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희생자 이창현군의 아버지 이남석씨가 12일 오후 국회 본청을 방문해 농성했던 장소를 살펴본 뒤 계단을 내려서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토요판] 르포
‘세월호 유가족’이 겪은 한국정치 206일
‘세월호 유가족’이 겪은 한국정치 206일
▶ 세월호가 304명을 싣고 침몰한 지 206일째인 지난 7일,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이 통과됐다. 국회 본회의장 전광판에 특별법이 통과됐음을 알리는 숫자가 들어오자, 방청객 사이에서 울음이 터져나왔다. 그동안 국민들에게 응원과 모욕을 동시에 받아온 세월호 유족들이었다. 세월호 특별법 통과를 촉구하며 광화문광장, 국회, 청와대 앞을 오갔던 단원고 학부모 이남석씨를 만나 한국 정치의 민낯을 목도한 소감을 들었다.
추석을 사흘 앞둔 날이었다. 차례를 지내는 심정으로, 9월5일 경기 안산 화랑유원지에 설치된 세월호 희생자 합동분향소를 찾았다. 마침 단원고 교사와 학생들이 제자와 친구들을 만나러 와 있었다. 압도적인 죽음의 제단 앞에서 그들은 차마 발을 떼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영정사진 앞엔 가족과 친구들이 쓴 편지들이 놓여 있었다. 그들의 마음에 남은 아이들은 죄다 착하고, 예쁘고, 귀엽고, 재주 많고, 사랑스러웠다.
안타까운 사연들 속에서 유독 눈에 띄는 편지가 있었다. 수신자는 단원고 2학년5반 이창현. 창현이 엄마는 더이상 볼 수 없는 그리운 아들을, 너무나 평범한 아이로 묘사하고 있었다.
“넌 그리 잘나지도 않았고, 공부를 잘하는 것도 아니었고, 특별히 꿈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것도 아니었고, 운동을 특출나게 잘하는 것도 아니었고, 엄마에게 살갑게 다가오는 아들도 아니었고, 그저 친구들과 노는 것을 제일 좋아하며, 배부르면 행복해하고,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교회에서도 있는 듯 없는 듯 그저 평범한 아이였지. 그래, 그게 너였어. 드러나진 않지만 네가 있어야 할 자리엔 분명히 네가 있었지. 그거면 충분했어. 그거면 너무 충분한 거였어. 그거면 되는데…. 네가 있어야 할 자리에 네가 있는 것 그거면 되는데…. 그거면 충분한데….” 곁에 있어도 있는 듯 없는 듯했던 평범한 아들이 사라진 자리에서, 엄마는 편지를 끝맺지 못했다.
“세월호 선장보다 심재철·조원진이 더하다”
그렇게 창현이 엄마를 글로 만난 지 55일째 되던 10월29일, 한 남자가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시정연설을 하러 박근혜 대통령이 국회를 찾은 날이었다. 국회 본관 앞에 깔린 붉은 카페트를 걸어오는 대통령에게 “살려달라”고 외치던 그는 대통령이 눈길 한번 안 주고 돌아가자, 김 대표에게 매달렸다. “세월호 특별법 제정되도록 도와달라”고 애걸복걸하던 그는 급기야 차에 올라타는 김 대표를 붙잡으려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맞잡았다. 그 장면은 비정한 정치의 상징적 장면으로 남았다.
그로부터 이틀 뒤 여야는 세월호 특별법에 최종 합의했고, 일주일 뒤엔 특별법이 본회의를 통과했다. 그러나 여당 대표에게 ‘죄인’처럼 빌던 그를 잊을 수 없었다. 지난 12일, 그가 주저앉았던 곳, 국회 본청 앞에서 그를 만났다. 이남석(50)씨. 만나보니 그는 바로 그 평범한 아이, 창현이의 아빠였다.
