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한용 선임기자의 대선주자 탐구] 김문수
김문수 경기지사는 젊은 시절 혁명을 꿈꿨다. 1970년대에 일찌감치 노동 현장으로 뛰어들었고 1980년대에는 전형적인 노동운동가의 삶을 살았다. 그러다가 1994년 민자당에 입당해 여당 정치인으로 변신했다. 3선 국회의원을 거쳐 재선 경기지사를 하고 있다. 최근에는 박정희, 이승만 전 대통령을 치켜세우고 있다. 극에서 극으로 방향을 바꾼 것이다.
대선주자의 반열에 오른 지금, 김문수 지사는 ‘전향 이미지’와 ‘지지율 답보’라는 두 가지 과제를 풀지 못하고 있다. 두 가지 과제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전향 이미지 때문에 보수층에서 지지율이 오르지 않는 것이다. 김대중 <조선일보> 주필은 김문수 지사에게 “전향의 이미지를 씻을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충고한 일이 있다.
김문수 지사는 ‘전향 이미지’와 ‘지지율 답보’라는 두 가지 과제를 풀지 못하고 있다. 두 가지 과제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전향 이미지 때문에 보수층에서 지지율이 오르지 않는 것이다
그의 보좌관을 하다가 같은 지역구에서 국회의원을 하고 있는 차명진 한나라당 의원에게 단도직입으로 이 문제를 물어보았다.
“김문수 지사는 전향이라는 단어를 싫어한다. 실천을 통해 자기 성숙의 과정을 거친 것인데 시류에 따라 옮겨다닌 것으로 매도하면 곤란하다. 좌파도 애국이고, 우파도 애국이다. 방법이 다를 뿐이다. 오히려 김 지사의 좌우 경험은 국가운영의 자산이 될 수 있는 것 아닌가? 지지율은 억지로 되는 일이 아니다. 박근혜 전 대표 지지율이 높은 것은 한나라당에 좋은 일 아닌가. 지금은 경기도정을 열심히 하는 것이 김 지사의 임무라고 생각한다.”
서두르지 않고 때를 기다리겠다는 얘기다. 김문수 지사는 그동안 여러 권의 자서전을 썼다. 최근에는 전문작가가 ‘김문수 스토리, 청(靑)’이라는 책을 펴냈다. 청와대에 가고 싶다는 김 지사의 속내를 담은 것일까? 김문수 지사는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그리고 왜 노동운동가에서 한나라당 정치인으로 변신했을까? 자료와 지인들의 증언을 토대로 두 가지 궁금증을 추적해 보았다.
경북 출신인 김 지사는 1970년 서울대 경영학과에 입학했다. 그가 노동운동에 뛰어든 계기는 그해 11월 전태일 열사 분신 사건이었다. 2학년 때인 1971년 ‘김근태 선배’의 권유로 구로공단 미싱공장에 한 달간 위장취업을 했다. 그러나 위수령이 떨어지면서 대학에서 제적됐다. 방황하던 그에게 당시 서울대 안병직 교수는 “혁명이라는 게 꼭 대학에 다니면서 해야 할 필요는 없다”고 조언했다. 그는 ‘혁명을 통해 세상이 달라질 수 있다’고 확신했고, 진짜 노동자의 길을 걷기로 마음먹었다. 김 지사는 당시 재단보조로 취직했지만 일이 서툴러 쫓겨나기도 했다. 1973년 뜻밖에 복교 조처가 내려졌다. 그러나 1974년 민청학련 사건 관련으로 다시 제적됐다. 당시 김 지사에게 민청학련 활동에 동참할 것을 권유했던 대학 선배의 회고다. “1973년 12월 김문수를 만나 설득한 적이 있다. 상대에서는 김문수가 핵심이었다. 그런데 김문수는 ‘학생운동이나 정치투쟁보다 사회운동, 노동운동이 중요하다’며 거절했다.” 김 지사는 우여곡절 끝에 보일러 기술 자격증을 땄고 1975년 실내수영장에 취직을 했다. 그리고 1976년 도루코 면도날을 만들던 서울 개봉동 한일공업주식회사로 옮겼다. 그곳에서 노조 교육선전부장, 노조위원장 직무대리를 거쳐 노조위원장이 됐다. 이 시절 세진전자 노조위원장이었던 부인 설난영씨를 만났다. 1980년 2월에는 ‘과학사회주의운동 사건’으로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았지만, 40여일 만에 풀려난 일도 있다. 그의 직장 동료는 이때 처음으로 그가 서울대 출신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5공 정권이 들어선 뒤 회사에서 쫓겨난 그는 봉천동 사거리 부근에 ‘대학서점’을 운영하며 다시 노동운동을 시작했다. 그는 1984년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한노협) 부위원장을 맡았고, 85년엔 청계피복 노조와 함께 전태일 기념사업회를 만들어 사무국장을 맡았다. 그를 포함해 한노협 노선에 이의를 제기한 사람들은 1985년 8월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을 결성했다. 서노련의 활동 목표는 군사독재 반대투쟁이었다. 