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논썰’의 박용현입니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은 지난 6월29일 대선 출마 선언을 하면서 상식, 법치, 공정, 정의를 전면에 내세웠습니다. 검찰총장을 중도 사퇴하고 대선에 출마해 검찰 중립을 저버렸다는 비판이 많았지만, 그가 내세운 가치들은 시대의 요구와 맞아 떨어지는 나름 의미 있는 정치적 모토들이었습니다. 그가 정치에 뛰어든 명분이자 정치적 자산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헌법주의자’라는 점도 강조해왔습니다.
그러나 지난 넉달간 윤 전 총장의 정치 모토들은 윤 전 총장 본인의 언행으로 인해 스스로 허물어져버렸습니다.
[논썰] ‘공정·법치·상식’ 간데없는 윤석열의 ‘대선 행보’ 4개월
“윤석열 징계 정당”, 법원이 확인한 ‘불공정한 검찰총장’
윤석열 전 검찰총장은 출마 선언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국민들께서 그동안 제가 공정과 법치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겪은 일들을 다 보셨습니다. (중략) 우리의 현안을 해결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데 공정과 법치는 필수적인 기본 가치입니다.”
검찰총장으로서 공정과 법치 실현을 위해 싸웠고 그로 인해 문재인 정부로부터 핍박을 당했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윤 전 총장과 법무부의 대립·갈등은 그를 야권 대선 주자로 밀어 올린 동력이 됐습니다. 그 정점에 지난해 말의 ‘헌정사상 첫 검찰총장 징계’ 사태가 있었습니다. 당시 윤 전 총장은 정직 2개월의 징계가 부당하다며 징계 취소 소송을 냈고 법원은 이 소송이 진행되는 동안 징계의 효력을 정지시키는 가처분 결정을 내렸습니다. 윤 전 총장의 승리로 보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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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지난 14일 이 소송의 1심 판결에서 법원은 징계가 정당하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오히려 징계 사유에 견줘 정직 2개월은 가벼운 징계이고 면직 이상의 중징계도 가능한 사안이라고 밝혔습니다. 역사상 징계를 당한 첫 총장이 되는 셈입니다. 상식에 입각해 보자면 이 자체로도 대선 후보로선 자격 미달이라고 하겠습니다. 현직 검찰총장이 중도 사퇴하고 대통령 선거에 나서는 것부터가 검찰의 정치적 중립성을 위태롭게 한 것인데, 징계를 당하고 불명예스럽게 퇴진한 총장이라면 더더욱 명분이 없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징계 사유입니다. 윤 전 총장은 공정과 법치를 지키다 탄압받았다고 주장하지만, 징계 사유로 보면 오히려 윤 전 총장이야말로 공정과 법치를 무너뜨린 장본인이기 때문입니다. ‘채널A 사건’과 관련해 자신의 최측근인 한동훈 검사장에 대한 감찰을 중단시키고 수사를 방해한 것은 검찰권의 잣대가 구부러진 전형적인 불공정 행태입니다. 또한 검찰 조직이 법과 원칙을 이탈해 검찰총장 개인의 이해관계에 휘둘린 것으로, 법치를 정면으로 위배한 것입니다. 법치란 공권력이 ‘사람’에 의해서가 아니라 ‘법과 원칙’에 의해 행사돼야 한다는 원리입니다. 이번 판결에서 재판부 역시 이런 행위들은 “검찰 사무의 적법성과 공정성을 해하는 중대한 비위”라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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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징계 사유인 ‘판사 사찰 문건’도 마찬가지입니다. 법원은 “재판부 분석 문건은 해당 판사가 편향된 정치적 성향을 가진 것처럼 오인하게 만드는 용도로 악용될 위험성을 배제하기 어렵다”고 판단했습니다. 지난해 말 이 문건이 처음 드러났을 때부터 ‘윤석열 검찰’의 주요 수사 사건에 대한 재판에서 검찰에 불리한 판결이 나올 경우 재판부의 성향을 빌미로 공격하기 위한 용도 아니냐는 지적이 있었는데, 법원이 이를 인정하면서 중대한 징계 사유로 인정한 것입니다. 사법부의 재판에 부당한 영향을 미치려 한 것은 법치주의와 헌법 질서에 대한 도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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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리하면 “정치적 판결”, 유리하면 “사법부에 감사”
이번 판결이 나온 뒤 윤석열 전 총장이 보인 태도도 문제입니다. 윤 전 총장 쪽은 법원이 지난해 말 징계 효력정지 가처분 결정 때는 ‘징계가 부당하다’고 했다가 이번에 정반대의 결론을 내렸다고 주장합니다. 명백한 거짓말입니다. 당시 법원은 “해당 문건이 악용될 위험성이 있다는 측면에서 매우 부적절하고 차후 이와 같은 종류의 문건이 작성되어서는 안 된다”고 분명히 밝혔습니다. 다만 “징계 사유가 인정되는지 여부를 최종적으로 판단하기 위해서는 문건의 구체적인 작성 방법과 경위에 대하여 추가적인 심리가 필요하다”고 했을 뿐입니다. 그 추가적인 심리가 이뤄진 결과, 징계 사유로 인정됐습니다. 법원은 시종일관 ‘판사 사찰 문건’이 잘못된 것이라고 판단해온 것입니다.