창현 아빠의 인생은 사고 이튿날인 4월17일 싸늘하게 식은 아들을 품에 안은 뒤부터 변했다. 비록 아들을 구할 순 없었지만, 왜 죽었는지조차 밝혀내지 못하는 무능한 아빠가 되긴 싫었다. 10여년째 해오던 대리기사 사업을 접었다. 단원고 학부모 중심으로 꾸려진 가족대책위에서 자문위원을 맡았고, 대한변호사협회(변협),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과 함께 4·16특별법안을 만드는 작업에 참여했다.
창현 아빠가 처음 국회를 찾은 것은 5월27일이었다. 국회 본회의에서 세월호 침몰사고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 특위 계획서가 채택되는 ‘역사적’ 장면을 보기 위해서였다. 여야는 본래 이날 오전 국정조사 대상과 범위, 시기 등 특위 활동을 명시한 계획서를 합의한 뒤 오후에 본회의를 열어 이를 의결할 계획이었다. 창현 아빠는 국조 계획서가 통과되는 걸 믿어 의심치 않았다. “세월호 특별법도 즉각 제출하고 필요하다면 특검도 실시하겠다”며 박근혜 대통령이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전국에 방송된 지 열하루밖에 되지 않았고, 6·4 지방선거도 코앞이었다. 그러나 여당은 김기춘 대통령 비서실장을 국조 증인으로 채택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언론에만 오르내리던 ‘기춘대원군’의 힘을 새삼 느꼈다. “빨리 합의를 하고 오라고 여야 협상 대표를 회의장에 밀어넣었지만, 여당 의원들은 천장만 쳐다봤다. 왜 합의를 빨리 하지 않느냐고 해도 대꾸하지 않았다. 뉴스엔 정치인들이 좋은 얘기 몇마디 하는 것만 나와서 그러려니 했는데 실상은 전혀 달랐다. 그때 알아봤어야 했다. 여당은 시간을 질질 끌다가 유족들이 나가떨어지길 바랐던 거였다.”
창현 아빠는 “당시만 해도 가족대책위 집행부는 정치적으로 휩쓸리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말 그대로 ‘순수한 유가족’이고자 했다”고 말했다. 유족들은 여야 협상이 파탄나고, 국조가 파행을 겪는 장면을 목도하면서도, 여야를 모두 함께 비판했다. 여야가 대립하며 상임위가 파행되면, 일부 언론들은 싸우는 이유가 뭐든 상관없이 텅 빈 회의장을 가리키며 “국회의원들은 일도 안 하면서 매달 세비는 꼬박꼬박 받아간다”고 보도한다. 유족들도 국조 협상이 막다른 골목에 이르자, 국회 본청 앞 계단에서 “국회는 제발 일 좀 해라”라고 부르짖었다.
가까스로 국조가 시작됐지만 곳곳에 암초가 널려 있었다. “국조 방청하러 여러 번 회의장에 갔다. 여당 의원들은 말도 안 되는 걸로 트집 잡았다. 김광진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해경과 청와대 사이에 오간 통화 녹취록을 얘기하다가 ‘브이아이피(VIP)가 영상 중계 화면을 제일 좋아한다’고 말했다가 꼬투리가 잡혔다. 김 의원이 사과했는데도 여당은 계속 사퇴를 요구하며 회의를 열지 않았다.”
창현 아빠는 가장 가슴 아팠던 일로, 국정조사 특위의 여당 간사인 조원진 의원이 세월호 참사를 조류인플루엔자(AI)에 비유했던 것과 심재철 국조 특위 위원장이 “수학여행을 가다가 희생된 사건을 특별법을 만들어 보상해달라는 것은 이치에 어긋난다”는 글을 지인들에게 카카오톡으로 보냈던 것을 꼽았다. 창현 아빠는 “솔직히 36년 징역형 받은 세월호 선장보다도 심재철·조원진 의원이 더 밉다”고 말했다.
