 무소속 출마, 신당 창당, 백의종군 등 세 갈래 길을 놓고 거취를 고심했어요. 김 의원이 탈당하면 다른 낙천자들도 연쇄탈당해 새누리당이 분열될 수 있다는 분석이 많았습니다.
실제로 그는 부산 지역 무소속 연대를 추진하거나 김덕룡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민화협) 대표상임의장과 신당 창당을 모색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상도동계 핵심인 두 사람이 신당을 꾸릴 경우 와이에스(YS)계 출신 정치인들과 새누리당 낙천 의원이 합류할 가능성이 적지 않았죠. 김덕룡·김무성 두 사람이 힘을 합하고 향후 정운찬 전 총리까지 합치는 큰 그림이었습니다.
그러나 측근들에게 “나의 공천을 놓고 여러가지 얘기가 나오는 것을 보고 더 이상 입장표명을 미뤄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김무성답게 결정하겠다”고 말해 사실상 탈당 의사를 밝혔던 김 의원은 결국 무릎을 꿇었습니다.
2012년 3월12일 김 의원은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우파 분열의 핵이 돼서는 안 되므로 백의종군하겠다”며 당 잔류를 선언했습니다. 그는 “지난 며칠간 인생 최대의 고민을 했고, 결심의 판단 기준은 ‘우파 정권 재창출’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며 “당과 동지를 떠나면서 국회의원 한번 더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정도로 가야한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밝혔습니다.
[관련기사] 주저앉은 김무성…“우파분열 안되게 백의종군” http://me2.do/GAGdzQsY
김무성 새누리당 의원이 2012년3월12일 오전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우파 분열의 핵이 돼서는 안 되므로 백의종군하겠다”고 밝힌 뒤 인사하고 있다.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당시 그는 <한겨레>와 통화에서 “어젯밤 귀가하면서 보좌관에게 ‘탈당 뒤 무소속 출마’ 내용의 기자회견문을 준비할 것을 지시했다. 그러나 오늘 아침 출근해 막상 회견문을 읽다가 ‘아, 이건 내 갈 길이 아니다’ 하며 순간 생각이 바뀌었다”고 말했어요.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 없지만 그만큼 고민이 깊었다는 뜻이겠죠. 김 의원이 백의종군을 선언하고 진수희, 이재오 등 이재오계 또한 탈당을 사실상 접음에 따라, 새누리당 낙천자들을 주축으로 한 ‘비박근혜 보수 연대’는 구심점을 잃으며 동력이 한풀 꺾였습니다. 그는 이듬해 4월 재선거때 부산 영도에 출마해 국회로 돌아왔습니다.
2016년 20대 총선 D-30
다시 4년이 흘러 총선의 계절이 찾아왔습니다. ‘우리의 주인공’ 김무성 의원은 진작에 새누리당 대표가 됐습니다. 하지만 공천권은 여전히 ‘친박계’가 쥐고 있는 상황입니다. 어김없이 비박(비박근혜)계 현역의원들은 대거 공천에서 배제됐습니다.
당의 대표임에도 그는 17일 현재까지도 여론조사 경선을 치르고 있습니다. 단수 공천을 받을 정도로 확실한 경쟁력이 없다는 게 ‘이한구 공천관리위원회’의 판단입니다. 굴욕적이기는 하지만 아예 ‘컷오프’됐던 4년 전, 8년 전보단 사정이 낫습니다. 그의 측근들도 대부분 살아남았습니다.
친박계와 친김무성계만 살아남자 당 내부에선 ‘김 대표가 제 식구를 지키기 위해 청와대·친박근혜계와 뒷거래를 한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옵니다.
[관련기사] 김무성계 대부분 생존…뒷거래 있었나? http://me2.do/GJGoRazt 두번의 ‘간난신고’를 겪으며 뭔가를 깨달은 걸까요?
그런데 16일 김 대표가 ‘비박·친유승민계 낙천’에 제동을 걸고 나섰습니다. 최고위가 ‘비박·친유승민계 낙천’을 의결해야 하는데, 김 대표가 반대하고 나선 것이죠. “주호영 의원은 공무원연금 개혁, 테러방지법 통과 등 당에 많은 기여를 해왔다”, “이재오 의원은 원내대표를 두 번 했고, 우리 정권에서 장관을 지낸 사람이다. 당에서 5번씩이나 공천해서 당선된 사람을 이제 와서 정체성이 맞지 않는다고 하는 건 이해할 수 없다.”
최고위는 친박근혜계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김 대표가 직을 걸고 결사적인 반대에 나서지 않는 한 공천관리위원회의 결정을 뒤집기 어렵습니다. 이때문에 김 대표의 어깃장을 ‘쇼’로 치부하는 시각도 있습니다. 낙천된 비박계 한 후보는 “김 대표가 시간을 끄는 건 유승민 의원 등이 무소속으로 출마 준비할 시간을 안 주려는 친박계 의도를 도와주는 것”이라고 평가하네요.
‘우리의 주인공’ 김무성 의원에게 20대 총선은 어떻게 기억될까요. 주류와 현명하게 타협해 본인과 측근들의 목숨을 지켜낸 행복한 기억으로 남을까요? 또한번 고개를 숙인 굴욕의 기억으로 남을까요?
김원철 기자
wonchul@hani.co.kr
[언니가 보고 있다_12회_새누리당 3·15 부정공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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