그는 지도위원을 맡았는데, ‘서노련의 머리는 심상정, 발은 김문수’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현장을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그는 주로 노조 결성과 노조 활동을 지원했다. 1986년 5월3일 인천에서 열린 신민당 개헌추진위원회 현판식은 그의 인생에서 전환점이 됐다. 이른바 ‘5·3 사태’였다. 그는 보안사에 끌려가 끔찍한 고문을 받았고, 2년6개월의 감옥생활을 했다. 그는 1988년 10월 개천절 특사로 출감했지만 세상은 급격하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얼마 뒤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고 소련이 해체됐다. 사회주의가 망한 것이다. 그의 정신적 지주였던 안병직 교수는 85년부터 87년까지 일본 도쿄대 교환교수로 다녀온 뒤 이미 방향을 선회하고 있었다. 그는 이 시절 안병직 교수에게 ‘배신자’라고 욕을 하고 다녔다. 그가 나중에 안병직 교수의 길을 따르리라고는 자신도 몰랐을 것이다. 방황하던 그에게 ‘장기표 선배’는 합법정당 운동을 제안했다. 그들은 1990년 민중당을 창당했고 그는 노동위원장을 맡았다. 그러나 1992년 3·24 총선에서 민중당은 단 하나의 의석도 차지하지 못했다. 심지어 정당 존립에 필요한 2% 이상 득표에도 실패했다. 민중당은 해산했다. 현실 정치의 거대한 벽을 넘지 못하고 충격에 빠진 그는 후배 권인숙씨의 요청으로 노동인권회관 일을 맡았다. 그리고 노동연구원에 있던 친구(이원덕)가 주도하는 현대그룹 노사관계 진단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노동자의 관점에서 바라보던 기업을 사용자의 관점에서도 바라볼 수 있었다. 바로 이때부터 그는 서서히 변신을 모색했다는 것이 주변 사람들의 설명이다. ‘경기지사 김문수’에 대한 도민들의 평가는 매우 긍정적이다. 한나라당이 몰락한 2010년 6·2 지방선거에서 그는 거뜬히 당선됐다. 유권자들이 ‘일하는 경기지사’를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다 그는 김영삼 정권의 권유를 받아들여 1994년 3월 민자당 부천시 소사위원장직을 맡았다. 노동운동가에서 여당 정치인으로 직업을 바꾼 것이다. 그는 96년 총선에서 국회의원이 됐다. 그리고 그해 12월 노동법 날치기에 참여했다. 2000년과 2004년 총선에 당선돼 3선 의원이 된 그는 2006년 지방선거에 출마해 진대제 후보를 꺾고 경기지사가 됐다. 노동 운동을 그렇게 치열하게 했던 사람이 군사독재정권의 후신인 집권 여당에 입당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비상식적이다. 왜 변신했을까? 그는 두 가지 이유를 들었다. 첫째, 사회주의의 몰락, 둘째, 민중당의 실패다. 그가 신한국당에 입당하며 부인에게 했던 말은 이렇다. “세상이 바뀌었잖아. 더 이상 독재정권이 아니야. 김영삼이나 김대중이나 우리가 가려고 했던 길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 그리고 우리 정치도 이제 그들을 뛰어넘어 깨끗하고 선진화된 새로운 정치로 거듭나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그의 생각을 세상 사람들이 모두 다 인정해 주지는 않았다. 노동운동가 출신 정치인으로 김 지사를 잘 아는 인사는 이런 평가를 내렸다. “그는 정체성을 파악하기가 어려운 사람이다. 70년대부터 현장에서 노동운동을 하던 사람들을 경제주의, 개량주의로 몰아붙이고 무리한 정치투쟁을 했다. 그래 놓고 자신은 군사독재 정권에 뿌리를 두고 있는 여당에 입당했다. 자기가 한 행동은 그때그때 다 옳았다며, 절대로 미안한 생각을 하지 않는다. 놀라울 뿐이다.” 결국 보수에서는 ‘전향’의 딱지를 붙이고, 진보에서는 ‘배신’의 딱지를 붙이고 있는 셈이다. 김문수 지사가 박정희 이승만 전 대통령을 ‘찬양’하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보수의 표를 얻기 위한 정치적 제스처일까? 그를 대학시절부터 잘 아는 인사는 이렇게 말했다. “추구하는 가치관이 바뀐 것으로 봐야 한다. 해방 직후 이승만의 선택이 옳았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이승만은 토지개혁으로 박정희의 산업화가 가능하도록 기초를 닦았다. 그러나 그의 공적은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김 지사도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다. 김 지사는 과거에도 이념의 노예는 아니었다. 약자를 위해 헌신하고 사회정의를 위해 노력했다는 점에서 일관성이 있다.” 