세월호 특별법 협상이 공전을 계속하자, 7월14일 유족들은 광화문과 청와대 앞에서 단식농성을 시작했다. “유족들이 모여서 특별법을 통과시켜야 하니 뭘 해야 하나 의논하던 중 누군가가 단식하면 어떻겠느냐고 아이디어를 냈다. 처음엔 유족 모두 함께 단식하자고 했다가 변호사들이 말렸다. 단식농성은 계획된 게 아니라 뭐라도 해야겠다는 심정으로 시작하게 된 거였다.”
창현 아빠는 광화문광장에서 단식을 시작했다가 나흘째 되던 날 쓰러졌다. 사흘 동안 병원에 입원했다가 퇴원한 뒤로는 청와대 앞과 국회를 오가며 특별법 투쟁에 동참했다. 세월호 참사를 겪은 사람들은 여러 방법으로 호소했다. 세월호 침몰 당시 가까스로 빠져나왔던 단원고 학생들은 특별법을 통과시켜 달라며 안산에서 국회까지 1박2일 동안 37㎞를 걸었다. 세월호 참사 100일을 맞아 유족들은 안산에서 서울시청 앞 광장까지 빗속을 걸었다.
10월29일 김무성 대표 앞에서
죄인처럼 무릎을 꿇고 빌던
창현이 아빠를 잊을 수 없었다
세월호 특별법 최종 합의 뒤
국회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여야 협상 파탄과 국조 파행
목격하며 국회 본청 앞서 농성
광화문서 단식 중 쓰러진 적도
야당과도 소통 불가 절감했다
‘노숙자’ 소리도 들어야 했다 만약 광화문 아닌 국회서 단식했다면? 7·30 재보궐선거는 특별법 통과의 고빗사위였다. 특별법 협상에서 누가 주도권을 쥐느냐는 선거 승패에 달려 있었다. 새정치민주연합의 동작을 공천 파동이 벌어지면서 초반만 해도 야당에 유리할 듯하던 분위기는 날로 바뀌었다. 마음이 급했다. “야당은 공천하면서 민심을 잘못 읽었다. 동작을을 보니 노회찬(정의당), 기동민(새정치연합) 후보 두 사람 다 나오면 도저히 새누리당을 이길 수 없을 거 같았다. 농성장을 방문했다가 명함을 건넨 의원들한테 문자까지 보냈다. ‘국민이 누구를 원하는지 심사숙고해서 민주당이 대의를 지켜달라’고.” 7·30 재보궐선거가 야당의 참패로 끝난 뒤, 유족들에겐 계속 불리한 상황이 펼쳐졌다. 유족들과 새정치연합 사이엔 소통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유족들은 박영선 새정치연합 원내대표가 서명한 세월호 1차 협상(8월7일), 2차 협상(8월19일)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누구보다도 야성이 강하고 똑부러진다고 생각했던 박 원내대표가 왜 그렇게 급히 합의를 해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다른 의원들한테 물어봐도 자기들도 모른다며 고개만 젓더라.” 2차 협상까지 불발된 뒤 유족들은 8월 말부터 새누리당과 접촉을 시작했다. 추석 전까지는 타결되지 않겠느냐는 기대감도 있었다. “그러나 새누리당은 변한 게 없었다. 이완구 새누리당 원내대표한테 ‘유족들은 진상조사위원회에 수사권·기소권을 주는 것을 원한다’고 말했더니, 이 원내대표는 ‘엥? 무슨 소리냐? 나는 박영선 원내대표한테 기소권 달라는 얘기는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며 발뺌했다.” 창현 아빠는 애초부터 여야와 유족들이 함께하는 ‘특별법 제정 3자협의체’가 만들어졌더라면 이처럼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당은 물론이고, 솔직히 야당조차도 유족들이 협상장에 나서기를 바랐는지 잘 모르겠다. 정치인들은 항상 정치는 자기네들만 하는 거라고 생각하니까.” 야당이 3자협의체를 주장한 것은 2차 협상이 무산된 뒤 궁지에 몰리고 난 뒤였다. 