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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정치일반

[길을 찾아서] 나의 방북 무산 배경에 남북 냉전세력 결탁설 / 한완상

등록 2012-11-11 19:52수정 2012-11-12 08:57

1998년 12월 중순 필자는 월간지 <말>의 ‘정범구가 만난 사람’에서 연말 대담을 하면서 ‘디제이 정부가 일관되고 명분 있는 개혁을 추진한다면 참여할 뜻’이 있음을 밝혔다. 사진은 필자가 앞서 8월 <한국방송>(KBS) 제2텔레비전의 ‘정범구의 세상읽기’에 출연해 대담을 나누고 있는 장면이다.
1998년 12월 중순 필자는 월간지 <말>의 ‘정범구가 만난 사람’에서 연말 대담을 하면서 ‘디제이 정부가 일관되고 명분 있는 개혁을 추진한다면 참여할 뜻’이 있음을 밝혔다. 사진은 필자가 앞서 8월 <한국방송>(KBS) 제2텔레비전의 ‘정범구의 세상읽기’에 출연해 대담을 나누고 있는 장면이다.
한완상 비망록-햇볕 따라 평화 따라 129
1998년 11월2일 오랜만에 일본에 갔다. 오사카를 거쳐 6일에는 교토로 이동해 서승 교수와 점심을 했다. 재일동포인 서 교수는 내가 미국에서 돌아와 서울대 문리대 사회학과 교수로 부임하기 직전인 68년 서울대로 유학을 와 이듬해에는 사회학과 대학원에 입학했다. 내 연구실에 책상을 하나 두고 조교처럼 각별하게 지내던 그는 71년 3월 어느날 갑자기 ‘증발’했다. 알고 보니 이른바 ‘재일동포 학생 학원침투 간첩사건’이라는 엄청난 죄목으로 동생(서준식)과 함께 국군보안사령부(사령관 김재규)에 끌려갔던 것이다. 억울한 누명과 혹독한 고문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다 얼굴에 심한 화상까지 입은 그는 무기형을 받아 90년 2월 19년 만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일본으로 돌아가 뒤늦게 법학 공부를 다시 한 그는 얼마 전 리쓰메이칸대 교수로 부임했다.

이어 7일에는 ‘평화’ 관련 국제세미나에서 최장집 교수에 대한 ‘사상검증 논란’을 두고 ‘평화학의 주창자’로 불리는 노르웨이의 요한 갈퉁 교수 부부와 리쓰메이칸대학의 한 일본인 교수와 의견을 나누었다. 그런데 두 사람은 모두 북한에 갔을 때 황장엽을 만난 적이 있다고 했다. 그때는 대단히 열린 사고를 하는 지식인으로 생각했던 그가 남한으로 귀순해서 너무 실망했다고 한다. 그가 북한에 남아서 열린 체제로 개혁하는 일에 앞장서야 했다고 아쉬워했다. 이후 짧은 평화순례를 마치고 9일 귀국했다.

11월20일에는 이화여대에서 주최하는 ‘한반도 평화와 인권’ 세미나에 초청받아 주제 강연을 했다. 강연을 마치고 나오는데 <시사저널>의 오아무개 기자가 만나기를 청했다. 그는 지난 8월21일 베이징에서 전금철 북한 정무원 책임참사와 만났을 때 김대중 대통령의 특사로 방북하려 했느냐고 물었다. 나는 단호하게 아니라고 했다. 왜 새삼스럽게 묻느냐고 했더니, 그는 충격적인 얘기를 들려주었다.

그때 전 참사가 불편한 몸으로 다급하게 베이징까지 달려온 이유는, 평양 당국에서 나를 디제이의 특사로 알고 당황해서 나의 방문을 막으라고 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북한은 왜 그런 잘못된 판단을 했을까? 오 기자는 남쪽에서 ‘대통령 특사로 간다’는 거짓 정보를 북쪽에 흘렸다고 했다. 나의 방북으로 남북관계가 개선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그런 비열한 짓을 했을 것이라고 했다. 퍼뜩 8월19일 강인덕 통일부 장관이 내게 사람을 보내 방북을 연기해줄 것을 요청했던 일이 떠올랐다. 그때 임동원 외교안보수석도, 이종찬 국정원장도, 심지어 김 대통령도 ‘막으라’는 지시를 하지 않았음을 확인했던 나로서는 누가 ‘그런 짓’을 했는지 짐작이 갔다. 오 기자는 당시 북한 당국도 비료회담 결렬로 남쪽 정부에 매우 분노하고 있었던 탓에 누가 디제이의 특사로 오든 반갑게 맞을 분위기가 아니었으므로, 이를 이용했던 것이라고 했다.

과연 오 기자의 얘기를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몰랐다. 설마 남북의 냉전세력들이 그렇게까지 결탁하고 있을까? 그렇다면 디제이는 과연 임기 안에 역사적인 남북관계 개선의 돌파구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참으로 걱정스럽고 안타깝다.

앞서 11월13일, 나는 송철원·김연갑·유재만 등의 끈질긴 설득으로 한민족아리랑연합회 이사장을 맡았다. 그런데 11월27일 연합회 김연갑 사무총장이 ‘남북 합작으로 영화 <아리랑>을 제작할 수 있는 길이 생겼다’고 전해왔다. 도쿄에서 우리를 돕고 있는 김경원 여사가 보내온 기쁜 소식이었다. 북한 아태평화위 김용순 위원장이 남쪽에서 내가 직접 나선다면 도울 수 있다는 의사를 표명했단다. 한국 영화사는 물론 한민족의 역사에 커다란 평화의 전기가 될 수도 있는 작업이다. 과연 내가 해낼 수 있을까?

12월14일, 대통령 직속 방송개혁위원회가 발족했다. 강원룡 목사가 초대 위원장을 맡고 나도 위원으로 참여했다. 위촉장을 받으러 오랜만에 청와대에 갔더니 예전보다 의전이 더 까다로워진 듯하다. 디제이피(DJP)의 불안정한 동거 탓일까, 대통령은 내내 피곤해 보인다. 강 목사는 언제나처럼 천진한 어린아이처럼 자신의 얘기에만 몰두하고 있다.

12월16일에는 <말>지의 ‘정범구가 만난 사람’에서 인터뷰를 왔다. 정 박사와 우리 집에서 ‘김대중 정부 10개월의 개혁과 한계’를 화두로 연말 결산 대담을 나눴다. 허심탄회하게 제법 장시간 이야기를 나눈 그는 마지막으로 웃으며 디제이 정부에 참여할 의사가 있는지 물었다. “현 정부가 수구냉전세력에게 포위되어 스스로 개혁을 포기하고, 개혁세력을 쫓아내는 그런 전철을 밟는다면 아예 고려할 필요가 없겠지요. 그러나 현 정부가 일관성 있게 개혁을 추진하면서 요청을 한다면 명분이 있는 한 참여할 것입니다.” 한완상 전 부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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