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정치의 주인공은 윤석열 대통령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딱 두 사람이다. 다른 정치인들은 존재감이 거의 없다. 왜 그럴까?
‘빌런’의 시대다. 증오와 증오, 분노와 분노가 충돌하는 전쟁판에는 악당이 필요하다. 사람들은 ‘우리 편 빌런’이 가진 악당성을 사랑한다. 거대한 적을 물리치기 위해서다.
‘팬덤’의 시대다. 증오와 증오, 분노와 분노가 충돌하는 전쟁판에는 팬덤이 필요하다. ‘비판적 지지’는 필요 없다. ‘맹목적 지지’가 필요하다. 거대한 적을 물리치기 위해서다.
2022년 3월9일 대통령 선거 이후 1년6개월이 지났다. 그런데도 대선 연장전이 계속되고 있다.
9월27일 이재명 대표 영장 기각까지가 대선 연장 전반전이었다. 연장 전반전에 이재명 대표는 고전했다. 두 차례나 구속 위기에 몰렸고, 정당 지지도에서도 대체로 밀렸다.
지금부터는 연장 후반전이다. 이재명 대표에게 반격의 기회가 왔다.
대선 연장전의 최종 승부는 2024년 4월10일 22대 총선에서 가려질 것이다. 총선에서 패배하면 치명상을 입는다. 윤석열 대통령은 레임덕에 빠질 수 있다. 이재명 대표는 정치를 그만두어야 한다.
이재명 대표 구속영장이 기각됐으니 이제 상황이 끝났다고 보는 시각이 있다. 민주당의 총선 승리와 이재명 대표의 부활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지 않다. 이재명 대표의 정치적 운명은 이재명 대표 자신이 이제부터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다.
9월21일 국회 본회의 표결 내용을 좀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민주당 의원은 168명이다. 반대는 136표였다. 30명 정도가 찬성과 기권·무효로 이탈했다.
반대표를 던진 민주당 의원 136명이 모두 ‘친명’(친이재명)일까? 이재명 대표의 지시에 따라 반대표를 던진 것일까? 그렇지 않다.
민주당에서 친명으로 분류할 수 있는 의원은 엄밀히 따지면 10명도 되지 않는다. 그럼 뭘까? 왜 이렇게 많은 의원이 반대표를 던진 것일까?
‘이재명’이 아니라 ‘민주당 대표’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당분간 ‘방탄 정당’이라고 욕을 먹더라도 민주당이 무너지거나 분열하는 사태를 막아야 한다고 본 것이다.
이들이 반드시 이재명 대표 체제로 총선을 치러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적절한 시기에 이재명 대표가 한발 뒤로 물러나고 비대위 체제를 출범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의원들도 많다.
체포동의안에 찬성이나 기권·무효표를 던진 30명 정도의 ‘비명’(비이재명) 의원들은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이재명 대표가 공천을 주지 않을까 걱정해서 그런 것일까? 민주당 당권을 차지하려고 그런 것일까? 그렇지 않다.
‘이재명의 민주당’만으로는 민주당이 총선에서 패배할 것이라고 본 것이다. 자신도 선거에서 떨어질 것이라고 본 것이다. 이재명 대표가 지난 6월 불체포특권 포기 선언을 갑자기 번복한 것은 명분이 너무 없다고 본 것이다.
체포동의안에 반대표를 던진 의원들과 찬성표를 던진 의원들은 의외로 생각의 차이가 크지 않다. 그런데도 체포동의안 가결 직후 의원총회에서 서로 욕설을 하고 분노에 찬 글을 페이스북에 올리는 추태를 보였다. 의원들도 사람이다.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서 그럴 것이다. 기자들의 눈에는 좀 한심해 보인다. 의원들이 차분해지려면 시간이 얼마나 필요할까?
이제 민주당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당이 깨질까? 그럴 것 같지는 않다. 민주당은 9월26일 홍익표 의원을 새 원내대표로 선출했다. 추석 연휴 냉각기를 거친 뒤 서서히 수습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내부 갈등이 격화하거나 길어지면 위험하다는 것을 의원들이 누구보다도 잘 안다.
당장의 관심사는 이재명 대표가 비명 의원들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다. 비명 의원들에 대한 공격을 강화할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구속은 면했지만, 이재명 대표의 리더십에는 이미 큰 흠집이 났다. 어떻게든 리더십을 다시 세워야 한다. 리더십을 세우려면 당내 통합에 나서야 한다. 비명 의원들에게 화해의 손짓을 해야 한다. 가능할까?
