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14일 세종시에 개관한 대통령기록관 4층 전시실. 역대 대통령의 얼굴과 선거포스터, 선거유세 모습이 보인다. 세종/연합뉴스
[토요판] 뉴스분석 왜?
박근혜 대통령 ‘존영’ 논란
박근혜 대통령 ‘존영’ 논란
▶ 지난 3월28일 박근혜 대통령 얼굴사진을 두고 ‘소유권 분쟁’이 있었다. 새누리당 대구시당이 공천 배제 뒤 탈당한 의원들에게 “대통령 존영을 반납하라”고 요구하며 불거졌다. ‘갈라선 식구들’ 사이에서 벌어진 분쟁은 집 밖으로 번져 ‘용어의 적절성’ 공방으로 옮아갔다. 한국 현대사엔 역대 대통령 얼굴사진이 남긴 이야기들이 적지 않다. 그 이야기엔 당대의 시대상과 정권의 성격이 반영돼 있다. <한겨레> 토요판이 ‘존영’의 명멸을 살폈다. 대통령이 얼굴사진의 권위에 집착할수록 국민 얼굴에 파인 주름도 깊어졌다.
존영은 단어에 ‘높을 존(尊)’을 갖는다. 공경하다, 우러러보다, 중히 여긴다는 뜻으로도 ‘존’은 풀이된다. 존귀, 존엄, 지존과 공통의 글자를 지닌 존영은 ‘얼굴사진의 최고 지위’를 누린다. 한낱 사진과 그림이 “남의 사진이나 화상 따위를 높여 이르는”(표준국어대사전) 존영의 격을 따를 순 없다.
그들의 얼굴사진은 살아 있는 성역
왕조시대엔 어진(임금의 얼굴을 그린 그림)이 있었다. 어진은 곧 왕이었다. 존귀하고, 존엄하며, 지존했다. 종이에 먹을 긋고 색을 입힌 그림 앞에서 백성들은 머리를 조아리고 부복했다. 진전(어진을 봉양하는 건물)을 지어 고이 모셨고, 옮길 땐 가마에 태워 예를 갖췄다. 어진이 훼손되면 신하들과 왕실 여인들이 하얀 옷을 입고 곡을 했다.
몰락한 왕조를 이은 초대 대통령은 본인의 얼굴사진에 어진의 권위를 부여했다. 1950년 전쟁 발발 직후 일본에서 인쇄된 최초의 한국은행권(1천원권)엔 한강 다리를 끊고 도망간 이승만의 얼굴이 새겨졌다. 주일 대표부에 걸려 있던 그의 초상화가 도안으로 쓰였다. 1956년에 나온 500환권은 이승만의 얼굴을 지폐 중앙에 배치했다. 사람들이 돈을 반으로 접을 때마다 그의 얼굴도 따라 접혔다. ‘국부’의 얼굴이 두 동강 나는 사태를 용납할 수 없었던 정권은 그의 얼굴을 지폐 오른쪽으로 옮겨 인쇄했다. 죽은 위인들도 치열하게 다투는 화폐 모델의 영예를 1950년대엔 살아 있는 현직 대통령의 얼굴이 독점했다.
행정부 수장인 이승만은 입법부 분과위원회 방마다 자신의 얼굴사진을 걸었다. “삼권분립 국가에서 대통령이 입법부에 압력을 가하는 행위”라며 야당이 반발했으나 무시됐다. 이승만의 얼굴사진은 그 자체로 성역이었다. 술집에서 그와 부통령 이기붕의 사진을 욕한 백아무개씨는 명예훼손으로 징역을 살았다. 4·19 혁명 두 달 전엔 자유당 전남도당 게시판의 이승만 사진에 욕설을 퍼부은 청년이 경찰 수배자 명단에 올랐다.
종신독재의 길을 닦던 시절 박정희의 얼굴사진에도 최고 권력자의 권위가 이입되고 있었다. 1969년 초 3선 개헌 여부를 놓고 공화당 의원총회에서 찬반토론이 벌어졌다. 정간용 의원이 발언했다. “나는 변소에 가더라도 대통령 사진이 실린 신문이 있으면 깨끗한 곳에 모실 정도로 마음속으로 박 대통령을 생각하고 있다.”