국회에서 특별법 협상은 꼬일 대로 꼬여갔고, 유족들의 페이스북엔 비난하고 조롱하는 댓글들이 주렁주렁 달렸다. 카카오톡엔 유족들에 대한 마타도어가 나돌았다. “참 힘든 시간이었다. 그러나 우리 곁엔 늘 함께 아파하는 시민들이 있었다. 어느날 청와대 앞 농성장에 경북 문경에서 학교를 다닌다는 여고생이 찾아왔다. 수학여행비를 시민단체에 기부하고, 수학여행 기간인 2박3일 동안 우리들과 노숙농성하고 싶다고 했다. 서울 마포구 성산동에 사는 사람들은 각자 집에서 음식을 해서 가지고 왔는데 반찬이 모두 24가지나 됐다. 어느 날 밤엔 취직준비 한다는 젊은이들 두명이 박카스를 들고 찾아왔다. 직장이 없으니 주머니에 돈 한푼 있을까 싶었다. 너무 고마웠다.” 그는 “유민 아빠 김영오씨가 광화문이 아니라 국회에서 단식을 했더라면 46일 동안이나 단식을 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국회에서 농성하는 것은 훨씬 더 힘든 일이었다. 한 여당 의원은 우리를 ‘노숙자’라고까지 하지 않았나. 광화문엔 우리를 응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버틸 수 있었다.” 화장실 사용 놓고 사무처 직원과 갈등 창현 아빠는 유족들이 긴 밤을 새웠던 본청 앞을 쓸쓸한 눈으로 바라봤다. 정수리가 아프도록 햇살이 꽂히던 잔인한 여름은 지나가고 이젠 찬 바람에 옷깃을 여미는 계절이 됐다. 국회 사무처는 특별법이 통과된 이튿날인 지난 8일, 텐트, 깔개, 의자 같은 비품을 모두 치웠다. 말끔해진 그곳은 수없이 고함치고, 울부짖고, 절망했던 장소였다. 유족들은 이곳에서 화장실 사용 같은 ‘사소하고도 중요한’ 문제들을 놓고 국회 사무처 직원들과 수없이 얼굴을 붉혔다. 그러나 유족들의 국회 농성을 곁에서 지켜봤던 직원들도 눈물을 훔칠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인터뷰를 하러 국회에 온 창현 아빠 얼굴을 알아본 한 방호원은 “때로는 유족들이 우리를 향해 욕설을 퍼붓곤 했다. 그러나 나도 자식이 있는 사람 아닌가. ‘애들 잃은 저 사람들 속이 얼마나 시커멀까’ 생각하면서 견뎠다. 그런데 정작 새누리당 의원(김태흠)이 유족들이 전깃줄에 수건 널어놓은 걸 가리키며 ‘노숙자’라고 말하는 걸 보니 너무 심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창현 아빠는 지난달 박근혜 대통령이 국회를 방문했을 때 유족들의 손을 잡아주거나 말을 걸어줄 거라고 진심으로 믿었다고 했다. “살려달라고 외치면 눈길이라도 돌릴 줄 알았다. 우리는 대통령 온다고 국회 경내에 들여보내지 않을까봐 아예 전날 밤부터 국회에 와서 기다렸는데…. 대통령이 그냥 가버리자 실망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김 대표한테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김 대표가 참 미웠지만, 내가 힘없는 아빠니까, 자식 죽은 이유도 밝히지 못하는 무능한 아빠니까 무릎을 꿇었던 거다.” 특별법이 본회의를 통과하던 지난 7일, 창현 아빠는 그날도 ‘유족의 뜻을 반영하는 특별법을 통과시키라’며 국회 본청 앞에서 일인시위를 벌였다. 이미 여야 합의가 끝났고, 합의안 대로 본회의를 통과할 줄 알고 있었지만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평범했던 아이의 평범했던 아빠 이남석씨. 어떤 사람들의 눈엔, 그는 더이상 ‘순수한 유가족’이 아닐지 모른다. 그는 가족대책위 안에 꾸려진 진상조사위원회 간사로 활동을 시작했다. 아내 최순화(50)씨 역시 지역 시민단체들이 마련한 각종 간담회에 참석하느라 매일 전국을 누비고 있다. 이유주현 기자 edigna@hani.co.kr
