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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정치일반

“정당금지 통해 특정 사상 없애는 건 불가능하더라”

등록 2014-05-02 19:37수정 2014-12-19 13:47

1999년부터 2008년까지 독일 연방헌법재판소 재판관을 지낸 볼프강 호프만림 전 재판관이 3월26일(현지시각) 독일 함부르크 부체리우스 로스쿨에 있는 자신의 연구실에서 <한겨레> 기자와 만났다. 호프만림 전 재판관은 정당해산제도에 대해 “정당 금지가 정치적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효과적 해결책이 될 수 없다”고 말했다.
1999년부터 2008년까지 독일 연방헌법재판소 재판관을 지낸 볼프강 호프만림 전 재판관이 3월26일(현지시각) 독일 함부르크 부체리우스 로스쿨에 있는 자신의 연구실에서 <한겨레> 기자와 만났다. 호프만림 전 재판관은 정당해산제도에 대해 “정당 금지가 정치적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효과적 해결책이 될 수 없다”고 말했다.
[토요판] 특집
정당해산 교훈, 독일에서 배운다
▶ 지난해 11월5일 정부는 헌법재판소에 통합진보당에 대한 정당해산 심판을 청구했습니다. 정부가 ‘위헌적’이라는 이유로 특정 정당의 해산을 청구한 것은 헌정 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우리보다 먼저 헌법에 의한 정당 해산을 경험한 나라 가운데 한 곳은 독일입니다. 진보당 해산심판 사건에서도 독일 공산당 사례는 자주 오르내립니다. 볼프강 호프만림 전 독일 연방헌법재판소 재판관과 함께 공산당 해산이 갖는 역사적 의의를 따져봤습니다.

박근혜 정부는 지난해 11월5일 헌법재판소에 통합진보당에 대한 정당해산 심판을 청구했다. 통합진보당의 목적과 활동이 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배된다는 것이 청구인인 ‘대한민국 정부’ 주장이다.

헌법재판소가 만약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을 내리면 박근혜 정부와 헌법재판소, 통합진보당은 한국 정치사와 헌법사에 ‘헌법에 의한 정당 해산’이라는 새 역사를 함께 쓸 수 있다. 앞으로 다가올지 모를 ‘통합진보당 해산’은 자랑스러운 역사로 남을까, 아니면 부끄러운 역사가 남을까. 헌재는 지난 1월28일부터 4월1일까지 모두 4차례의 변론기일을 진행했다.

헌법에 의한 정당 해산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열어가려 하고 있는 박근혜 정부가 ‘모범사례’로 삼고 있는 것은 과거 독일 공산당의 해산 경험이다. 1951년 서독 콘라트 아데나워 정권은 독일 공산당에 대해 ‘자유롭고도 민주적인 기본질서’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연방헌법재판소에 해산 심판을 청구했다. 공산당은 ‘아데나워 정권의 혁명적 전복’ 등 과격한 구호를 내걸었고, 당시 서독 정권이 추진했던 재무장 계획에도 제동을 걸고 나섰다. 아데나워 정권한테는 눈엣가시가 따로 없었다. 독일 연방헌법재판소는 1956년 공산당 해산 결정을 내렸다.

독일 사회가 공산당 해산 결정을 통해 얻은 교훈은 무엇일까. 1999년부터 2008년까지 10년간 독일 연방헌재에 몸담았던 볼프강 호프만림 전 재판관에게 독일 공산당 해산에 대한 평가와 문제점을 들었다. 호프만림 전 재판관은 헌법에 의한 정당해산 제도에 대해 “나는 정당 금지가 정치적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효과적 해결책이 아니라고 믿는다”고 밝혔다. 그는 “정당 해산이라는 절차는 특정 정당의 해체를 법의 이름으로 명령하는 것인데, 그렇게 한다고 해서 그 정당이 추구하는 가치나 사상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금지 대상이 된 정당은 정치적 탄압에 의해 희생됐다는 이유로 더 우상화되기도 한다”고 덧붙였다.