유신헌법 공포 이후 박정희 얼굴사진이 <한국방송>(KBS) 뉴스를 탔다. 편집자의 손자국이 사진에 묻은 채 방송됐다. 뉴스가 끝난 뒤 ‘기관원들’이 들이닥쳐 편집자를 폭행했다. 이 사건 뒤 케이비에스엔 대통령 사진을 ‘모셔두는’ 보관함이 생겼다. 박정희 정권은 신문사에도 주기적으로 ‘새 존영’을 내려 바꿔 사용하도록 했다.
죽은 박정희는 “내리는 비도 멈추게 하는 반인반신”(남유진 구미시장 발언)의 반열에 올라 있다. 해마다 그의 생가(경북 구미)에서 ‘탄신제’가 열릴 때면 참석자들이 조선시대 궁중 대례복을 입고 왕 혹은 신이 된 그의 사진 앞에 엎드린다.
박정희가 사망했을 때 정부는 우표 2종을 600만장씩 발행했다. 그의 ‘존영’이 적갈색과 암자색으로 각각 도안됐다. 그의 죽음을 틈타 정권을 획득한 전두환도 취임 기념우표 700만장과 기념시트 70만장을 찍었다. 그의 얼굴과 ‘새 역사의 횃불’을 우표에 담았다.
전두환은 ‘우표 정치’에 집착했다. 그는 재임기간 가장 많은 기념우표를 발행한 대통령이었다. 임기 7년6개월 동안 우표에 46회나 얼굴을 심으며 ‘찬탈한 권위’를 세웠다. 평균 두 달에 한 번꼴로 그를 기념한 우표가 인쇄됐다. 박정희의 얼굴은 18년 동안 24회 우표로 뿌려졌다. 이승만은 11년8개월간 12차례 우표에 등장했다. 노태우·최규하는 취임 때만 한 차례 찍었고, 윤보선의 얼굴이 실린 우표는 제작되지 않았다. ‘전두환 청와대’의 압력이 거듭되면서 체신부가 ‘알아서’ 기념우표를 내기도 했다. 대통령 기념우표의 남발은 우표 수집가들의 불만을 샀다.
이승만 사진 욕했다고 경찰 수배
박정희 사진 손자국 났다고 폭행
전두환 얼굴은 명함판으로 승격
신군부 대통령 사진의 민주화 시련
박정희·전두환 때 ‘존영’ 최다 사용 김대중, 대통령 사진 탈권위 시도
노무현에 이르러 ‘존영’ 거의 소멸
존영의 역사는 한국 현대사 압축판
“한낱 사진이 권력 상징 된 이유는
사진 주인공의 절대권력화 때문” 전두환의 ‘우표 정치’ 전두환은 1979년 12·12 쿠데타로 ‘정권 접수’를 시작했다. 이듬해 6월부터 신문지상에선 ‘권력의 역전’이 일어났다. 최규하 당시 대통령의 이름과 얼굴사진이 신문에서 줄어들고 전두환의 이름을 언급하는 횟수가 늘어났다. 7월이 되면서는 전두환의 얼굴사진도 증명사진 크기에서 명함판 크기의 ‘존영’으로 교체됐다. 내무부 공보과 소속 사진사(모창주)는 전두환 부부를 촬영할 때 특히 긴장했다. “외모가 세상의 입에 많이 오르내린” 그들은 가장 조심스런 피사체였다. “전 대통령은 절대 위에서 내려찍지 않고 우측 15도 각도에서 찍어야 머리숱이 많이 나온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터득했다. 이순자 여사는 턱 때문에 항상 정면사진만 찍어야 했다.”(<동아일보> 1997년 3월19일 보도) 노태우는 1987년 6·10 항쟁의 거대한 분노를 겪고서야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 그도 시대의 요구를 무시하지 못했다. 1988년 2월 대통령취임준비위원회는 “정부기관 외엔 대통령 사진 부착을 재고하고 ‘존영’이란 용어는 사용하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서울시청 현관에 걸린 전임 대통령의 대형 사진 3점을 떼어내되 그 자리에 자신을 밀어 넣지도 않았다. 중앙의 전두환 단독 사진은 어린이들이 만세를 부르는 사진으로, 왼쪽의 전두환 서울대공원 방문 사진은 올림픽 준비 현황 사진으로 교체했다. 전두환이 아시안게임 메달리스트들과 촬영한 오른쪽 사진은 남대문 분수 사진으로 바꿨다. 