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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정치일반

아일랜드 보통시민 99명, 풀뿌리 개헌을 논하다

등록 2017-02-09 08:55수정 2017-02-09 22:27

[1987~2017 광장의 노래]
3부 다시, 문제는 민주주의다 ③-진화하는 민주주의

18살 청년부터 77살 어르신까지
1년간 낙태금지 등 5대과제 논의
옛 그리스 ‘참여 민주주의’ 실험중
시민의회 위원들은 ‘평범한 비전문가들’로 이뤄진다. 대신 전문가들을 불러 치열한 학습과 토론을 벌인다. 이들이 도출하는 최종 결론은 ‘평범한 사람들의 전문적 식견’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 4일 아일랜드 더블린의 그랜드호텔 말라하이드에서 열린 시민의회 제3차 회의에서 전문가들이 낙태 금지 문제를 두고 찬반 토론을 밝히고 있다. 아일랜드 시민의회 제공.
시민의회 위원들은 ‘평범한 비전문가들’로 이뤄진다. 대신 전문가들을 불러 치열한 학습과 토론을 벌인다. 이들이 도출하는 최종 결론은 ‘평범한 사람들의 전문적 식견’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 4일 아일랜드 더블린의 그랜드호텔 말라하이드에서 열린 시민의회 제3차 회의에서 전문가들이 낙태 금지 문제를 두고 찬반 토론을 밝히고 있다. 아일랜드 시민의회 제공.
18살 조던 카셀스가 앉은 원탁에 보고서들이 쌓여갔다. 낙태를 둘러싼 의학·법·윤리 논쟁에 관한 전문가 보고서다. 이틀간 그는 보고서를 쓴 전문가의 현장 발표를 듣고, 다른 시민과 원탁 토론을 벌였다. 그는 아일랜드에서 가장 민감한 헌법 조항을 고치는 ‘시민의회’ 위원이다. 토론 참석을 위해 집에서 약 250㎞ 떨어진 더블린에 왔다. 그에게 ‘내용이 어렵지 않으냐’고 물었더니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자세한 정보를 듣고 함께 토론하기 때문에 이해하는 데 어려움은 없다.” 시민의회를 구성하면서 지식의 전문성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면접원들이 전국의 집을 직접 방문해 시민의회 참석 여부를 확인하면서 공통으로 설명한 내용이 있었다. “옳고 그른 답은 없습니다. 논의 사항에 대해 전문 지식이 없어도 됩니다. 시민의회가 듣고자 하는 건 바로 당신의 의견입니다.”

 <한겨레>는 2월4일부터 5일까지 아일랜드 더블린의 그랜드호텔 말라하이드에서 열린 시민의회 제3차 회의 전 과정을 취재했다. 촛불이 광화문 광장을 가득 덮은 이후 직접 민주주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가운데, 시민참여형 개헌과 참여 민주주의의 유의미한 실험으로 평가받는 아일랜드 시민의회를 직접 찾은 것이다. 아일랜드 의회의 정식 의결로 출범한 시민의회는 전국에서 무작위로 뽑은 시민 99명과 정부에서 의장으로 임명한 대법관 1명 등 100명으로 이뤄져 있다. 자원한 시민들 중에서 추첨으로 500명을 뽑아 국가 의사 결정에 참여시킨 고대 그리스 평의회가 현대 유럽에서 유사하게 재현된 것이다. 

 시민의회는 시민 의견을 형식적으로 듣는 공청회가 아니다. 지난해 10월 출범한 시민의회는 1년간 활동하며 개헌과 국가 주요 과제를 다루고 있다. 1983년에 낙태를 금지한 아일랜드의 ‘헌법 제8조 수정안’에 대한 재수정 여부를 비롯해 국민투표 시기 및 방식, 의회선거일 고정 문제, 인구 고령화 대책, 기후 변화에 대한 아일랜드의 대응 방법 등 5가지를 논의한다. 각 주제마다 참석자 과반수로 권고안을 채택해 의회에 전달한다. 의회는 권고안마다 수용 여부를 밝혀야 한다. 만약 권고안이 수용되고 헌법 개정이 필요한 경우 국민투표에 부친다.