또 호프만림 전 재판관은 “만약 당신이 독일 공산당 해산 결정이 내려진 1956년 연방헌재에 있었다면 어떤 결정을 내렸겠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나라면 다른 결정을 내렸을 것”이라고 말했다. 호프만림 전 재판관은 2007년부터 ‘법을 통한 민주주의 유럽위원회’, 곧 베니스위원회의 독일 쪽 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1950년대 반전·평화운동 벌이던
독일공산당 해산은 아데나워의
재무장 걸림돌 제거 위한 것
독일사회는 급속도로 경직됐고
독일 재무장은 뜻대로 이뤄졌다

독일공산당은 1956년 해산 뒤
12년 만에 이름 바꿔 재창당
그 전인 1952년엔 나치 깃발 든
‘사회주의제국당’ 해산명령
이를 둘러싼 논란은 존재 안해

나치 경험에서 비롯된 ‘방어적 민주주의’

정당 해산 제도의 탄생 배경이 궁금하다. 독일은 왜 이런 제도를 갖추게 된 건가?

“독일 사회에서 정당 해산에 관한 논의는 ‘방어적 민주주의’라는 개념으로부터 비롯했다. 1919~1933년 바이마르공화국 당시 독일에서는 공산당과 나치당 등 수많은 정당이 서로 대립했다. 많은 이들은 민주주의가 자신의 적에 대항하여 스스로를 방어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나치당의 집권과 독재를 막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이런 역사적 교훈을 통해 독일 기본법에는 정치적 의견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민주주의를 보장하면서도, 민주주의는 위험으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어야 한다는 차원에서 방어적 민주주의라는 개념이 생겼다. 민주주의 방어를 위해서라면 정당 해산도 가능하다고 규정한 기본법 제21조와 위헌적일 경우 정치적 결사의 금지를 명령한 기본법 9조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호프만림 전 재판관의 설명처럼, 독일이 한국의 헌법에 해당하는 ‘기본법’에 정당 해산 조항을 만들어놓은 직접적 이유는 나치당(독일 국가사회주의노동자당·NSDAP) 탓이었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독일 지역에는 바이마르공화국(1919~1933년)이 등장했다. 가장 근대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제도를 갖고 출발한 바이마르공화국 실험은 실패로 끝났다. 모든 정당과 사회집단, 개인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배타적으로 싸웠다. 사회적 혼란과 갈등이 잦아들지 않았다. 균열의 틈에서 나치당이 싹텄다. 1932년 7월 바이마르공화국 의회 선거에서 나치당은 37.2%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제1당으로 떠올랐다. 나치당을 이끌던 아돌프 히틀러는 이듬해 1월 총리로 취임했다.

히틀러가 집권한 뒤 가장 먼저 착수했던 작업은 정치적 반대세력을 제거하는 일이었다. 총리 취임 직후인 2월27일 공산주의자 마리뉘스 판데르뤼버가 국회에 불을 지른 사건을 빌미로 공산당(KPD)을 불법화시켰다. 이어 정권 안정을 위해 노동조합을 해산했고, 마침내 나치당을 뺀 모든 정당의 활동을 금지하는 데 이르렀다. 유럽 최초의 민주적 헌법 체제를 갖췄다고 평가받았던 바이마르공화국은 그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호프만림 전 재판관은 ‘방어적 민주주의’를 설명하며 “중요한 것은 1933년 독일의 민주주의를 소멸시킨 나치당은 다시 나타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독일 공산당 해산 심판이 시작된 1951년부터 해산 결정이 내려진 1956년까지 세계사적으로는 극단적 냉전이 감돌고 있었다. 당시 독일 사회에도 미국의 매카시즘과 비슷한 반공 히스테리가 존재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런 분위기와 독일 공산당 해산은 관계가 있었나?

“히스테리라는 표현은 일정한 집단적 배경을 전제로 한다. 당시 독일에는 공산주의나 공산주의적 태도에 대한 집단적 거부감이 분명 존재했다. 아데나워 총리와 그가 이끌던 정부가 특히 심했다. 독일 공산당은 이런 아데나워 정권에 맞서 ‘혁명’이나 ‘전복’ 등의 단어를 쓰며 정권 퇴진을 요구했다. 많은 시민은 이런 용어를 거침없이 쓰는 공산당을 위험한 정당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었다. 공산당에 대한 이런 시각과 인식이 연방헌법재판소의 재판 과정에 영향을 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정치적 구호가 선정적 혹은 폭력적이라는 이유로 법적 강제력을 동원해 특정 정당을 정치과정에서 배제한다는 논리가 과연 정당한가?