용어(존영) 사용 자제와는 별도로 얼굴사진은 변함없이 하달했다. 대형 액자는 관공서로 보내 벽에 걸도록 했고, 탁상용 액자는 공무원들 책상에 비치하도록 했다. 민주화는 ‘신군부 대통령’의 얼굴엔 시련이었다. 1988년 봄 서울과 대전에서 ‘노태우 풍자전’이 열렸다. 한국 역사상 현직 대통령을 비판한 첫 전시회였다. 같은 해 10월엔 대학생 23명이 국회 의원회관 정호용(민정당) 의원실에 진입했다. ‘5공 비리 척결과 광주학살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노태우의 액자사진을 창밖으로 내던졌다. 1996년 8월 전두환과 노태우에게 사형과 무기징역이 구형(반란·내란수괴죄 등)됐다. 1999년 5월엔 두 사람의 사진이 광주 5·18 묘역에서 철거되는 일이 벌어졌다. 신군부의 살인진압에 분노한 참배객들이 3년 전 피의자 신분으로 법정에 선 두 사람의 사진을 찢어 훼손했다. ‘문민정부’ 탄생 과정에서도 얼굴사진은 권력 쟁투의 최전선에 있었다. 총선과 대선이 한꺼번에 치러진 1992년 민주자유당 국회의원 후보들은 선거 홍보물에 자신의 사진보다 김영삼의 사진을 더 크게 실었다. 총선을 이용한 ‘김영삼 대통령 만들기’ 전략이었다. ‘(김영삼) 총재 존영 엽서’도 제작됐다. 대통령선거법(출판물·책자는 70쪽 이내의 정견집 1종만 허용)을 위반한 이 인쇄물은 일반 유권자들에게까지 배포됐다. 1994년부터 대통령 얼굴사진도 부드러워졌다. 공보처는 전국 각급기관에 걸린 근엄한 표정의 김영삼 사진을 앉아서 웃거나(가로 사진) 서서 책 읽는 모습(세로 사진)으로 교체했다. 공무원들 사이에선 “사진 바꾼다고 성수대교 붕괴(1994년 10월21일)로 떨어진 지지도가 만회될지 의문”이란 말이 돌았다. 이듬해 7월 민주당 출신 서울시 민선 구청장들은 “지방자치시대에 걸맞지 않다”며 여당 대통령 얼굴사진의 집무실 비치를 거부하기도 했다. 군사정권 때와는 다른 장면들이 대통령 얼굴사진을 두고 목격되기 시작했다. 본격적 ‘탈권위’는 김대중 정권에서 시도됐다. 김대중은 ‘각하’란 호칭을 쓰지 못하게 했고 관공서의 대통령 사진도 걷어냈다. 퇴출된 존영의 복귀를 요구한 것은 군 장성들이었다. 대통령 취임 직후 국방부는 “존영을 각급 부대에 게시하는 것은 군의 사기 진작과 군 최고통수권자에 대한 절대충성 및 강력한 지휘체계를 상징한다”며 수차례 허락을 구했다. 3개월간 답을 주지 않던 김대중은 재게시를 승인하되 조건을 달았다. 장성급 지휘부대로 제한해 총 464개의 사진만 허용했다. 김영삼 정부 땐 232부대에 모두 1533개의 사진이 걸렸다. 권위주의와 비례하고 민주주의와 반비례 권위주의가 승한 시대에 최고 권력자와의 거리는 하위 권력의 크기를 재는 척도가 된다. 박근혜 정권에서 되살아난 ‘존영 투쟁’은 그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논란은 여야 설전으로까지 번졌다.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지금이 무슨 여왕의 시대냐”고 꼬집었다. 새누리당은 “더민주도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진을 존영이라고 언급했다”며 맞받았다. 노무현 정부 때도 ‘존영’이란 용어가 사용되긴 했다. 국가기록원에서 ‘존영’을 검색하면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부터 2010년까지 326건의 정부 공식 자료(문서·사진·필름 등)가 확인된다. 1941~1950년 3건→1951~1960년 17건→1961~1970년 64건→1971~1980년 155건→1981~1990년 48건→1991~2000년 36건→2001~2010년 3건의 추이를 보인다. 