 시민의회 의장인 메리 러포이 대법관은 시민의회가 출범할 당시 이 실험에 대해 “참여민주주의 모델이자 (시민이 토론하고 대안을 찾아가는) 숙의 민주주의의 훈련”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그는 “아일랜드 사회가 직면한 가장 민감한 문제를 푸는 데 시민을 그 핵심에 올려놓았다”는 점을 강조하며 “시민의회 성공은 어떠한 공격이나 비평에 대한 두려움 없이 시민들이 의견을 자유롭고 자신감 있게 말할 때 가능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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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 시민의회 현장은 아일랜드 국민 구성의 축소판처럼 보였다. 14개 원형 탁자에 18살 청년부터 시민의회 최고령인 77살 노인까지 다양한 연령의 시민이 둘러앉아 있었다. 청바지를 입는 등 복장도 자유로웠다. 시민위원들은 지난해 8~9월 사이 선정됐다. 여론조사기관이 인구통계를 근거로 표본추출 기준을 만든 뒤 면접원들이 지역별로 집을 방문해 참석 의사를 밝힌 사람 중에 기준에 맞는 대상을 찾아냈다. 시민의회 사무국은 “연령·성별·사회계층·지역분포 등이 고려됐기 때문에 아일랜드 국민의 대표성이 있는 시민들”이라고 설명했다. 시민의회가 논의할 주제와 관련된 단체에 가담했거나 그럴 계획이 있는 사람들은 제외했다. 언론·정치권 등에서 일하는 가족이 있는 사람도 배제했다. 보통의 시민들이 얻는 정보의 수준을 가진 사람들이 시민의회에 참석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시민의회는 의장을 포함해 여성이 100명 중 52명, 남성이 48명으로 구성됐다. 참가 연령의 하한선은 아일랜드 국민투표가 가능한 18살로 잡았다. 시민 99명이 중도 포기할 경우를 대비해 이들과 비슷한 조건을 가진 또다른 인원 99명을 예비로 마련했다. 실제 11명이 초반부터 하차를 결정해 지난해 11월 1차 회의 때 11명이 예비 인원에서 충원됐다. 언제든 중도에 포기할 수 있으며, 이럴 경우 같은 연령·성별·지역 조건 등을 가진 예비 인원으로 교체된다. 시민 99명에게 교통·숙박·식비가 제공되지만 다른 수당은 지급되지 않는다. 시민의회 1년 운영예산은 일단 60만유로로 잡혀 있다.

2008년 금융위기뒤 ‘보완책’으로 시작
연령·성·사회계층·지역 고려 의회 꾸려
중립 위해 언론·정치인과 그 가족 배제

주제발표→원탁토론→질의응답 반복
생중계 통해 일반 시민들 의견도 받아
의회는 사안별 권고안 수용 여부 밝혀

“중요한 건 당신의 의견입니다”
전문지식 없는 18살 청년도 참여
“민주주의 진회 위한 의미있는 시도”

 현재 시민의회는 아일랜드의 가장 오래된 논쟁거리인 낙태 금지 문제를 가장 먼저 논의하고 있다. 아일랜드는 태아의 생명을 존중해야 한다며 1983년에 헌법 제8조를 수정해 낙태를 금지했다. 산모의 생명이 심각하게 위험하지 않으면 낙태를 할 수 없다. 성폭력 피해로 임신했거나, 태아가 중대한 결함이 있다고 판단되어도 산모가 낙태를 결정할 수 없다. 2012년 아일랜드에 사는 인도 출신 여성 사비타는 아이가 유산될 것이란 진단을 받은 뒤 인공유산을 병원에 요청했지만 아이 심장이 뛰고 있어 수술할 수 없다는 결정 때문에 자신의 건강도 악화돼 죽음에 이르렀다. 이 일을 계기로 낙태를 불법으로 규정한 아일랜드 헌법 제8조 수정안의 재개정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더욱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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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일 아일랜드 더블린의 그랜드호텔 말라하이드에서 열린 시민의회 제3차 회의에서 99명의 시민위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전문가들이 낙태 금지 문제를 두고 찬반 토론을 밝히고 있다. 아일랜드 시민의회 제공
 ‘평범한 시민’들로 이뤄진 아일랜드 시민의회는 여성의 자기결정권과 태아의 생명권, 의학, 윤리, 법적 문제가 복잡한 이 문제에 어떻게 다가갈까. 시민참여형 개헌이 제기될 때마다 반박 근거로 시민들의 전문성 부족이 거론되고 있기 때문이다. 아일랜드 시민의회는 이번 제3차 회의 내내 전문가 9명의 주제 발표, 발표 내용에 대한 원탁별 토론, 전문가를 상대로 한 질의응답을 반복하며 낙태 문제를 둘러싼 쟁점을 학습하고 자신의 의견을 정리해갔다. 탁자별로 회의 진행자와 기록자가 배치돼 시민의 토론을 돕는다.

