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석 국회의장이 9일 오후 국회 본회의에서 의사봉을 두드리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국회에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을 통한 합법적 의사진행 방해) 카드가 1년 만에 등장했습니다. 21대 국회 첫해 마지막 정기국회 본회의가 열린 9일, 국민의힘은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법 개정안 등 쟁점법안 3건에 대한 무제한 토론을 신청했는데요. 묘하게 겹쳐지는 것은 지난해 12월입니다. 국민의힘 전신인 자유한국당은 지난해 12월23일, 당시 공직선거법 개정안과 공수처법 처리를 막기 위해 본회의에 상정된 199개 안건 전부에 대해 무제한 토론을 신청했습니다. 당시 자유한국당은 자신들이 당론으로 채택한 법안까지 모두 “토론이 더 필요하다”고 주장해 여론의 뭇매를 맞기도 했죠.
이번 2020년 무제한 토론은 어떻게 전개될까요. 4선인 김기현 국민의힘 의원이 본회의장 단상에 서면 ‘2020 무제한 토론’ 시계는 첫 번째 기착점인 정기국회 회기 종료 시점(10일 0시)을 향해 돌아가게 됩니다. 1년 전 13명의 의원이 26시간34분동안 토론했던 공수처법이 이번엔 ‘개정안’ 형태로 다시 본회의에 올라 무제한 토론의 주제가 된 것입니다.
국민의힘은 이날 본회의에 오른 법안 131건 중 쟁점법안인 공수처법 개정안과 함께 국정원법 개정안, 대북전단살포 행위 처벌 규정을 답은 남북관계발전법 개정안에 대해 무제한 토론을 신청했습니다. 당초 본회의에 오른 모든 법안에 무제한토론을 신청하는 방침을 정했다가 5·18 민주화운동 특별법 개정안·사회적참사진실규명법 개정안까지 포함해 5개 법안에 토론을 신청했고, 이후 쟁점 법안 3개로 다시 좁혔습니다. 5·18 특별법과 사참위법 등에 대한 무제한 토론을 철회한 것은 피해자 단체의 반발 등을 우려한 것으로 보입니다. 여야는 먼저 비쟁점법안을 우선 의결한 뒤, 이후 무제한 토론 법안을 처리하는 것으로 합의했습니다. 첫 무제한 토론 법안은 공수처법 개정안이고, 이에 앞서 비쟁점법안이 모두 통과되는 시간을 고려하면 9일 오후 6∼7시께 무제한 토론이 시작될 것으로 보입니다.
주호영 당시 자유한국당 의원이 지난해 12월23일 오후 국회 본회의에서 ‘선거법 개정안'에 대해 무제한 토론을 시작하고 있다. 연합뉴스
정기국회 종료시점이 정해진 ‘시한부 무제한 토론’이긴 하지만 국민의힘은 종료 시까지 공수처법 개정안의 부당함을 최대한 알리며 국민께 호소하는 시간을 갖겠다고 합니다. 공수처법 개정안에 대한 무제한 토론이 끝나면 정기국회 본회의가 산회하고, 다음날 새로 소집되는 임시국회 본회의(오후 2시 예정)에서 공수처법 개정안에 대한 표결 처리가 시도될 것으로 보입니다.
이어 무제한 토론이 신청된 다음 법안이 다시 본회의에 상정되는데요. 이때 민주당은 박병석 국회의장에게 ‘종결 동의’를 신청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이 경우 ‘24시간 뒤 무제한 토론 종결 여부에 대해 무기명 표결하기’로 돼 있는 국회법 106조2 6항에 따라 24시간 뒤 표결을 거쳐 무제한 토론이 종결됩니다. 이렇게 ‘1일 1법’ 처리 방법을 적용하면 이번 무제한 토론 대상 법안 3개를 통과시키기 위해 총 3일이 걸립니다.
‘여론이라도 움직여보자’ 전의 불태우는 국민의힘…무엇을 남길까
‘거여’ 민주당이 법안 처리에 의지를 보이면서 쟁점 법안은 모두 이 과정을 통해 통과될 것이 확실합니다. 그럼에도 국민의힘은 본회의장 단상에 서서, 모든 발언이 생중계되는 가운데 자신들의 입장을 최대한 알리겠다는 전의를 보이고 있습니다. 특히 시간을 최대한 길게 활용하면서 민주당에게 마이크를 넘기지 않고 정부여당에 대한 비판 여론전에 나서는 것이 가장 큰 목표입니다. 이날 첫 무제한 토론에서 국민의힘은 순번을 민주당에 넘기지 않은 채 김기현 의원이 혼자 대여섯시간을 발언할 계획입니다.