정권별로 재분류해도 ‘현상’은 선명하다. 이승만 18건→윤보선 2건→박정희 173건→전두환 82건→노태우 21건→김영삼 20건→김대중 7건→노무현 3건이다. 단어 ‘존영’이 포함된 정부 자료는 박정희·전두환 때 최대 생산량을 기록했다. 김대중·노무현을 거치면서 존영이란 용어는 거의 사라졌다. ‘존영’의 사용 빈도는 권위주의와 비례하고 민주주의와 반비례했다. 존영이라 일컫는 대통령 얼굴사진은 대개 증명사진 형태를 띤다. 대통령 전속 사진가가 찍는 경우는 많지 않다. 보통 당선인 시절에 찍는다. 당선되자마자 수많은 ‘공짜 촬영’ 제안이 들어온다. “웬만한 유명 사진가나 스튜디오들은 모두 ‘오퍼’를 넣는다고 보면 된다. 사실상 로비인 경우가 많다. 자기 작업실에 대통령 사진 하나 걸어놓는 것만큼 큰 홍보가 어디 있겠나.” 과거 청와대에서 대통령 전속으로 일했던 한 사진가는 전했다. 당선자가 특정인을 지명하지 않는 한 일반적으로 비서진이 사진가를 고른다. ‘그동안 도움 받은 데 대한 답례’로 촬영 기회를 주는 경우도 있다. 취임 전 얼굴사진을 찍은 대통령들은 임기 후반에 한 차례 더 촬영하기도 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당선인 시절의 사진을 끝까지 사용했고, 이명박 전 대통령은 임기 말에 새로 찍었다. 대통령 사진은 ‘대통령 전속’이 소속된 청와대 춘추관에서 관리하지만, 민간 사진가들이 찍은 얼굴사진은 국가가 생산한 공식자료가 아니다. 개인이 찍은 대통령 개인의 소유다. 반드시 찍어야 한다는 원칙도 없고, 어떻게 찍어야 한다는 규정도 없으며, 어떻게 관리돼야 한다는 매뉴얼도 없다. 새누리당이 탈당 의원들에게 액자와 프린트 비용을 돌려달라고 할 순 있어도 대통령 사진의 소유권을 주장할 순 없다. ‘존영의 역사’는 한국 현대사의 압축판이다. 얼굴에도 계급이 있다고 믿는 대통령들의 시대는 평생 존영의 피사체로 살아본 적 없는 국민들에겐 수난의 시기였다. 누군가의 사진에 권력과 권위를 부여하는 정치 행위가 계속되는 한 존영도 시대착오적 이름을 연명할 것이다. ‘박근혜 존영 논란’을 지켜본 전직 대통령 전속 사진가는 말했다. “대통령의 얼굴사진에 기대 ‘진박’과 ‘멀박’(멀어진 친박)을 다투는 현실이 웃긴다. 사진은 사진일 뿐이다. 한낱 사진이 권력의 상징이 된 것은 사진의 주인공이 절대권력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박정희 사진 손자국 났다고 폭행
전두환 얼굴은 명함판으로 승격
신군부 대통령 사진의 민주화 시련
박정희·전두환 때 ‘존영’ 최다 사용 김대중, 대통령 사진 탈권위 시도
노무현에 이르러 ‘존영’ 거의 소멸
존영의 역사는 한국 현대사 압축판
“한낱 사진이 권력 상징 된 이유는
사진 주인공의 절대권력화 때문” 전두환의 ‘우표 정치’ 전두환은 1979년 12·12 쿠데타로 ‘정권 접수’를 시작했다. 이듬해 6월부터 신문지상에선 ‘권력의 역전’이 일어났다. 최규하 당시 대통령의 이름과 얼굴사진이 신문에서 줄어들고 전두환의 이름을 언급하는 횟수가 늘어났다. 7월이 되면서는 전두환의 얼굴사진도 증명사진 크기에서 명함판 크기의 ‘존영’으로 교체됐다. 내무부 공보과 소속 사진사(모창주)는 전두환 부부를 촬영할 때 특히 긴장했다. “외모가 세상의 입에 많이 오르내린” 그들은 가장 조심스런 피사체였다. “전 대통령은 절대 위에서 내려찍지 않고 우측 15도 각도에서 찍어야 머리숱이 많이 나온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터득했다. 