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24일 오후 울산시 울주군 울산과학기술원(UNIST)에서 지지자로부터 꽃다발을 받고 있다. 연합뉴스
윤석열 검찰총장이 여론조사에서 ‘차기 정치 지도자’로 등장한 것은 2020년이었습니다. 한국갤럽 2020년 1월 셋째 주 차기 정치 지도자 선호도 조사에서 윤석열 검찰총장은 1%로, 처음 이름을 올렸습니다. 응답자가 정치인의 이름을 말하는 자유 응답 방식이었습니다. 이낙연 24%, 황교안 9%, 안철수 4%, 이재명 3%, 박원순·홍준표 각각 2%, 유승민·윤석열·유시민 각각 1% 차례였습니다.
곧이어 세계일보가 1월31일치 신문에 창간 31주년 여론조사 결과를 실었습니다. 차기 대선주자 적합도 조사에서 윤석열 검찰총장은 10.8%로, 이낙연 전 국무총리(32.2%)에 이어 2위를 차지했습니다.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는 10.1%였습니다. 윤석열·황교안 중에서 보수 성향 응답자들은 황교안 지지가 많았습니다. 중도 성향 응답자들은 윤석열 지지가 많았습니다. 오차범위 안이었지만 윤석열 검찰총장이 황교안 대표를 따돌렸다는 상징성이 컸습니다. 이 여론조사를 계기로 보수층 여론이 윤석열 검찰총장 지지로 결집하기 시작했습니다.
1년여 뒤인 2021년 3월4일 윤석열 검찰총장은 “이 나라를 지탱해온 헌법 정신과 법치 시스템이 파괴되고 있다”며 검찰총장직을 사퇴했습니다. 이어 6월29일 “정권을 교체하는 데 헌신하고 앞장서겠다”며 대선 출마를 선언했습니다. 다음날 국회 기자실을 방문했습니다. 세계일보 부스에서 기자들에게 “그때 그 조사 아니었으면 내가 여기까지도 안 왔다”고 말했습니다. 세계일보 여론조사를 계기로 상승세를 탔고, 그 덕분에 대선에 출마할 수 있었다는 뜻이었습니다.
대선주자 경쟁에서 여론조사의 위력은 이처럼 절대적입니다. 대통령을 아무리 하고 싶어도 여론조사가 받쳐주지 않으면 출마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정치에 별로 뜻이 없던 사람도 여론조사 결과가 좋게 나오면 대통령을 꿈꾸게 됩니다. 좀 심하게 표현하면 여론조사는 사람을 미치게 합니다. 여론조사가 갑자기 잘 나오면 멀쩡했던 사람도 판단이 흐려집니다. “어쩌면 내가 바로 하늘이 내린 대통령일지도 모른다”는 착각에 빠지게 됩니다. 여론조사 수치 상승을 믿고 비정치인이 대선에 출마하는 것은 승률이 매우 낮은 도박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물론 성공한 사례가 있습니다. 바로 윤석열 대통령입니다. 실패한 사례가 훨씬 더 많습니다. 정주영, 조순, 문국현, 정운찬, 안철수, 반기문 등이 그런 경우입니다.
윤 대통령의 성공 사례를 그대로 따라가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입니다. 한국갤럽 여론조사 ‘차기 정치 지도자’ 선호도 조사의 질문은 이렇게 돼 있습니다.
“귀하는 앞으로 우리나라를 이끌어갈 정치 지도자, 즉 장래 대통령감으로 누가 좋다고 생각하십니까?(특정인을 답하지 않은 경우 재질문) 그럼, 조금이라도 마음이 가는 인물은 누구입니까?(자유 응답)”
올해 11월 둘째 주 조사 결과는 이재명 21%, 한동훈 13%, 오세훈 4%, 홍준표 4%, 이준석 3%, 김동연 2%, 안철수 2%, 이낙연 2%, 원희룡 1% 차례였습니다.(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 누리집 참고)
여권에서는 한 장관이 오세훈·홍준표·이준석·안철수·원희룡을 밀어내고 가장 높습니다. 그것도 상당한 격차입니다. 2020년 윤석열 검찰총장보다 더 뛰어난 성적입니다. 흐름도 좋습니다. 지난해 6월 4%에서 시작해 9월 9%, 12월 10%로 올라선 뒤, 올해에는 3월 11%, 6월 11%, 9월 12%, 10월 14%, 11월 13%를 기록 중입니다. 무서운 상승세입니다.
11월 둘째 주 조사 결과를 지역·연령별 등 조금 자세한 항목으로 나눠서 살펴보겠습니다. 세분하면 표본 수가 적기 때문에 정확도는 떨어지지만, 대략의 윤곽은 알 수 있습니다. 지역별로는 서울(18%), 대전·세종·충청(15%), 대구·경북(14%), 부산·울산·경남(15%)이 평균보다 높습니다. 연령별로는 60대(24%)와 70대 이상(22%) 등 고연령층이 평균보다 확실히 높습니다.
지지 정당별로는 국민의힘 지지자의 무려 31%가 한동훈 장관을 선택했습니다. 의견을 유보한 40%보다는 낮지만, 오세훈(9%), 홍준표(7%), 이준석(4%), 원희룡(3%), 안철수(1%)보다는 확실히 높습니다.
여론조사 결과가 한 장관을 부추겼을까요? 한 장관은 지난 11월17일 대구를 방문했습니다. 강력범죄 피해자를 지원하는 ‘대구스마일센터’와 달성 산업단지였습니다.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 발언을 쏟아냈습니다.
“대구 시민들을 대단히 깊이 존경해왔다. 대구 시민들이 6·25 전쟁 과정에서 단 한번도 적에게 이 도시를 내주지 않았고,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끝까지 싸웠다.”