“지금의 관점으로는 상상하기 어려울 수 있다. 그 당시와는 전혀 다른 역사적 환경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어떤 정당으로 인해 빚어질 수 있는 위험이라는 것은 각 시대적 상황에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독일 공산당 해산이 이뤄진 1952년부터 1956년까지 서독에는 언제든 전쟁이 벌어질 수 있다는 불안감이 널리 퍼져 있었다. 당시 군사적으로 무장한 동독과 대치하고 있었고, 독일 공산당은 동독과의 통일을 주요 목표로 설정해놓고 있었다.”

분단국가가 통일을 목표로 삼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거 아닌가?

“맞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독일에서도 동서독 통일에 대한 열망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그런데 당시 냉전 체제 아래에 놓여 있던 서독에는 동독이 소련과 함께 모종의 일을 벌이면 독일 공산당은 후방에서 이를 지원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었다. 이 때문에 서독 시민은 공산당에 대한 해산 논쟁과 함께 또 다른 형태의 갈등 가능성에 주목했다. 독일 공산당 세력이 커지면 어떤 방식으로든 동독, 소련과 함께 서독을 전복시킬 수 있다는 가능성 말이다.”

공산당과 사회주의제국당 해산 어떻게 달랐나

서독 연방헌법재판소가 1956년 8월 독일 공산당 해산을 선고하며 내놓은 판결의 주요 내용은 이 정당의 강령이 기본법이 규정하고 있는 ‘자유롭고도 민주적인 기본질서’에 위배된다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연방헌재는 다음의 네 가지 해석을 내놓았다. △기본법 제21조에 따른 정당에 대한 해산은 본질적으로 미래에 대한 예방적 조치다. △기본법 제21조의 목적은 반민주적인 목표를 지닌 정당의 결성을 막는 데 있다. △기본법 제21조를 보면 가까운 미래에 헌법을 침해하려는 의도를 실현할 수 있는 전망이 없더라도, 그런 의도를 나타내는 것을 근거로 특정 정당은 위헌이라 할 수 있다. △위헌적 의도가 입증될 수만 있다면, 정당 해산을 지체할 필요가 없다.

문제가 됐던 독일 공산당의 강령은 ‘마르크스-레닌주의 사회발전 노선’이었다. 이를 위해 공산당은 교육용 당원 교재 등에 ‘아데나워 정권의 혁명적 전복’ 등을 구체적으로, 공공연히 명시했다. 공산당이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을 통한 ‘사회주의-공산주의적 사회질서’를 추구한다는 사실은 당시 서독 시민에게 큰 의심 없이 받아들여졌다. 오랫동안 독일 공산당 해산에 관한 연구를 해온 호르스트 마이어 변호사는 3월27일 <한겨레> 인터뷰에서 “공산당 관계자들의 정치적 구호와 선전 문구는 ‘혁명’ ‘전복’ 등 대단히 과격했지만 실제로는 아데나워 정권을 무너뜨릴 수 있는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았고 구체적 계획도 갖고 있지 않았다. 연방헌재는 현실적인 위험이나 행동을 해서가 아니라 위험적 발언을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해산의 근거가 충분하다고 본 것”이라고 말했다.

독일 공산당이 해산을 피할 수 없었던 배경이 하나 더 있었다. 바로 아데나워 정권의 정치적 필요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5.7%의 지지율을 얻어 초대 연방의회에 진출한 독일 공산당은 동독이나 소련의 정치적 입장을 대변하는 듯한 행태를 자주 보여 2대 총선에서는 원내 진출에 실패했다. 서독 사회에 미치는 정치적 영향력이 극히 미미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도 아데나워 정권이 해산을 밀어붙인 이유는 독일 재무장 때문이었다. 1950년대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NATO) 창설을 맞아 아데나워 정권은 독일 재무장 계획을 추진했다. 이에 반대했던 독일 공산당은 반전·평화운동에 앞장서며 의석수로 나타나지 않는 영향력을 과시했다. 아데나워 정권에 맞서 평화운동을 활발히 펼쳐가던 독일 공산당이 해산되자 독일 사회는 급속도로 경직됐다. 재무장 반대 여론도 위축됐고, 결국 독일 재무장은 아데나워의 뜻대로 이뤄졌다.

독일에서는 공산당 이전에도 1952년 사회주의제국당(SRP)이 해산된 적이 있다. 두 정당 해산 사례는 각각 어떻게 다른가?