10월29일 오전 이남석씨가 국회 본청 앞에서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에게 “세월호 특별법 제정 꼭 도와주십시오”라며 무릎 꿇고 간절히 요청하는 장면. 오마이뉴스 제공
죄인처럼 무릎을 꿇고 빌던
창현이 아빠를 잊을 수 없었다
세월호 특별법 최종 합의 뒤
국회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여야 협상 파탄과 국조 파행
목격하며 국회 본청 앞서 농성
광화문서 단식 중 쓰러진 적도
야당과도 소통 불가 절감했다
‘노숙자’ 소리도 들어야 했다 만약 광화문 아닌 국회서 단식했다면? 7·30 재보궐선거는 특별법 통과의 고빗사위였다. 특별법 협상에서 누가 주도권을 쥐느냐는 선거 승패에 달려 있었다. 새정치민주연합의 동작을 공천 파동이 벌어지면서 초반만 해도 야당에 유리할 듯하던 분위기는 날로 바뀌었다. 마음이 급했다. “야당은 공천하면서 민심을 잘못 읽었다. 동작을을 보니 노회찬(정의당), 기동민(새정치연합) 후보 두 사람 다 나오면 도저히 새누리당을 이길 수 없을 거 같았다. 농성장을 방문했다가 명함을 건넨 의원들한테 문자까지 보냈다. ‘국민이 누구를 원하는지 심사숙고해서 민주당이 대의를 지켜달라’고.” 7·30 재보궐선거가 야당의 참패로 끝난 뒤, 유족들에겐 계속 불리한 상황이 펼쳐졌다. 유족들과 새정치연합 사이엔 소통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유족들은 박영선 새정치연합 원내대표가 서명한 세월호 1차 협상(8월7일), 2차 협상(8월19일)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누구보다도 야성이 강하고 똑부러진다고 생각했던 박 원내대표가 왜 그렇게 급히 합의를 해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다른 의원들한테 물어봐도 자기들도 모른다며 고개만 젓더라.” 2차 협상까지 불발된 뒤 유족들은 8월 말부터 새누리당과 접촉을 시작했다. 추석 전까지는 타결되지 않겠느냐는 기대감도 있었다. “그러나 새누리당은 변한 게 없었다. 이완구 새누리당 원내대표한테 ‘유족들은 진상조사위원회에 수사권·기소권을 주는 것을 원한다’고 말했더니, 이 원내대표는 ‘엥? 무슨 소리냐? 나는 박영선 원내대표한테 기소권 달라는 얘기는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며 발뺌했다.” 창현 아빠는 애초부터 여야와 유족들이 함께하는 ‘특별법 제정 3자협의체’가 만들어졌더라면 이처럼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당은 물론이고, 솔직히 야당조차도 유족들이 협상장에 나서기를 바랐는지 잘 모르겠다. 정치인들은 항상 정치는 자기네들만 하는 거라고 생각하니까.” 야당이 3자협의체를 주장한 것은 2차 협상이 무산된 뒤 궁지에 몰리고 난 뒤였다. 국회에서 특별법 협상은 꼬일 대로 꼬여갔고, 유족들의 페이스북엔 비난하고 조롱하는 댓글들이 주렁주렁 달렸다. 카카오톡엔 유족들에 대한 마타도어가 나돌았다. “참 힘든 시간이었다. 그러나 우리 곁엔 늘 함께 아파하는 시민들이 있었다. 어느날 청와대 앞 농성장에 경북 문경에서 학교를 다닌다는 여고생이 찾아왔다. 