이순자 여사는 턱 때문에 항상 정면사진만 찍어야 했다.”(<동아일보> 1997년 3월19일 보도) 노태우는 1987년 6·10 항쟁의 거대한 분노를 겪고서야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 그도 시대의 요구를 무시하지 못했다. 1988년 2월 대통령취임준비위원회는 “정부기관 외엔 대통령 사진 부착을 재고하고 ‘존영’이란 용어는 사용하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서울시청 현관에 걸린 전임 대통령의 대형 사진 3점을 떼어내되 그 자리에 자신을 밀어 넣지도 않았다. 중앙의 전두환 단독 사진은 어린이들이 만세를 부르는 사진으로, 왼쪽의 전두환 서울대공원 방문 사진은 올림픽 준비 현황 사진으로 교체했다. 전두환이 아시안게임 메달리스트들과 촬영한 오른쪽 사진은 남대문 분수 사진으로 바꿨다. 용어(존영) 사용 자제와는 별도로 얼굴사진은 변함없이 하달했다. 대형 액자는 관공서로 보내 벽에 걸도록 했고, 탁상용 액자는 공무원들 책상에 비치하도록 했다. 민주화는 ‘신군부 대통령’의 얼굴엔 시련이었다. 1988년 봄 서울과 대전에서 ‘노태우 풍자전’이 열렸다. 한국 역사상 현직 대통령을 비판한 첫 전시회였다. 같은 해 10월엔 대학생 23명이 국회 의원회관 정호용(민정당) 의원실에 진입했다. ‘5공 비리 척결과 광주학살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노태우의 액자사진을 창밖으로 내던졌다. 1996년 8월 전두환과 노태우에게 사형과 무기징역이 구형(반란·내란수괴죄 등)됐다. 1999년 5월엔 두 사람의 사진이 광주 5·18 묘역에서 철거되는 일이 벌어졌다. 신군부의 살인진압에 분노한 참배객들이 3년 전 피의자 신분으로 법정에 선 두 사람의 사진을 찢어 훼손했다. ‘문민정부’ 탄생 과정에서도 얼굴사진은 권력 쟁투의 최전선에 있었다. 총선과 대선이 한꺼번에 치러진 1992년 민주자유당 국회의원 후보들은 선거 홍보물에 자신의 사진보다 김영삼의 사진을 더 크게 실었다. 총선을 이용한 ‘김영삼 대통령 만들기’ 전략이었다. ‘(김영삼) 총재 존영 엽서’도 제작됐다. 대통령선거법(출판물·책자는 70쪽 이내의 정견집 1종만 허용)을 위반한 이 인쇄물은 일반 유권자들에게까지 배포됐다. 1994년부터 대통령 얼굴사진도 부드러워졌다. 공보처는 전국 각급기관에 걸린 근엄한 표정의 김영삼 사진을 앉아서 웃거나(가로 사진) 서서 책 읽는 모습(세로 사진)으로 교체했다. 공무원들 사이에선 “사진 바꾼다고 성수대교 붕괴(1994년 10월21일)로 떨어진 지지도가 만회될지 의문”이란 말이 돌았다. 이듬해 7월 민주당 출신 서울시 민선 구청장들은 “지방자치시대에 걸맞지 않다”며 여당 대통령 얼굴사진의 집무실 비치를 거부하기도 했다. 군사정권 때와는 다른 장면들이 대통령 얼굴사진을 두고 목격되기 시작했다. 본격적 ‘탈권위’는 김대중 정권에서 시도됐다. 김대중은 ‘각하’란 호칭을 쓰지 못하게 했고 관공서의 대통령 사진도 걷어냈다. 퇴출된 존영의 복귀를 요구한 것은 군 장성들이었다. 대통령 취임 직후 국방부는 “존영을 각급 부대에 게시하는 것은 군의 사기 진작과 군 최고통수권자에 대한 절대충성 및 강력한 지휘체계를 상징한다”며 수차례 허락을 구했다. 3개월간 답을 주지 않던 김대중은 재게시를 승인하되 조건을 달았다. 장성급 지휘부대로 제한해 총 464개의 사진만 허용했다. 김영삼 정부 땐 232부대에 모두 1533개의 사진이 걸렸다. 권위주의와 비례하고 민주주의와 반비례 권위주의가 승한 시대에 최고 권력자와의 거리는 하위 권력의 크기를 재는 척도가 된다. 