“사회주의제국당에 대한 해산 심판은 공산당에 견줘 상대적으로 빨리 진행됐다. 이 정당은 나치당의 후계 정당이었다는 것을 거의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독일 기본법에서는 국가사회주의 곧 나치즘에 대한 금지를 명문화하고 있는데, 사회주의제국당은 누가 보더라도 바로 이 나치즘을 실현하려는 것으로 보였다. 사회주의제국당 해산을 둘러싼 논란은 존재하지 않았다. 공산당에 대한 심판은 달랐다. 독일에서 공산당은 오래전부터 존재해왔다. 나치가 집권하기 전에도, 제2차 세계대전 전에도 공산당은 있었다. 연방헌재재판관들은 이러한 역사적 맥락 아래에서 공산당의 강령에 대한 검토를 거쳐 이 정당이 민주적인 기본질서를 추구하고 있는지 판단해야 했다.”

독일에서 정당 해산의 역사와 정당해산 제도의 역사는 조금 다르다. 앞서 소개한 것처럼 히틀러와 전체주의 정당인 나치당은 1933년 정권 유지에 걸림돌이 되는 공산당 등 다른 정당을 무차별적으로 해산한 뒤 독재 체제를 완성했다. 불법적이고도 자의적인 정당 탄압이었다. 독일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기본법 제21조에 “목적이나 추종자의 행태에 의할 때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침해 또는 폐기하려 하거나 또는 독일연방공화국의 존립을 위태롭게 하려는 정당은 위헌”이라고 규정한 직접적 이유는 나치의 이런 행태에 대한 반성이었다.

호르스트 마이어 변호사는 “독일이 정당해산 제도를 마련한 배경은 과거 공산당을 불법적으로 해산한 나치당처럼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고의로 파괴하려는 세력을 겨냥한 것으로, 이때 정당 해산의 기준이 될 수 있는 것은 일정한 정치적 경향이 아니라 극단주의”라고 지적했다. 전후 서독에서 과거 히틀러 친위대와 독일군 출신이 모여 공공연히 나치즘을 계승한다고 표방한 사회주의제국당은 일부 지역에서는 심지어 나치 깃발을 다시 치켜들기도 했다. 당시 아데나워 정부는 1951년 5월 연방헌법재판소에 이 정당의 해산을 청구했고, 서독 헌재는 1년 반 만에 해산을 명령했다.

오랫동안 독일 공산당 해산에 관한 연구를 해온 호르스트 마이어 변호사는 “과거 독일이 정당 해산의 기준으로 삼은 것은 일정한 정치적 경향이 아니라 극단주의였다”고 말했다.
오랫동안 독일 공산당 해산에 관한 연구를 해온 호르스트 마이어 변호사는 “과거 독일이 정당 해산의 기준으로 삼은 것은 일정한 정치적 경향이 아니라 극단주의였다”고 말했다.
공산당, KPD에서 DKP로 이름만 바꿔 부활

독일 공산당 해산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나. 당시 독일 연방헌재의 판단은 정당했다고 생각하나?

“(웃음) 1956년에 이뤄진 법적 판단과 2014년의 판단은 각기 다를 수 있다. 개인적 의견이라는 점을 전제로 말하면, 나는 정당 금지가 정치적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효과적 해결책이 아니라고 믿는다. 터키에서는 20여 차례의 정당 해산이 이뤄졌고, 이에 대해 유럽인권재판소는 이러한 정당 금지 조처가 유럽인권협약에 위배된다는 판결을 여러 차례 내렸다.

터키 정부는 이런 판결을 무시한 채 정당 해산 및 금지를 강행했다. 그러면 터키에서는 이를 대체하는 또다른 정당이 만들어졌고, 그 정당은 다시 해산되기를 되풀이했다. 결국 터키 정부는 정당 해산이라는 법적 수단으로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정당해산 제도 자체에 일정한 한계가 있다는 뜻으로 들린다.

“앞서 방어적 민주주의라는 개념에 대해 설명했는데, 나는 위협적 존재로부터 민주적 기본질서를 지켜내야 한다는 취지 자체에는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누가 누구를 위협적 존재로 규정할 것인지, 어떤 상황에서 해당 규정을 적용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는 남는다. 정당 해산이라는 절차는 특정 정당의 해체를 법의 이름으로 명령하는 것인데, 그렇게 한다고 해서 그 정당이 추구하는 가치나 사상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금지 대상이 된 정당은 정치적 탄압에 의해 희생됐다는 이유로 더 우상화되기도 한다. 만약 어떤 정당의 활동을 금지하고자 한다면, 정당 해산에 필요한 법적 요건을 충분히 검토하는 것을 넘어 그게 의미 있는 정치적 행위인지에 대한 판단이 중요하다.”