주호영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이날 <와이티엔>(YTN)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범여권) 180명이 되면 무제한 토론도 하루 만에 중단시킬 수도 있다. 이런 것들을 국민에게 다 보여주자는 것”이라며 “이 법이 뭐가 문제이고. 180석의 힘으로 진짜 무리한 짓을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국민이 당신들에게 이런 짓을 하라고 180석을 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실 수 있도록 우리가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습니다. 무제한 토론이 가진 ‘저지 효과’가 사실상 없는 상황임에도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보겠다는 의지를 보인 겁니다.
그러나 이번 무제한 토론이 민심에 얼마나 영향을 줄지엔 의견이 엇갈립니다. 이미 지난해 한차례 공수처법 저지를 위해 무제한 토론을 한 상황에서, 다시 한 번 이에 대해 토론하자는 것은 ‘시간끌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입니다. “지난 1년 동안 무엇을 했느냐”는 반발도 나오고 있습니다. 엄경영 시대정신연구소장은 <한겨레>에 “공수처법 경우엔 촛불 민심까지 (시간을) 거슬러간다면 4년여를 끌어온 사안”이라며 “상임위에서 법안을 처리하고 의견을 교환할 수 있었음에도 여태 시간을 끌다가 무제한 토론을 신청한 것은 반문재인 정서를 부각하는데 시간을 사용하겠다는 정략적 선택”이라고 평가했습니다.
반면 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국민의힘 입장에선 무제한 토론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어차피 통과될 법이라고 협조할 수는 없지 않으냐”며 “민주당이 상대가 저항하려고 하는 것마저 (맞불 무제한 토론을 해) 무력화하고 희화화한다면 더욱 옳지 못하다”고 밝혔습니다.
1년 전 여야 의원 28명은 76시간44분동안 공직선거법·공수처법에 대해 ‘끝장 토론’을 벌였습니다. 회기 종료와 함께 토론은 강제 종료됐습니다. 무제한 토론이 벌어질 때마다 누가, 얼마나 오랜 시간동안,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에 가장 관심이 쏠리곤 하는데요. 이 때문에 발언자로 나서는 의원들의 부담감도 적지 않습니다. 최소 몇시간씩은 버티면서 말해야 하기에 전체 시간을 준비 없이 라이브로 발언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고요. 관련 법조문을 줄줄 외거나, 관계된 책 구절을 가져와 연단에 서서 읽기도 합니다. 이번에도 국민의힘 의원들은 관련 서적과 기사 내용 등을 준비하면서 비장한 마음으로 토론에 돌입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필리버스터’는 16세기 ‘해적선’ 또는 ‘약탈자’를 의미하는 스페인어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1854년 미국 상원에서 법안을 막기 위해 반대파 의원들이 의사진행을 방해하면서 정치적 의미를 갖게 됐고, 장시간의 연설, 의사진행 발언·신상 발언, 수정안 제의, 출석 거부 등이 모두 큰 범위 내에선 ‘필리버스터’에 해당합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의원 시절이던 1964년, ‘김준연 의원 체포동의안’ 통과를 막기 위해 5시간19분간 홀로 토론을 한 바 있다. 사진은 67년 7대 국회에서 김 전 대통령이 재경위원으로서 대정부 질문을 하는 모습이다.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우리나라에선 1948년 제헌 의회 때 도입됐다가 1973년 의원 발언 시간을 최대 45분으로 제한하는 내용으로 수정되면서 폐기된 바 있습니다. 이후 2012년 5월 국회법(국회선진화법) 개정안에 포함되면서 부활했습니다. 국회법엔 ‘필리버스터’라는 단어는 규정돼 있지 않고, 무제한 토론(106조2항)으로 설명돼 있습니다.
우리나라 무제한 토론 역사는 1964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김대중 민주당 의원이 ‘김준연 의원 체포동의안’ 통과를 막기 위해 5시간19분간 토론을 했습니다. 1969년 3선 개헌을 막기 위해 박한상 신민당 의원이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무제한 토론를 한 적이 있습니다.
2016년 3월 당시 이종걸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가 국회 본회의장에서 테러방지법 저지를 위한 ‘12시간31분 무제한 토론’을 마치고 자리로 돌아와 동료 의원들의 격려를 받으며 물을 마시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2016년 테러방지법에 반대하던 민주당이 무제한 토론을 벌인 적도 있습니다. 당시 이종걸 의원의 ‘12시간31분’ 최장시간 기록은 아직 깨지지 않았고, 은수미 의원이 ‘필리버스터 스타’로 떠오르기도 했죠. 당시엔 만 8일17분동안 민주당 의원들만 나서 토론했습니다. 지난해 무제한토론의 첫 주자로 나선 주호영 당시 자유한국당 의원은 자리를 뜨지 않기 위해 기저귀를 착용하고 단상에 서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2020년 버전의 ‘필리버스터’에서 국민들은 어떤 의원 발언에 귀를 기울이게 될까요. 단상에 서는 모든 의원들의 발언은 속기록에 기록됩니다.
김미나 기자
min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