윤 전 총장 쪽은 더 나아가 “판결의 내용들이 다분히 정치적 모습들이 많다”거나 “대장동으로 인한 시선들을 이 재판 결과로 물타기에 나섰다는 주장도 충분히 가능하다”며 ‘정치적 판결’로 몰아가려 합니다. 기시감이 들지 않습니까. 바로 ‘판사 사찰 문건’의 위험성으로 지적됐던 ‘판사에 대한 정치적 성향 공격’이라는 비열한 수법을 그대로 펼쳐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욕한다고 꾸짖는 어른한테 또 욕을 하며 대드는 형국입니다. 이쯤 되면 ‘판사 사찰 문건’은 윤 전 총장의 일관된 소신의 산물이 아닌지 의심될 정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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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말 징계 효력정지 가처분 결정이 나왔을 때 문재인 대통령은 “법원의 결정을 존중한다. 국민들께 불편과 혼란을 초래한 데 대해 인사권자로서 사과 말씀을 드린다”며 대국민 사과를 했습니다. 단 며칠의 심리 끝에 나온 임시적 성격의 가처분 결정도 이렇게 존중돼야 하는데, 윤 전 총장은 이후 열달의 정식 재판을 거쳐 나온 법원 판결을 “황당하다”는 한마디로 폄훼했습니다. 사법부 판단이 늘 옳은 것은 아니지만, 법률의 적용과 해석 권한은 최종적으로 사법부가 갖는 게 헌법 질서입니다. 책임 있는 정치 지도자라면 사법부의 판결에 대해 최소한의 존중심은 가져야 하는 이유입니다. 윤 전 총장 자신도 법원의 가처분 결정 덕분에 직무에 복귀하면서 “사법부의 판단에 깊이 감사드린다. 헌법정신과 법치주의, 그리고 상식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법원을 공격했습니다. 사법부 판단의 내용은 성찰하지 않은 채 유불리만 따져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겁니다. 극도의 이율배반이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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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7일 ‘고발 사주’ 사건의 핵심 인물인 손준성 전 대검찰청 수사정보정책관에 대한 구속영장이 기각되자 윤 전 총장은 “사법부가 공수처의 ‘속 보이는 정치공작'에 제동을 건 것”이라며 “손준성 검사에 대한 구속영장이 기각되자 공수처는 반성하거나 자중하기는커녕 아쉽다고 했다”고 비판했습니다. 역시 자신에게 유리한 법원 결정에 반색했는데요. 윤 전 총장은 이런 태도를 ‘검찰총장 징계는 정당했다’는 법원 판결에도 그대로 적용해야 합니다. 그래야 법치를 말할 자격이 있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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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주의자’ 자처하며 ‘전두환 미화’ 망언
윤석열 전 검찰총장은 지난 19일 “전두환 대통령이 군사 쿠데타와 5·18만 빼면, 잘못한 부분이 그런 부분이 있지만, 그야말로 정치를 잘했다고 말하는 분들이 많다”며 “호남 분들도 그런 얘기를 한다”고 말했습니다. 전두환씨가 대통령 재임 때 경제 등 각 분야를 전문가에게 맡겨 국정이 잘 이뤄졌다는 취지라고 합니다. 말문이 막히는 망언입니다.
전두환 독재 체제에서 정치가 잘 이뤄졌는지는 따져볼 가치도 없는 일입니다. 쿠데타와 국민 학살로 헌법질서의 근본을 파괴한 정권이기 때문입니다. 전씨는 1997년 4월17일 대법원에서 군사반란 및 내란죄로 무기징역이 확정됐습니다. 며칠 전 사망한 노태우 전 대통령도 함께 기소돼 징역 17년을 선고받았습니다. 전씨를 기소한 건 당연히 검찰입니다. 당시 공소장의 일부입니다.
“피고인 전두환은 수괴로서, 헌법에 의하여 설치된 국가기관을 강압에 의하여 전복 또는 그 권능행사를 불가능하게 하는 등 국헌을 문란할 목적으로 폭동하여 내란함과 동시에 작당하여 병기를 휴대하여 반란하고, 피고인 전두환, 황영시, 이희성, 주영복은 공모하여 국헌을 문란할 목적으로 위 이정연 등 광주시민들을 각 살해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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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씨에 대한 수사·기소·판결이 이뤄진 것은 윤 전 총장도 검사를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당시 검사로서 이를 지켜보며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헌법주의자라고 하면서도 정작 헌법의 가치를 너무 가볍게 보고 있는 게 아닌지 의심스럽습니다.