특정 정당이 민주적 기본질서를 추구하는지, 또는 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협하는지 여부에 대한 판단은 어떤 기준으로 내릴 수 있나?

“독일 공산당 해산 심판에 대한 판결문을 보면 이 정당의 강령을 뒷받침하는 기본사상은 무엇이고 어떠한 용어가 동원됐는지 설명하는 데 상당 부분을 할애했다. 거기에 사용된 단어를 모두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당연히 위험한 정당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이들 강령이 단지 정치적 구호에 그친 것으로, 실제 폭력적 행위를 할 의사가 없었다면 충분한 위협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당시 재판부는 정치적 구호라 할지라도 혁명적 전복을 추구한 것이라면 해산의 근거가 된다고 본 것이다. 오늘날의 기준은 조금 다르다. 독일 민족민주당 재판 과정을 보면 재판부는 단순히 강령만을 살피지 않고, 정당 관계자들이 어떤 활동을 했는지 등 실제 폭력적 수단을 동원했는지 고려했다. 곧 강령만이 아니라 실제 행위를 실천에 옮겼는지 함께 고려했다.”

독일 공산당은 1956년 해산 이후 10여년 만인 1968년 빌리 브란트 사민당 정권 아래에서 사실상의 재창당에 성공했다. 정당 이름도 해산 이전의 공산당(KPD·카페데)와 비슷한 공산당(DKP·데카페)였다. 데카페는 누가 보더라도 독일 공산당의 대체 정당이었지만 빌리 브란트 정권은 굳이 이를 해산하려 하지 않았다.

좌파 정당이었던 데카페 대신 해산 논란에 휩싸인 정당은 신나치주의 극우 정당인 독일 민족민주당(NPD·엔페데)이었다. 독일 정부는 2001년 연방헌재에 민족민주당에 대한 해산을 청구했다. 이 과정에서 한국의 국가정보원에 해당하는 독일 정부의 헌법보호청 소속 요원의 상당수가 정보 수집 목적을 내세워 이 정당에 가입해 활동한 사실이 드러나며 독일 정부의 민족민주당 해산 청구는 법적 정당성 논란에 휘말렸다. 독일 민족민주당이 이 사건을 이유로 독일 정부의 해산 청구 자체를 문제 삼자 2003년 연방헌재는 이 정당에 대한 해산 심판 사건을 종료했다. 그러나 독일 연방참사원(상원)은 2013년 12월 민족민주당 해산을 다시 연방헌재에 청구했다. 독일 민족민주당에 대한 해산 심판 사건은 현재 연방헌재에서 진행되고 있다.

만약 호프만림 재판관 당신이 1956년 연방헌재 재판관이었다면 어떤 결정을 내렸겠는가?

“1956년의 연방헌재 판결문을 오늘날 다시 읽어보면, 독일 공산당이 실제로 얼마나 위험한 세력인지에 대한 판단을 내리기는 쉽지 않다. 그사이 많은 것이 변했다. ‘아데나워 정권의 혁명적 전복’ 등 독일 공산당의 정치적 구호에 얼마나 진정성이 담겨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나라면 다른 결정을 내렸을 것이다. 다만 당시 연방헌재가 어떤 의도를 갖고 공산당 해산 결정을 내렸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특정 정당에 대한 해산을 포함한 예방적 차원의 법적 제재가 가능해질 때 지배계급, 또는 지배적 정치세력이 이 제도를 악용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러한 우려는 어떻게 해소할 수 있는가?

“정부와 정부의 입김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기관이 마음먹기에 따라 그런 우려는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다. 다만 독일에서는 정치권이 정당 해산 심판 등을 청구할 때, 독립성을 갖춘 연방헌재가 그 정당성을 꼼꼼히 판단함으로써 그런 우려를 최소화하고 있다. 독일 연방헌법재판소 재판부는 8명의 재판관으로 구성되는데 각기 다른 사회·정치적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 따라서 편향적 판결의 위험성은 적다.”


