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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정치일반

거부할 수 없던 협박…사과와 부끄러움은 누구 몫일까

등록 2017-06-18 09:55수정 2017-08-13 09:29

[토요판] 법정 다큐 수인번호 503
② 블랙리스트와 국민의 봉사자들

김기춘 비서실장 임명 뒤 착수
세월호 참사 계기 현장에 강요
유진룡 “성의있게 명단 보내와”
장관·1급들 물러나자 노골화

김기춘 “편향된 것 바로잡는 과정”
박근혜 “부당했다면 사표 냈어야지”
문체부 공무원들 “거부 힘들었다”
국민에 대한 책임은 누가 져야 하나
‘블랙리스트의 어머니’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은 블랙리스트가 “비정상의 정상화”였다고 말한다. 김 전 실장이 지난 5월22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재판 출석을 위해 호송차에서 내려 구치감으로 향하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블랙리스트의 어머니’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은 블랙리스트가 “비정상의 정상화”였다고 말한다. 김 전 실장이 지난 5월22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재판 출석을 위해 호송차에서 내려 구치감으로 향하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블랙리스트 같은 것이 있는 것입니까?”(도종환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국회의원)

“제가 알고 있기로는 그런 것은 없고요.”(김종덕 당시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2015년 9월11일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처음으로 ‘블랙리스트’(문화예술계 지원배제 명단)라는 단어가 언급됐다. 그리고 1년4개월이 지난 2017년 1월9일 ‘박근혜 정부의 국정농단 의혹사건 진상규명 국정조사’에서 이용주 국민의당 국회의원이 당시 조윤선 문체부 장관에게 다시 묻는다.

“지금도 블랙리스트가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의원이 17차례 똑같은 질문을 하자 그는 마지못해 답했다.

“예술인들의 지원을 배제하는 그런 명단은 있었던 것으로 판단이 되고 있습니다.”

김 전 장관과 조 전 장관은 블랙리스트를 만들고 실행한 혐의(직권남용 권리행사 방해) 등으로 구속돼 재판을 받고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1월25일 <정규재티브이(TV)>와의 인터뷰에서 처음으로 블랙리스트에 대해 말했다.

“블랙리스트에 대해 알지 못합니까?”

“모르는 일입니다.”(박 전 대통령)

박 전 대통령의 태도는 바뀌지 않았다. 서울중앙지법 형사22부(재판장 김세윤)의 심리로 5월23일 열린 박 전 대통령의 첫 재판에서 유영하 변호사는 당당하게 되물었다.

“대수비(대통령 주재 수석비서관회의)에서 대통령이 좌편향 단체 (관련) 말씀이 있다고 해서 블랙리스트가 작성되고 (실행된) 일련의 과정까지 책임을 묻는다고 따진다면 살인범을 낳은 어머니에게 살인죄 책임을 묻는 것과 뭐가 다르겠습니까.”

“김 실장님은 존경스러운 분”

박근혜 정부가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실행했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쟁점은 블랙리스트가 죄가 될 수 있는지,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실행하라고 지시한 책임을 어디까지 물을 수 있느냐다. 서울중앙지법 형사30부(재판장 황병헌)의 심리로 3월1일 열린 공판준비기일에서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의 변호인은 “이전 정부에서 진행된 편향적 문화계 지원을 바로잡는 박근혜 정부의 비정상의 정상화가 직권남용이 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어 4월6일 재판에서도 김 전 실장의 변호인은 “피고인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의사와 지시를 그대로 이행하거나 전달한 것에 불과하다”고 밝혔다. 물론 박 전 대통령은 이를 부인하고 있다.

블랙리스트의 시작은 김 전 실장이 비서실장으로 임명된 2013년 8월 이후였고, 2014년 4월16일 세월호 참사 뒤 강화됐다고 알려져 있다. 유진룡 전 문체부 장관(2013년 3월~2014년 7월)은 “장관으로 취임할 때 큰 문제 없이 청와대와 정상적인 업무협의가 이루어졌지만 김기춘 비서실장 취임 뒤 보수의 가치 확산을 주장하며 정부에 비판적인 활동을 한 문화예술인들에 대한 지원 배제를 직접 암시하거나 모철민 전 청와대 교육문화수석(2013년 3월~2014년 6월)을 통해 문체부 실·국장에게 직접 요구했느냐”는 질문에 “예”라고 답했다. 유 전 장관은 “이 명단을 받고 대통령께 ‘이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리고 상당히 조용한 기간이 지났지만 세월호 참사가 있은 뒤 비서실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고 체계적인 명단을 성의있게 보내왔다”고 말했다. 그 이유에 대해 “세월호 참사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슬퍼했고 원인을 밝히고 재발방지 서명에 동참하자 대통령 비서실에서 언짢게 생각했던 것 같다”고 유 전 장관은 분석했다.