법무부 장관이 아니라 대선주자급 정치인의 발언입니다. 총선 출마 여부를 묻는 기자들에게 “의견은 많을 수 있다. 총선이 국민 삶에 중요한 것은 분명하다”면서도 “범죄 피해자를 잘 보호하고 인구 위기 극복을 위해 외국인 정책과 이민 정책을 잘 정비하는 게 국민께 더 중요할 수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출마와 불출마 양쪽 가능성을 다 열어놓은 발언입니다. 한 장관은 시민들의 사진 촬영 요구에 응하느라 애초 예매한 저녁 7시 서울행 기차표를 취소하고, 밤 10시께 서울행 기차에 올랐습니다. 한 장관 대구 방문에는 ‘데자뷔’(기시감)가 있습니다. 윤 대통령은 2021년 3월3일 대구를 방문해서 “고향에 온 것 같다”고 말한 뒤, 바로 다음날 검찰총장직을 사퇴했습니다. 대구는 이른바 보수의 심장으로 불리는 지역입니다.
한 장관은 사흘 뒤인 11월20일에는 ‘시비에스(CBS) 대한민국 인구포럼’ 행사에 참석했습니다. 기자들이 총선 출마 여부를 묻자 “보도나 추측, 관측은 하실 수 있는 것”이라며 “제가 할 일을 열심히 하고 있다는 말씀을 드리겠다”고 했습니다.
21일에는 대전에 있는 법무부 산하기관 개소식에 참석해 “일부 운동권 정치인들이 재벌 뒷돈 받을 때 저는 어떤 정권에서든 재벌과 사회적 강자에 대해 엄정하게 수사했다”고 말했습니다. 대구 발언 못지않게 정치적 함의가 있는 발언입니다.
22일에는 국회에서 열린 ‘지방소멸 위기, 실천적 방향과 대안’ 세미나에 참석했습니다. 기자들의 민감한 질문을 하나도 회피하지 않고 대답했습니다. 24일에는 울산 에이치디(HD)현대중공업 문화관을 방문해 조선업 숙련기능인력 도입에 대한 현장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최강욱 전 민주당 의원의 ‘암컷 발언’ 관련해서는 “인종·여성 혐오 발언을 공개적으로 구사하는 사람이나 집단은 민주주의 공론의 장에서 퇴출당하는 것이 세계적인 룰”이라고 했습니다. 또 최 전 의원이 에스엔에스에 쓴 글(It's Democracy, stupid)에 빗대 “이게 민주당이다. 멍청아. 이렇게 하는 게 국민들이 더 잘 이해하실 것 같다”고도 했습니다.
한 장관의 행보에 대해 여러 언론에서 부적절하다는 비판이 나왔습니다. 한겨레는 22일치 신문에 “‘공직 이용한 정치 행보’ 한동훈 장관직부터 내려놔야”라는 제목의 사설을 실었습니다. 동아일보도 “1주일 새 대구 대전 울산…‘정치 행보’는 장관직 내려놓고 하라”는 사설을 썼습니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자가 2022년 4월13일 서울 종로구 통의동 제20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브리핑룸에서 열린 2차 내각 발표에서 한동훈 법무부 장관 후보자를 소개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한 장관의 정치 행보에는 두 가지 궁금증이 따라다닙니다. 첫째, 내년 총선에 출마할까요? 국민의힘에서는 한 장관의 총선 출마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는 분위기입니다. 법무부 장관 후임자 인사 검증도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출마한다면 어디로 나갈까요? 한 장관 개인적으로는 당선이 중요할 것입니다. 서울 서초나 강남을 노릴 수 있습니다. 국민의힘 사람들의 생각은 좀 다른 것 같습니다. 서울 강북의 이른바 험지에 출마하거나, 차라리 비례대표로 출마하고 다른 후보들 지원 유세를 하는 게 좋겠다는 의견이 많습니다. 지역구에 출마하려면 선거일 전 90일인 1월11일까지, 비례대표에 출마하려면 선거일 전 30일인 3월11일까지 장관직을 사퇴해야 합니다. 소수 의견이지만 출마하지 않고 장관을 계속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행정부에서 윤 대통령을 도와야 한다는 이유입니다.
둘째, 차기 대선주자로 올라설 수 있을까요? 한 장관의 강점은 야당의 공격에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권투로 치면 수비와 공격을 동시에 하는 ‘카운터블로’가 특기입니다. 자신에 대한 민주당의 비판을 ‘이재명 대표 부인 법인카드 사적 유용 논란’, ‘송영길 전 대표 엔에이치케이 술집 논란’, ‘서영교 의원 친인척 보좌진 채용 논란’ 등으로 맞받아쳤습니다. 메시지가 아니라 메신저를 직격하는 전술입니다. 민주당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환호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뭔가 허전합니다. 윤 대통령은 어쨌든 공정과 상식이라는 비전을 제시했습니다. 한동훈 장관에게는 그런 게 보이지 않습니다. 아직은 싸움꾼에 불과하다는 뜻입니다.
마무리하겠습니다.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은 쿠데타 동지였습니다. 군인 출신이 연이어 대통령을 했는데, 검사 출신이라고 못 할 이유가 없습니다. 장관은 정무직 공무원입니다. 한 장관은 이미 정치인입니다. 총선에 출마하든, 대선에 출마하든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습니다. 한 장관은 ‘강남 엘리트’, ‘엄친아’(엄마 친구 아들) 이미지가 강합니다. 바로 그게 장점이자 약점일 수 있습니다. 지금의 높은 인기는 거품인지도 모릅니다. 앞으로 내용을 채워가는 것은 한 장관 자신의 몫입니다. 당분간 한 장관 기사를 자주 보게 될 것 같습니다. 한동훈 차기 대통령,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정치부 선임기자 shy99@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