하지만 이 인사도 김문수 지사가 극우단체 집회에 참석하거나 재벌을 옹호하는 것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고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경기지사 김문수’에 대한 도민들의 평가는 매우 긍정적이다. 한나라당이 몰락한 2010년 6·2 지방선거에서 그는 야당의 유시민 후보를 꺾고 거뜬히 당선됐다. 유권자들이 ‘일하는 경기지사’를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다. 지사로서 그의 이데올로기는 ‘현장주의’다. 정답은 항상 현장에 있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민심파악을 위해 2009년 시작한 택시운전은 경기도 거의 모든 지역을 돌아다니며 벌써 27회를 넘기고 있다. 오세훈 전 서울시장의 낙마로 김문수 지사에게는 대선후보의 길이 조금 더 넓어졌다. 그러나 전향 이미지와 지지율 답보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면 그는 기회를 잡을 수 없다. 그는 이 어려운 과제를 과연 풀 수 있을까? 성한용 선임기자 shy99@hani.co.kr
경북 출신인 김 지사는 1970년 서울대 경영학과에 입학했다. 그가 노동운동에 뛰어든 계기는 그해 11월 전태일 열사 분신 사건이었다. 2학년 때인 1971년 ‘김근태 선배’의 권유로 구로공단 미싱공장에 한 달간 위장취업을 했다. 그러나 위수령이 떨어지면서 대학에서 제적됐다. 방황하던 그에게 당시 서울대 안병직 교수는 “혁명이라는 게 꼭 대학에 다니면서 해야 할 필요는 없다”고 조언했다. 그는 ‘혁명을 통해 세상이 달라질 수 있다’고 확신했고, 진짜 노동자의 길을 걷기로 마음먹었다. 김 지사는 당시 재단보조로 취직했지만 일이 서툴러 쫓겨나기도 했다. 1973년 뜻밖에 복교 조처가 내려졌다. 그러나 1974년 민청학련 사건 관련으로 다시 제적됐다. 당시 김 지사에게 민청학련 활동에 동참할 것을 권유했던 대학 선배의 회고다. “1973년 12월 김문수를 만나 설득한 적이 있다. 상대에서는 김문수가 핵심이었다. 그런데 김문수는 ‘학생운동이나 정치투쟁보다 사회운동, 노동운동이 중요하다’며 거절했다.” 김 지사는 우여곡절 끝에 보일러 기술 자격증을 땄고 1975년 실내수영장에 취직을 했다. 그리고 1976년 도루코 면도날을 만들던 서울 개봉동 한일공업주식회사로 옮겼다. 그곳에서 노조 교육선전부장, 노조위원장 직무대리를 거쳐 노조위원장이 됐다. 이 시절 세진전자 노조위원장이었던 부인 설난영씨를 만났다. 1980년 2월에는 ‘과학사회주의운동 사건’으로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았지만, 40여일 만에 풀려난 일도 있다. 그의 직장 동료는 이때 처음으로 그가 서울대 출신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5공 정권이 들어선 뒤 회사에서 쫓겨난 그는 봉천동 사거리 부근에 ‘대학서점’을 운영하며 다시 노동운동을 시작했다. 그는 1984년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한노협) 부위원장을 맡았고, 85년엔 청계피복 노조와 함께 전태일 기념사업회를 만들어 사무국장을 맡았다. 그를 포함해 한노협 노선에 이의를 제기한 사람들은 1985년 8월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을 결성했다. 서노련의 활동 목표는 군사독재 반대투쟁이었다. 그는 지도위원을 맡았는데, ‘서노련의 머리는 심상정, 발은 김문수’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현장을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그는 주로 노조 결성과 노조 활동을 지원했다. 1986년 5월3일 인천에서 열린 신민당 개헌추진위원회 현판식은 그의 인생에서 전환점이 됐다. 이른바 ‘5·3 사태’였다. 그는 보안사에 끌려가 끔찍한 고문을 받았고, 2년6개월의 감옥생활을 했다. 그는 1988년 10월 개천절 특사로 출감했지만 세상은 급격하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얼마 뒤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고 소련이 해체됐다. 사회주의가 망한 것이다. 그의 정신적 지주였던 안병직 교수는 85년부터 87년까지 일본 도쿄대 교환교수로 다녀온 뒤 이미 방향을 선회하고 있었다. 그는 이 시절 안병직 교수에게 ‘배신자’라고 욕을 하고 다녔다. 그가 나중에 안병직 교수의 길을 따르리라고는 자신도 몰랐을 것이다. 방황하던 그에게 ‘장기표 선배’는 합법정당 운동을 제안했다. 그들은 1990년 민중당을 창당했고 그는 노동위원장을 맡았다. 그러나 1992년 3·24 총선에서 민중당은 단 하나의 의석도 차지하지 못했다. 심지어 정당 존립에 필요한 2% 이상 득표에도 실패했다. 