블랙리스트의 탄생과 성장을 이해하는 데에는 ‘블랙리스트의 어머니’ 김기춘 전 실장의 가치관이 중요하다. 송광용 전 교육문화수석(2014년 6월~2014년 9월)은 “‘보수 가치의 확산’이라는 말을 김 전 실장에게서 들은 기억이 있다. ‘헌법 가치 수호를 위해서 반국가체제나 이념 편향적인 것에 대한 지원이 이루어지면 곤란하다’는 말도 들었다”고 법정에서 진술했다. 조원동 전 청와대 경제수석(2013년 3월~2014년 6월)은 “김 전 실장은 애국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했는데 적극적인 의미로는 선거에서 (박 전 대통령을) 도운 분들은 인사상 반영하고 소극적 측면에서 보면 상대편 진영에 섰던 분들을 배제하는 것으로 작용하지 않았나 생각한다”고 진술했다. 이어 조 전 수석은 김 전 실장이 온 뒤 “결과적으로 대통령을 돕는다는 명목 아래 절차를 무시하고 대통령을 비호하면서 대통령 지시에 아무런 이의제기도 하지 않게 됐다. 검증 기능이 무력화돼 결국 비선 실세의 결정이 여과 없이 집행된 결과를 초래하게 했다”는 취지로도 말했다.

박 전 대통령은 김 전 실장의 생각에 얼마나 동의했을까. 본인이 직접 밝힌 적은 없지만 상당 부분 동의했다는 정황은 나왔다. 유 전 장관은 법정에서 2014년 7월9일 박 전 대통령과의 면담 내용을 공개했다. “‘세월호 참사로 국민들이 슬퍼하고 갈등이 깊어질수록 반대자들 의견을 듣고 끌어안아야 하는 거 아니냐. 반대했다고 쳐내기 시작하면 한 줌도 안 되는 자기편이 남을 거다’라고 말씀드렸다. 그런데 블랙리스트를 말하는데도 대통령은 전혀 반응 없어 이분이 다 알고 계셨구나 생각했다. 또 마지막에 김 전 실장에 대해 ‘우리가 모르는 것을 알고 계시는 게 있을 겁니다’라며 무한 신뢰를 표현해 대통령 뜻과 다른 김 전 실장만의 호가호위는 아니겠다, 절대 바뀔 가능성이 없구나 확신했다.” 지난 9일 김 전 실장 재판에 증인으로 나온 ‘문고리 3인방’ 중 한 명인 정호성 전 청와대 비서관의 증언은 박 전 대통령의 마음을 엿보게 한다. “김기춘 실장님은 제가 그동안 여러분들을 모시고 일을 해봤는데 정말 멸사봉공 자세가 확실한 존경스러운 분이다. 아주 명쾌하게 핵심을 잘 짚어내는 분이고 공직자로서 자세가 매우 훌륭한 분이었다.”

반정부·좌파로 찍히는 순간…

블랙리스트는 치밀하게 실행됐다. ‘보수 가치의 확산’을 강조한 김 전 실장은 취임 뒤 특정 연극이나 영화를 지목해 ‘조치’하라고 지시했다. 이순일 문체부 사무관은 “2013년 9월 무렵 청와대가 영화 <천안함 프로젝트>에 관심이 있어 경과 등을 보고하라고 했다”고 증언했다. 블랙리스트계의 ‘안종범 수첩’으로 불리는 박준우 전 청와대 정무수석(2013년 8월~2014년 6월) 수첩에도 2013년 9월9일 ‘천안함 영화 메가박스 상영 문제, 종북세력 지원의도 제작자 펀드제공자 용서 안 돼’라고 적혀 있었다. 이 사무관은 2014년 3월13일 영화진흥위원회(영진위)의 후원을 받는 대구 동성아트홀이 <천안함 프로젝트>를 상영하자 “신종필 당시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실 행정관이 영진위의 정부 국정철학에 반하는 영화 지원을 문제 삼으며 당장 동성아트홀에 대한 지원을 배제하라고 지시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동성아트홀의 지원 배제가 눈에 띄어서는 안 돼 문체부는 영진위의 지원 기준을 바꿔 다른 4개의 영화상영관과 함께 지원을 중단했다. 2013년 6500만원이던 지원금이 모두 삭감된 대구 유일의 예술영화관 동성아트홀은 운영난으로 2015년 2월 폐관했다, 새 인수자를 만나 다시 운영 중이다.

청와대는 2014년 4~5월 민간단체 보조금 티에프(TF)를 만들어 국가 보조금 지원 실태 조사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블랙리스트 작성에 나섰다. 우재준 전 청와대 국민소통비서관실 행정관은 “대통령을 비난하는 반정부, 좌파 세력에 의한 문화예술단체 지원을 많이 받는데 면밀히 살펴 조치하라고 (김기춘) 실장 지시사항으로 내려왔다. 충격적이어서 기억하고 있다”고 진술했다. 2014년 5월 청와대는 단체 130곳과 인사 96명을 지목한 ‘문제 단체 조치내역 및 관리방안’을 만들었다. ‘단체 대표 남편이 도종환 의원 비서관, 문재인 지지 1만명 예술인, 상임대표가 박원순 보궐선거 캠프 정책자문위원 역임, 사무국장이 진보신당 지지 선언, 한겨레신문 퇴직 직원들이 활동하는 단체, <엠비(MB)의 추억>이라는 전직 대통령 희화화한 다큐멘터리 지원비로 사용, 좌파성향 언론사….’