낙태·동성결혼 시민이 결정…‘그리스 아고라’ 재현

 발표 전문가들도 다양했다. 영국과 아일랜드의 낙태 실태를 비교 연구한 산부인과 의사, 성범죄로 인한 임신 실태 등을 조사한 성폭력 센터 전문가, 법학교수, 의학전문 교수,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존중해야 한다는 학자와 태아의 생명을 보호해야 한다는 윤리 분야 교수 등이 시민들 앞에서 낙태에 관한 쟁점과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세계의 낙태 현황 등을 조사한 미국의 연구원도 초대됐다. 

 시민들은 질의응답 시간에 구체적인 통계수치를 다시 요구하기도 했고, 낙태 금지가 법에서 규정한 인권과 어떻게 충돌하는지 등을 매우 상세하게 질문하기도 했다. 그래서 “아주 중요한 질문”이라고 운을 떼며 답변하는 전문가가 많았다.

 전문가 발표에 나선 더블린대학의 도널 오마투나 교수는 “질문 내용을 보면서 시민들이 이 쟁점을 잘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시민들이 (전문성이 부족한) 평범한 사람들이라고 말하지만, 기존 정치인도 그런 평범한 시민들 중에서 뽑힌 사람들이다”라고 말했다. 현재 시민의회는 ‘낙태 주제’와 관련해 회의마다 전문가를 부르는 것 외에 의학법률 전문가, 헌법 전문가(2명), 산부인과 의사(2명) 등 5명의 상설 자문그룹을 따로 두고 있다. 시민의회는 참가자들이 각 이슈에 대해 이해도를 높이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회의가 시작될 때와 끝날 때마다 해당 주제에 대한 몇 개의 질문에 대해 참가자들이 의견을 적도록 하고 있다.

지난 4일 아일랜드 더블린의 그랜드호텔 말라하이드에서 열린 시민의회 제3차 회의에 참가한 시민위원들의 원탁에는 토론 대상인 ‘낙태 금지‘와 관련한 각종 자료가 수북히 쌓여 있다. 더블린 한겨레 송호진 기자
지난 4일 아일랜드 더블린의 그랜드호텔 말라하이드에서 열린 시민의회 제3차 회의에 참가한 시민위원들의 원탁에는 토론 대상인 ‘낙태 금지‘와 관련한 각종 자료가 수북히 쌓여 있다. 더블린 한겨레 송호진 기자
 시민의회는 시민들이 자유롭게 발언할 수 있도록 이름과 거주 지역 외에 참가자의 다른 신상 정보를 밝히지 않는다. 이익·로비단체의 신상 공격이나 개별접촉을 받지 않도록 하려는 의도도 깔려 있다. 시민의회 참가자들은 해당 주제의 논의가 결정될 때까지 언론 인터뷰나 페이스북 등을 통한 공개적 의견 표명도 금지돼 있다. 매달 한번씩 주말에 회의를 여는 시민의회는 4월까지 낙태 문제를 논의해 헌법 수정 여부를 찬반 투표로 정한 뒤 결정 사항을 의회에 전달한다. 그 이후 5~7월까지 나머지 4개 주제를 집중 토론한다. 원탁별 개별토론을 제외한 모든 회의를 인터넷으로 생중계한다. 일반 시민들의 의견 제안도 받는데, 낙태와 관련해선 찬반 단체들의 적극 참여로 1만3500건 이상이 접수됐다. 

 아일랜드에서 시민의회가 가능했던 것은 2008년 세계 금융위기를 거치며 아일랜드 사회가 크게 흔들리면서부터다. 정치학자인 데이비드 패럴 더블린대학(UCD) 교수는 “경제 위기를 겪으며 국민들이 정치 리더십과 정치 시스템에 더 불만을 갖게 됐고 그 보완책을 찾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렇게 등장한 것이 2012년 12월부터 2014년 3월까지 시민이 참여해 운용한 아일랜드 헌법회의다. 아일랜드는 헌법회의를 정식 구성하기 이전에 100명의 시민을 모아 ‘시민과 함께’(With The Citizen)란 시범기구를 1박2일간 운용한 뒤 전문가 발표와 토론을 거치면 시민의 이해력이 높아진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 뒤 의원 33명, 무작위 추첨된 시민 66명, 의장 1명 등 100명으로 구성된 헌법회의가 공식 출범했다. 헌법회의의 권고안 중 ‘동성결혼 허용’이 국민투표로 최종 결정됐다. 이 경험이 시민들로만 구성된 시민의회 출범의 바탕이 됐다. 