수학여행비를 시민단체에 기부하고, 수학여행 기간인 2박3일 동안 우리들과 노숙농성하고 싶다고 했다. 서울 마포구 성산동에 사는 사람들은 각자 집에서 음식을 해서 가지고 왔는데 반찬이 모두 24가지나 됐다. 어느 날 밤엔 취직준비 한다는 젊은이들 두명이 박카스를 들고 찾아왔다. 직장이 없으니 주머니에 돈 한푼 있을까 싶었다. 너무 고마웠다.” 그는 “유민 아빠 김영오씨가 광화문이 아니라 국회에서 단식을 했더라면 46일 동안이나 단식을 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국회에서 농성하는 것은 훨씬 더 힘든 일이었다. 한 여당 의원은 우리를 ‘노숙자’라고까지 하지 않았나. 광화문엔 우리를 응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버틸 수 있었다.” 화장실 사용 놓고 사무처 직원과 갈등 창현 아빠는 유족들이 긴 밤을 새웠던 본청 앞을 쓸쓸한 눈으로 바라봤다. 정수리가 아프도록 햇살이 꽂히던 잔인한 여름은 지나가고 이젠 찬 바람에 옷깃을 여미는 계절이 됐다. 국회 사무처는 특별법이 통과된 이튿날인 지난 8일, 텐트, 깔개, 의자 같은 비품을 모두 치웠다. 말끔해진 그곳은 수없이 고함치고, 울부짖고, 절망했던 장소였다. 유족들은 이곳에서 화장실 사용 같은 ‘사소하고도 중요한’ 문제들을 놓고 국회 사무처 직원들과 수없이 얼굴을 붉혔다. 그러나 유족들의 국회 농성을 곁에서 지켜봤던 직원들도 눈물을 훔칠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인터뷰를 하러 국회에 온 창현 아빠 얼굴을 알아본 한 방호원은 “때로는 유족들이 우리를 향해 욕설을 퍼붓곤 했다. 그러나 나도 자식이 있는 사람 아닌가. ‘애들 잃은 저 사람들 속이 얼마나 시커멀까’ 생각하면서 견뎠다. 그런데 정작 새누리당 의원(김태흠)이 유족들이 전깃줄에 수건 널어놓은 걸 가리키며 ‘노숙자’라고 말하는 걸 보니 너무 심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창현 아빠는 지난달 박근혜 대통령이 국회를 방문했을 때 유족들의 손을 잡아주거나 말을 걸어줄 거라고 진심으로 믿었다고 했다. “살려달라고 외치면 눈길이라도 돌릴 줄 알았다. 우리는 대통령 온다고 국회 경내에 들여보내지 않을까봐 아예 전날 밤부터 국회에 와서 기다렸는데…. 대통령이 그냥 가버리자 실망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김 대표한테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김 대표가 참 미웠지만, 내가 힘없는 아빠니까, 자식 죽은 이유도 밝히지 못하는 무능한 아빠니까 무릎을 꿇었던 거다.” 특별법이 본회의를 통과하던 지난 7일, 창현 아빠는 그날도 ‘유족의 뜻을 반영하는 특별법을 통과시키라’며 국회 본청 앞에서 일인시위를 벌였다. 이미 여야 합의가 끝났고, 합의안 대로 본회의를 통과할 줄 알고 있었지만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평범했던 아이의 평범했던 아빠 이남석씨. 어떤 사람들의 눈엔, 그는 더이상 ‘순수한 유가족’이 아닐지 모른다. 그는 가족대책위 안에 꾸려진 진상조사위원회 간사로 활동을 시작했다. 아내 최순화(50)씨 역시 지역 시민단체들이 마련한 각종 간담회에 참석하느라 매일 전국을 누비고 있다. 이유주현 기자 edig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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