윤 전 총장은 출마 선언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겠다’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유가 빠진 민주주의는 진짜 민주주의가 아니고 독재요 전제입니다. 이 정권은 도대체 어떤 민주주의를 바라는 것입니까.” 그런데 윤 전 총장이 비판하는 이런 가짜 민주주의가 바로 전두환 체제입니다. 삼청교육대, 강제징집, 민주화운동 탄압, 고문치사, 간첩단 조작 등 이루 말할 수 없이 자유와 민주주의를 짓밟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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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전 총장은 현 정부를 비판하며 ‘국민을 약탈하고 있다’는 말도 했습니다. 그는 반부패의 첨병을 자처합니다. 그런데 전두환 정권이야말로 국민을 약탈해 권력층의 배를 불린 정권입니다. 부패의 규모도 천문학적입니다. 전씨는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기업인들로부터 7천억원을 뇌물로 받아 개인 비자금을 만들었습니다. 건국 이후 최대의 부정축재자입니다. 노태우씨는 추징금 2688억원을 모두 납부하기라도 했지만, 전씨는 고작 300여억원만 내놓은 채 “전재산이 29만원”이라는 둥 뻔뻔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검찰이 특별환수팀까지 꾸려 추징 노력을 하고 있으나 여전히 미납액이 1천억원 가까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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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전씨를 두고 ‘정치를 잘했다’는 말을 하는 건 비정상입니다. 더구나 윤 전 총장은 이런 인식을 드러냄으로써 자신이 정치에 나서면서 전면에 내걸었던 말들을 정면으로 배반하고 있습니다. 몰역사적 인식을 넘어, 지독한 자기 부정입니다.
‘개 사과 사진’은 상식 파괴한 ‘국민 능멸’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정치권과 언론이 사과를 요구하자 윤 전 총장은 ‘진의를 왜곡한 비판’이라며 버티다 이틀 뒤에야 ‘유감’을 표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사과냐는 질타가 이어지자 그날 오후 SNS에 ‘송구하다’는 메시지를 겨우 올렸습니다. 국민이 엎드려 절받는 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몇시간도 지나지 않아 ‘개한테 사과를 주는 사진’을 SNS에 올렸습니다. 주권자인 국민을 능멸하는 행태이며, 헌법 제1조에 대한 모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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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전 총장은 22일 국민의힘 경선 토론에서 “(개 사과 사진을) 제가 승인했으니 관련된 모든 불찰과 책임은 제가 지는 게 맞다. 제가 기획자다”라며 “먹는 사과와 가족 같은 강아지 사진을 보고 ‘사과를 개나 줘라’라고 해석하실 줄은 정말 몰랐다”고 해명했습니다. 전두환 미화 망언을 두고 며칠째 사과하느니 마느니 논란이 이어지는 와중에 개한테 사과를 주는 사진이 국민들한테 어떻게 받아들여질 줄 정말 몰랐다면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만약 알고도 그랬다면 국민을 하찮게 보는 사람입니다. 어느 경우든 정치를 할 자질과 소양을 갖추지 못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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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29일 대선 출마 선언 이후 불과 넉달 동안 윤 전 총장이 내세운 상식, 법치, 공정, 정의, 헌법가치는 모두 퇴색하고 말았습니다. 자신의 권력으로 측근을 비호하는 것은 불공정이고, 사법부의 판결을 폄훼하는 태도는 법치를 부정하는 것이고, 독재자와 부정축재자를 미화하는 것은 반헌법이고 부정의이며, 국민을 능멸하는 것은 상식 이하입니다. 이쯤 되면 윤 전 총장 스스로 ‘출마 선언문’을 다시 한번 돌아보며 그동안 정반대되는 언행을 일삼아온 데 대해 국민들에게 진솔하게 사과해야 정상 아닐까요.
하지만 윤 전 총장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입니다. 윤 전 총장은 지난 25일 기자간담회에서 거듭 상식과 원칙, 법치를 강조하며 “기본적인 헌법 가치가 무너져내리는 상황에서 기성 정치인들이 경각심을 갖고 제대로 싸워 저지하는 노력을 진정성 있게 보였다면 국민이 저를 불러내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반성은커녕 여전히 남 탓을 하며 자신의 잘못을 정당화하고 있습니다.
상식, 법치, 공정, 정의 같은 모토들을 빼고 나면 윤 전 총장에게 남는 정치적 명분과 자산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공허해진 그 단어들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아닐까 합니다. 윤 전 총장이 그토록 사과에 인색한 것도 이런 진실을 인정하기 싫어서가 아닐까요.
기획·출연 박용현 논설위원 piao@hani.co.kr
연출·편집 조소영 PD
도움 채반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