 그러나 시민의회가 시민의 폭넓은 지지를 받으며 진행되지 못하는 한계도 있다. 실제 더블린 시내에서 만난 시민들 상당수가 시민의회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 30대 남성 로넌은 “정치권에서 벌어지는 기사가 집중 보도되고 있어 1년간 장기적으로 토론하는 시민의회에 관심이 적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낙태 금지를 규정한 헌법 제8조를 개정하라는 시민사회 요구가 계속 제기됐는데도 정치권이 예민한 문제를 시민에게 떠넘겼다는 비판도 있다. 하지만 데이비드 패럴 교수는 “시민의회는 민주주의 진화를 위한 시도로서 의미가 있다. 시민의 정치참여는 시민들의 요구뿐 아니라 (국가의 중요 문제에) 시민을 참여시키겠다는 정치인의 의지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번 제3차 회의 중에 메리 러포이 시민의회 의장은 “낙태 문제에 대해 어떤 결정이 나더라도 밖에 얘기하지 말라고 사람들이 주의를 주는데 사실 난 결정이 어떻게 날지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했다. 시민 99명이 웃음을 터뜨렸다. 정부가 임명한 의장은 이 회의의 조율자일 뿐 결정의 주체는 평범한 시민 99명이란 사실이 그의 말에 함축돼 있다. 

더블린/송호진 기자 dmzsong@hani.co.kr


‘그들만의 리그’는 그만…‘한국판 시민의회’ 제주 주민자치위원 추첨제 실험

2009년 제주대 법학전문대학원에 입학하면서 제주살이를 시작한 강전애(37) 변호사는 지난 1월 제주시 이도2동 주민자치위원이 됐다. 30대 여성인 그가 지역 주민 대표로 뽑힐 수 있었던 이유는 제주도의회가 지난해 7월 조례를 개정해 자치위원을 추첨제로 바꿨기 때문이다. 강 변호사는 “9년째 제주에 사는데도 마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어 답답했다”며 “올해부터 ‘뺑뺑이’로 자치위원을 선출한다고 해서 자치학교를 이수하고 응모했다”고 말했다. 지난해 12월 그는 2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자치위원에 ‘당첨’됐다. 강 변호사는 “새로운 사람들이 적극 참여하면 제주도가 많이 변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아일랜드의 ‘시민의회’처럼 시민이나 지역 대표를 추첨제로 뽑는 실험이 한국에서도 싹트고 있다. 주민의회와 비슷한 제주도 주민자치위원회는 43개 읍·면·동마다 각각 15~35명의 자치위원을 선발하는데 올해 처음 추첨제를 도입했다. 그동안은 이장·통장협의회가 추천하고 읍·면·동장이 자치위원을 선임해왔다. 그 결과, 지역 유지나 관변단체가 위원직을 독점해 주민 대표성이 떨어진다는 비판이 많았다.

기존 지역유지나 관변단체가 독점
올해 처음 추첨제로 주민대표 뽑아
“선거·추천과 달리 특정인 위주로
구성되지 않아 대표성 확보 가능”

2015년 5월 제주대 교수회, 제주주민자치연대 등 6개 지역 시민단체는 ‘제주특별자치도주민자치제도개선협의회’를 발족해 제도 개선 방안을 모색했다. 추첨제가 대안으로 떠올랐다. 신용인 제주대 교수(법학전문대학원)는 “주민자치를 실현하려면 다수의 주민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참여할 수 있는 제도적 보장이 필요했다. 추첨제는 누구나에게나 선발 가능성이 열려 있어 가장 바람직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고 말했다. 그러나 무능하거나 불성실한 사람이 자치위원으로 선정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와 자치학교를 이수해야만 자치위원으로 지원할 수 있도록 자격제한을 뒀다.

지난해 12월 42개 지역에서 자치위원 1028명을 선발했는데 47%(477명)는 주민 추첨으로, 53%(547명, 기타 4명)는 지역·직능대표로 뽑았다. 대부분을 주민 추첨으로 뽑으려던 애초 계획에서 한발 물러선데다 제주도가 자치학교도 낮에 4차례만 열어 주민들의 항의가 빗발쳤다. 그런데도 주민 1700여명이 이 과정을 수료했다. 한재림 제주시 일도2동 주민자치위원장은 “지역 유지들이 독점할 때는 ‘그들만의 리그’라서 관심이 없었는데 추첨제로 누구나 될 수 있다니까 지역 주민의 자치학교 참여 열기가 뜨거워졌다”고 설명했다.