볼프강 호프만림 전 재판관
“터키의 사례처럼 정당 없애도
비슷한 조직은 계속 만들어져
특정 사상 없애는 건 불가능
어느 정당을 해산하려고 하면
그 구체적 위험성을 입증해야”

호르스트 마이어 공산당해산 연구가
“공산당 관계자들의 정치구호는
과격했지만 정권을 무너뜨릴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고
구체적 계획도 전혀 없었다
위험한 발언만으로 해산한 것”

정당의 운명은 대중의 정치적 논쟁에 맡겨라

호프만림 당신은 전직 연방헌재 재판관이며, 동시에 베니스위원회 독일 쪽 위원이기도 하다. 정당 해산에 관해 베니스위원회가 권고한 기준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독일 공산당 해산은 베니스위원회의 가이드라인을 준수했다고 보나?

“베니스위원회가 제시하고 있는 정당 해산의 세 가지 주요 원칙은 첫째, 정당 해산의 근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정당이 위험성을 갖고 있어야 하며, 셋째 비례성의 원칙이 준수되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이 말은 정당 해산이라는 제도가 갖는 위험성을 충분히 고려했어야 한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고 있다. 1956년 독일 공산당 해산을 결정할 때에도 이 세 가지 원칙에 대한 검토는 이뤄졌다고 생각한다. 다만 각각의 원칙이 모두 정확히 적용됐는지에 대한 의견은 당연히 갈리지만, 오늘날 독일에서 더이상 이에 대한 논란은 벌어지지 않는다. 이는 독일 공산당 해산은 이미 지나간 역사이고, 상당수 학자들을 통해 당시 연방헌재의 판결에 상당한 문제가 있었다는 사실이 지적돼왔기 때문이다.”

1990년 5월 ‘유럽회의’ 산하기관으로 출범한 베니스위원회는 국제법률자문기구로 민주주의·인권보장·법치주의의 세계적 정착을 목표로 체제전환 국가 및 신생 민주주의 국가들에 표준 법률제도 제공 및 입법활동 지원 등을 수행하고 있다. 공식 이름은 ‘법을 통한 민주주의 유럽위원회’다. 유럽 국가를 중심으로 한 48개 회원국이 가입해 있고, 한국도 2006년 6월 정회원국으로 가입해 활동하고 있다.

호프만림 전 재판관이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베니스위원회는 정당에 대한 예방적 금지 및 해산의 기준으로 합법성과 예외성, 비례성 등 세 가지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주요 내용은 이렇다. 첫째, 정당의 금지나 해산은 정당이 민주적 헌정질서를 전복하기 위한 수단으로 폭력을 사용하거나 폭력 행사를 옹호함으로써 헌법에 의해 보장된 권리와 자유를 위태롭게 하는 경우에만 정당화될 수 있다. 둘째, 극단적 조처인 정당의 금지 또는 해산은 극히 제한적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정부 또는 기타 국가기관은 사법기관에 정당의 금지 또는 해산을 요청하기 전에 당해 국가의 상황과 관련하여 정당이 자유롭고 민주적인 정치질서나 개인의 권리에 대하여 실질적인 위험을 초래했는지 여부 또는 좀더 덜 제한적인 방법으로 그러한 위험을 방지할 수 있는지 여부를 고려하여야 한다. 셋째, 정당의 금지 또는 법적으로 강제되는 해산 같은 법적 조처는 사법기관에 의한 위헌 판단의 결과여야 하고 본질상 예외적인 것으로 파악되어야 하며 비례의 원칙에 따라야 한다. 이러한 조처는 정당의 개별적 구성원뿐만 아니라 정당 자체가 위헌적 수단을 사용하거나 그 사용을 준비하는 정치적 목적을 추구한다는 충분한 증거에 입각하여야 한다.

1956년 독일 공산당 해산과 1968년 재창당을 통해 독일 사회가 얻은 역사적 교훈은 무엇인가?

“우리가 얻은 것은 정당 금지를 통해 특정 사상을 없애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경험이었다. 터키의 사례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어떤 정당을 없앤다고 해도 비슷한 정치조직은 계속 다시 만들어질 것이다. 꼭 어떤 정당을 해산하고자 한다면, 엄격한 형식적 요건을 갖추는 것만이 아니라 내용적으로도 그 정당이 빚어낼 수 있는 구체적 위험성을 입증해내야만 한다. 이 모든 조건이 채워지지 않는다면 그 정당의 운명은 국민 다수가 참여하는 정치적 논쟁에 맡겨야 옳다.”

함부르크(독일)/글·사진 최성진 기자 cs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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