민중당은 해산했다. 현실 정치의 거대한 벽을 넘지 못하고 충격에 빠진 그는 후배 권인숙씨의 요청으로 노동인권회관 일을 맡았다. 그리고 노동연구원에 있던 친구(이원덕)가 주도하는 현대그룹 노사관계 진단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노동자의 관점에서 바라보던 기업을 사용자의 관점에서도 바라볼 수 있었다. 바로 이때부터 그는 서서히 변신을 모색했다는 것이 주변 사람들의 설명이다. ‘경기지사 김문수’에 대한 도민들의 평가는 매우 긍정적이다. 한나라당이 몰락한 2010년 6·2 지방선거에서 그는 거뜬히 당선됐다. 유권자들이 ‘일하는 경기지사’를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다 그는 김영삼 정권의 권유를 받아들여 1994년 3월 민자당 부천시 소사위원장직을 맡았다. 노동운동가에서 여당 정치인으로 직업을 바꾼 것이다. 그는 96년 총선에서 국회의원이 됐다. 그리고 그해 12월 노동법 날치기에 참여했다. 2000년과 2004년 총선에 당선돼 3선 의원이 된 그는 2006년 지방선거에 출마해 진대제 후보를 꺾고 경기지사가 됐다. 노동 운동을 그렇게 치열하게 했던 사람이 군사독재정권의 후신인 집권 여당에 입당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비상식적이다. 왜 변신했을까? 그는 두 가지 이유를 들었다. 첫째, 사회주의의 몰락, 둘째, 민중당의 실패다. 그가 신한국당에 입당하며 부인에게 했던 말은 이렇다. “세상이 바뀌었잖아. 더 이상 독재정권이 아니야. 김영삼이나 김대중이나 우리가 가려고 했던 길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 그리고 우리 정치도 이제 그들을 뛰어넘어 깨끗하고 선진화된 새로운 정치로 거듭나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그의 생각을 세상 사람들이 모두 다 인정해 주지는 않았다. 노동운동가 출신 정치인으로 김 지사를 잘 아는 인사는 이런 평가를 내렸다. “그는 정체성을 파악하기가 어려운 사람이다. 70년대부터 현장에서 노동운동을 하던 사람들을 경제주의, 개량주의로 몰아붙이고 무리한 정치투쟁을 했다. 그래 놓고 자신은 군사독재 정권에 뿌리를 두고 있는 여당에 입당했다. 자기가 한 행동은 그때그때 다 옳았다며, 절대로 미안한 생각을 하지 않는다. 놀라울 뿐이다.” 결국 보수에서는 ‘전향’의 딱지를 붙이고, 진보에서는 ‘배신’의 딱지를 붙이고 있는 셈이다. 김문수 지사가 박정희 이승만 전 대통령을 ‘찬양’하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보수의 표를 얻기 위한 정치적 제스처일까? 그를 대학시절부터 잘 아는 인사는 이렇게 말했다. “추구하는 가치관이 바뀐 것으로 봐야 한다. 해방 직후 이승만의 선택이 옳았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이승만은 토지개혁으로 박정희의 산업화가 가능하도록 기초를 닦았다. 그러나 그의 공적은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김 지사도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다. 김 지사는 과거에도 이념의 노예는 아니었다. 약자를 위해 헌신하고 사회정의를 위해 노력했다는 점에서 일관성이 있다.” 하지만 이 인사도 김문수 지사가 극우단체 집회에 참석하거나 재벌을 옹호하는 것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고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경기지사 김문수’에 대한 도민들의 평가는 매우 긍정적이다. 한나라당이 몰락한 2010년 6·2 지방선거에서 그는 야당의 유시민 후보를 꺾고 거뜬히 당선됐다. 유권자들이 ‘일하는 경기지사’를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다. 지사로서 그의 이데올로기는 ‘현장주의’다. 정답은 항상 현장에 있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민심파악을 위해 2009년 시작한 택시운전은 경기도 거의 모든 지역을 돌아다니며 벌써 27회를 넘기고 있다. 오세훈 전 서울시장의 낙마로 김문수 지사에게는 대선후보의 길이 조금 더 넓어졌다. 그러나 전향 이미지와 지지율 답보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면 그는 기회를 잡을 수 없다. 그는 이 어려운 과제를 과연 풀 수 있을까? 성한용 선임기자 shy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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