헌법개정 과정에 국민이 직접 참여하는 방안을 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우리나라는 1948년 처음 헌법을 만들 때나 그 이후 9차례나 헌법을 고쳤지만, 국민이 개헌의 주체로 나선 적이 없다. 1960년 4·19 혁명 뒤 제3차 개헌이나 1987년 6월항쟁 뒤 제9차 개헌 때도 국민은 빠지고 정치권이 적당히 타협해 헌법을 개정했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촛불의 결과로 1987년 이후 30년 만에 국회 헌법개정특별위원회가 구성됐지만 여전히 개헌 문제를 정치인끼리 다루려 한다. 지난 1월부터 활동하는 개헌 특위(위원장 이주영)도 여야 의원 36명으로만 구성됐다. 각 분야 전문가를 자문위원으로 위촉하지만 일반 국민이 개헌 과정에 참여할 길은 여전히 막혀 있다. 개헌을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국민투표만 보장될 뿐이다. 하승수 비례민주주의연대 대표(변호사)는 “일반 법률을 개정할 때도 입법예고 등의 절차를 밟고 국민 의견을 수렴하는데 국가의 근간이 되는 헌법개정을 하면서 그보다 더 부실한 의견수렴을 한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개헌 특위에 참가하는 김종민 의원(더불어민주당)은 무작위 추출 방식으로 200~300명을 선발해 시민위원회를 구성할 것을 제안한다. 그는 “시민위원회에서 개헌의 주요 쟁점을 토론하고 공론 조사를 벌여 개헌 특위에 의견서를 제출할 수 있도록 ‘국민참여형 개헌 절차법’을 발의할 것”이라고 말했다. 추첨민회네트워크는 지난 6일 윤소하 의원(정의당) 소개로 ‘헌법개정안 마련을 위한 시민의회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을 입법 청원했다. 무작위 추첨 방식으로 선발한 300명의 위원으로 시민의회를 1년간 구성하는 게 뼈대다.

시민의회는 왜 추첨으로 구성해야 할까. 이지문 연세대 연구교수(정치학)는 “누구라도 민회 구성원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추첨제는 민주주의의 핵심인 자유에 부합한다”고 설명했다. “선거나 추천과 달리 특정 계층 위주로 구성되지 않아 ‘대표성’을 확보할 수 있고 무엇보다 시민교육의 장으로서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 김상준 경희대 공공대학원 교수(사회학)는 “다른 나라 사례를 보면 국회가 스스로 해결하기 어려운 헌법(아이슬란드, 아일랜드)이나 선거법(캐나다, 네덜란드, 오스트레일리아)을 개정할 때 시민의회가 소집됐다”며 “우리나라에서도 시민의회를 통해 국민이 개헌을 주도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네덜란드는 2006년에 시민의회 방식으로 첫 선거법 개정에 성공했다. 캐나다는 2004년 브리티시컬럼비아주에서, 2006년 온타리오주에서 선거법 개정을 위한 시민의회가 열렸다. 추첨으로 선발된 시민들은 학습과 공청회, 심의 단계를 밟으며 1년간 총회를 열었고 의결 사항은 주민투표에 회부됐지만 부결됐다. 2009년에는 아이슬란드가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한 ‘국민의회’를 구성했다. 세계 금융위기의 직격탄을 맞은 이 나라는 헌법 개정 등 국가 개조 작업에 나섰고 각계 대표 1500명이 국민의회를 만들어 개헌 안건을 선정하고 토론했다. 이후 정부는 공식적으로 인구비례에 맞춰 960명의 시민으로 무작위 추출한 ‘국민포럼’을 소집했고 이들은 국민의회에서 다뤄진 것을 포함한 주요한 헌법 이슈를 토론했다. 국민의회와 국민포럼에서 논의된 결과는 개헌안으로 만들어져 의회에 제출됐다. 2012년 개헌안은 국민투표를 통과(찬성 66.3%)했지만, 최종 관문인 의회에서 좌절됐다. 보수 야당인 독립당이 필리버스터를 통해 의회 표결을 무산시켰기 때문이다.

♣H6s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

(대의)민주주의는 결국, 모든 사람이 골고루 잘살 수 있도록 인류가 고안해낸 제도의 하나에 불과합니다. 제도에 문제가 있다면 고쳐야 합니다. <한겨레>는 스토리펀딩 ‘헬조선 리모델링 해볼까요?’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정책배틀’ 시민배심원단으로 참여해 더 나은 대한민국을 설계할 분들을 기다립니다. ▶클릭 https://storyfunding.daum.net/project/12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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