박근혜 정권에서 되살아난 ‘존영 투쟁’은 그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논란은 여야 설전으로까지 번졌다.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지금이 무슨 여왕의 시대냐”고 꼬집었다. 새누리당은 “더민주도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진을 존영이라고 언급했다”며 맞받았다. 노무현 정부 때도 ‘존영’이란 용어가 사용되긴 했다. 국가기록원에서 ‘존영’을 검색하면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부터 2010년까지 326건의 정부 공식 자료(문서·사진·필름 등)가 확인된다. 1941~1950년 3건→1951~1960년 17건→1961~1970년 64건→1971~1980년 155건→1981~1990년 48건→1991~2000년 36건→2001~2010년 3건의 추이를 보인다. 정권별로 재분류해도 ‘현상’은 선명하다. 이승만 18건→윤보선 2건→박정희 173건→전두환 82건→노태우 21건→김영삼 20건→김대중 7건→노무현 3건이다. 단어 ‘존영’이 포함된 정부 자료는 박정희·전두환 때 최대 생산량을 기록했다. 김대중·노무현을 거치면서 존영이란 용어는 거의 사라졌다. ‘존영’의 사용 빈도는 권위주의와 비례하고 민주주의와 반비례했다. 존영이라 일컫는 대통령 얼굴사진은 대개 증명사진 형태를 띤다. 대통령 전속 사진가가 찍는 경우는 많지 않다. 보통 당선인 시절에 찍는다. 당선되자마자 수많은 ‘공짜 촬영’ 제안이 들어온다. “웬만한 유명 사진가나 스튜디오들은 모두 ‘오퍼’를 넣는다고 보면 된다. 사실상 로비인 경우가 많다. 자기 작업실에 대통령 사진 하나 걸어놓는 것만큼 큰 홍보가 어디 있겠나.” 과거 청와대에서 대통령 전속으로 일했던 한 사진가는 전했다. 당선자가 특정인을 지명하지 않는 한 일반적으로 비서진이 사진가를 고른다. ‘그동안 도움 받은 데 대한 답례’로 촬영 기회를 주는 경우도 있다. 취임 전 얼굴사진을 찍은 대통령들은 임기 후반에 한 차례 더 촬영하기도 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당선인 시절의 사진을 끝까지 사용했고, 이명박 전 대통령은 임기 말에 새로 찍었다. 대통령 사진은 ‘대통령 전속’이 소속된 청와대 춘추관에서 관리하지만, 민간 사진가들이 찍은 얼굴사진은 국가가 생산한 공식자료가 아니다. 개인이 찍은 대통령 개인의 소유다. 반드시 찍어야 한다는 원칙도 없고, 어떻게 찍어야 한다는 규정도 없으며, 어떻게 관리돼야 한다는 매뉴얼도 없다. 새누리당이 탈당 의원들에게 액자와 프린트 비용을 돌려달라고 할 순 있어도 대통령 사진의 소유권을 주장할 순 없다. ‘존영의 역사’는 한국 현대사의 압축판이다. 얼굴에도 계급이 있다고 믿는 대통령들의 시대는 평생 존영의 피사체로 살아본 적 없는 국민들에겐 수난의 시기였다. 누군가의 사진에 권력과 권위를 부여하는 정치 행위가 계속되는 한 존영도 시대착오적 이름을 연명할 것이다. ‘박근혜 존영 논란’을 지켜본 전직 대통령 전속 사진가는 말했다. “대통령의 얼굴사진에 기대 ‘진박’과 ‘멀박’(멀어진 친박)을 다투는 현실이 웃긴다. 사진은 사진일 뿐이다. 한낱 사진이 권력의 상징이 된 것은 사진의 주인공이 절대권력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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