최초의 블랙리스트는 2014년 6월께 탄생했다. 최규학 전 문체부 기획조정실장은 “2014년 6월 당시 조현재 제1차관이 김소영 청와대 교육문화체육비서관에게 받아 온 80명의 명단이 최초의 블랙리스트였다. 유 장관은 문화예술계 배제는 심각하고 중대하기 때문에 이대로 적용하지 못한다고 했고 저희도 공감대를 형성했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청와대가 직접 블랙리스트를 준 상황이라 문체부는 지시를 이행하는 모양새를 갖추려 같은 달 ‘건전 콘텐츠 활성화 티에프(TF)’를 만들었다.

‘면피용’이었던 건전 티에프가 블랙리스트 집행 기구가 된 것은 2014년 7월 유 전 장관이 물러나고, 블랙리스트 작성에 소극적인 문체부 최 실장, 김용삼 종무실장, 신용언 문화콘텐츠산업실장 등 1급 공무원 3명이 청와대 강요로 사직한 2014년 10월 이후였다. 후임자로 건전 티에프에 관여한 송수근 전 기획조정실장은 “2014년 10월 하순경 김종덕 문체부 장관이 김 실장으로부터 문체부 업무를 챙기지 못했다고 지적받고 이념 편향적, 정치적 사업에 세금 지원은 바람직하지 않은데 문체부 사업 중에 그런 게 있는지 살펴보라고 했다”고 진술했다. 이후 문체부의 블랙리스트 집행이 심화됐다. 블랙리스트 명단은 1만여건까지 늘어났고, 13일 감사원 감사 결과를 보면 444건의 문화예술인·단체가 부당하게 지원 배제됐다. 블랙리스트는 2016년 가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진 뒤 언론에 공개되면서 자연 소멸했다. 김정훈 전 예술정책과장은 “<한국일보> 1면에 나온 뒤 이런 분위기에서 시스템이 돌아가겠냐, 우리도 못하겠다고 하면서 이 상황이 더 이상 진행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었다. 청와대와 공유고 뭐고 묻지도 않고 자연스럽게 중단됐다”고 말했다.

유영하 “나라면 사표 냈다”

증인으로 나온 문체부나 문체부 산하기관 공무원들에겐 ‘단골 질문’이 있다. “블랙리스트를 거부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가.” 박민권 전 문체부 제1차관(2015년 2월~2016년 2월)의 증언이다. “정면으로 거부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 당시엔 너무 공포스러운 분위기였다. 유 장관이 갑자기 면직되고 3개월 뒤 1급 3명이 옷을 벗었는데 조직 내에서는 굉장히 무서운 일이었다. 청와대 수많은 비서진들은 대통령의 분신으로 대통령의 뜻을 받들어 일하는 사람이다. (대통령과) 똑같은 비중으로 공무원들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이순일 사무관도 지시 거부는 어려웠다고 고백했다. “일반 공무원들 입장에서 청와대 지시는 다 따라야 되는 상황이다. 인사조치를 내달라고 할 수밖에 없지만 또 다른 사람이 와서 똑같은 일을 해야 한다.”

사과와 부끄러움은 ‘공범’인 공무원들만의 몫이었다. 문체부 산하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홍승욱 전 차장은 “문화예술 진흥을 위해 일해야 할 예술위 직원으로서 창피하고 죄송하다. 법의 결정으로 향후 이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정훈 전 과장은 우상일 전 예술정책관과 함께 조윤선 전 장관에게 블랙리스트를 더 이상 숨길 수 없으니 대국민 사과를 하자는 ‘간곡한 건의서’를 전달하기도 했다. 김 과장은 “이 문제가 시작된 후 고통스럽지 않은 직원들이 없었다. 국가와 국민을 위한 공직 봉사 보람보다는 블랙리스트 논란이 터지지 않도록 관리해야 하는 고민과 자괴감이 머릿속에서 떠난 적이 없다”고 고백했다. 옷을 벗었던 최규학 전 실장은 “국민들에게 불편부당하게 행동하고 사회적 약자에게 관심을 갖는 게 공무원의 역할인데 블랙리스트는 국민을 네 편 내 편으로 나누고 사회적 약자인 문화예술인을 지원 배제하라는 참 부당한 일이었다. 직업공무원 정신을 훼손하는 조치에 역사적 교훈과 판결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박 전 대통령은 블랙리스트 재판 기록을 보며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유영하 변호사가 대신 나섰다. “공무원들이 부당한 지시를 받아 정말 잘못했다고 이야기한다. 저도 공무원 해봤지만 저 같았으면 구질구질한 소리 안 하고 사표 내고 나왔을 거다.” 헌법 제7조 제1항은 ‘공무원은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이며 국민에 대하여 책임을 진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공익실현 의무 위반은 박 전 대통령이 파면된 이유 중 하나다. 블랙리스트의 대한민국에서 박 전 대통령부터 문체부 공무원들까지 공익실현 의무를 지킨 공무원은 과연 몇이나 될까.

김민경 기자 salma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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