여론조사 정당 지지도가 중요하다. 추석 연휴 직후 여론조사에서 민주당 지지도가 올라가면 이재명 대표의 정국 주도권과 민주당 장악력이 강화될 것이다. 민주당 지지도가 오히려 떨어지거나 별 변화가 없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재명 대표가 좀 더 강력한 정치력을 발휘해야 한다.
이재명 대표는 체포동의안 표결 직전 민주당 의원들에게 “내가 전횡하면 총선에서 질 텐데 그럴 리가 있겠냐”고 말한 일이 있다. 이재명 대표의 진심이었을 것이다.
사실 공천은 대표 혼자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다. ‘후보자 검증위원회’, ‘후보자 추천 관리위원회’, ‘경선 선거관리위원회’ 등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한다. 공천의 기준은 친명, 비명이 아니라 본선 경쟁력이 될 것이다.
이재명 대표에게 가장 중요한 목표는 총선 승리다. 총선에서 이겨야 정치적으로 부활할 수 있다. 재판도 유리해진다. 다음 대선 출마 가능성도 커진다. 총선에서 이기려면 ‘이재명 플러스알파’ 체제를 갖춰야 한다. 자신은 한발 물러서고 새로운 인물을 비대위원장이나 선거대책위원장으로 세우는 방안을 검토할 수 있다. 결단에 달린 문제다.
‘백현동 개발특혜’ 의혹과 ‘쌍방울그룹 대북송금’ 의혹 등을 받고 있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9월 26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에 출석하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9월 27일 오전 정부과천청사 법무부로 출근하며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구속영장 기각에 대한 취재진의 질문을 듣고 있다. 연합뉴스
이재명 대표의 구속영장이 기각됨에 따라 윤석열 대통령과 국민의힘에는 당장 비상이 걸렸다. 윤석열 대통령은 ‘대선에서 맞붙은 경쟁자를 감옥에 보내지 않는다’는 우리 정치의 불문율을 깨려고 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재임 기간 내내 김대중 대통령을 비난했지만 ‘디제이(DJ) 비자금 사건’이 터지자 검찰총장에게 수사 유보를 지시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한나라당 ‘총풍’ ‘세풍’ 사건을 수사하도록 했지만, 이회창 총재를 직접 건드리지 않았다. 노무현 대통령도 마찬가지였다.
윤석열 대통령은 검찰총장 출신이다. 검찰 정권이다. 검찰이 정치를 주도한다. 검찰은 대선 이후 이재명 대표를 말 그대로 탈탈 털어서 두차례나 구속영장을 청구했지만 한번은 국회에 의해, 한번은 법원에 의해 가로막혔다. 검찰을 앞세운 정치는 이제 대가를 치러야 한다.
추석 연휴 뒤 윤석열 대통령은 어떻게 나올까? 이념 전쟁을 강화할까, ‘민생과 지속가능한 발전’ 쪽으로 돌아설까? 당분간은 민주당을 ‘공산 전체주의’ ‘반국가세력’이라고 계속 몰아붙일 것 같다. 워낙 자기 확신이 강해서다.
총선까지는 겨우 6개월 남짓 남았다. 하지만 갈 길이 멀다. 여기는 다이내믹 코리아다. 우리나라의 6개월은 다른 나라의 6년과 맞먹는다.
10월11일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가 있다. 윤석열 대통령과 국민의힘은 보궐선거 원인을 제공한 김태우 전 구청장을 다시 공천했다.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는 처사다. 이재명 대표 영장 기각 사태가 어떻게 작용할지 알 수 없다. 위기를 느낀 국민의힘 지지층이 결집할 수도 있다. 승패와 득표율 격차 모두 중요한 정치적 함의를 갖는다. 결과가 나오면 좀 시끄러워질 것이다.
11월28일에는 부산 엑스포 유치 여부가 결정된다. 성공하면 부산·경남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경사다. 윤석열 대통령과 국민의힘에 호재가 될 것이다.
해를 넘기면 각 정당의 총선 전략에 따른 공천 전쟁이 시작된다. 잘하는 것보다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게 더 중요하다. 총선에는 몇가지 법칙이 있다.
혁신하면 유리하다. 2012년 박근혜 비대위원장의 새누리당이 그랬다. 경제민주화를 약속하고 색깔을 빨갛게 바꿨다. 예상을 깨고 과반 압승을 거뒀다. 공천을 무리하게 하면 진다. 2016년 박근혜 대통령의 새누리당이 그랬다. ‘진박 감별사’ ‘옥새 들고 나르샤’ 파동 끝에 1당을 빼앗겼다. 이번에는 어떻게 될까? 바야흐로 정치의 계절이다.
정치부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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